한국에서 아옹다옹 말고 드넓은 세계로 눈돌리자
  • 이정훈 기자 ()
  • 승인 1997.11.2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우그룹 ‘글로벌 틈새’ 찾아 전 세계 공략 ‘성공’

 ‘한국 3등이 세계1등?’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이것이야말로 대우의 ‘세계경영’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다. 실제로 대우전자는 이 말을 지표삼아 오늘도 뛰고 있다. 국내 가전 사업의 양대 산맥은 삼성과 LG전자이다. 이 양웅(兩雄)간의 싸움에 말려 대우전자는 국내에서 3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외 거전 공자의 매출을 합치면 대우전자가 1등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세계경영의 묘미이다.

 국내 자동차 업계 부동의 1위는 현대자동차이다. 지난해까지는 기아자동차가2위이고 대우자동차는 3위였다. 여기에 삼성자동차가 가세함으로써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의 경쟁은 이미 치열할 대로 치열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우자동차가 1위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레간자등 세가지 차종을 동시에 출시한 후, 대우는 기아를 잡고 현대를 맹추격하고 있다. 여세를 몰아 해외 생산량을 늘인다면 생산 대수 면에서는 현대를 따라잡을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대우의 믿음이다.

 불황의 골이 깊어질수록 세계 경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93년 대우가 세계경영을 선포 할 때만 해도 시큰둥하던 다른 그룹과 경영연구소들이, 대우를 보고 배우자며 벤치마킹에 착수했다고 한다. 대우가 세계경영을 시작한 사정은 무엇인가. 김우중 회장의 리더십에 한국 경제를 불황에서 탈출시키는 해법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체감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대우에게 87~91년에 몰아친 노사 분규만큼 큰 시련은 없을 것이다. 양동생 노조위원장이 이끈 대우조선 노조와 인천의 노동자 단체가 지원한 대우자동차 노조가 연이어 쟁의에 돌입함으로써, 대우그룹은 와해위기를 맞았다. 특히 89년 대우조선은 하 노동자가 분신 자살함으로써 조업 정상화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팽배했었다.

 당시 조선업은 불황이었다. 정부 쪽에서는 조선삽업에 대한 구조 조정을 논의하며, 대우조선 폐업 방침을 밝혔다. 또 대우측에 자구책으로 서울의 대우센터를 매각하라고 했다. 대우조선은 부도를 내기 직전의 한보·기아와 비슷했던 것이다. 당시 노사 분규는 개발 독재 시대에 억눌렸던 불만을 분출한다는 측면이 강했다. 김회장은 이를 직시하고 89년 거제도에 상주했다.

 김회장은 누구라도 19분만 대화하면 상대를 설복한다는 열정의 소유자이다. 그는 노조와 직접대화를 시도해다. 대화는 불만을 다독거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협상으로 전환시킨다. 91년 11월 골리앗 크레인 투쟁을 끝으로 대우조선에서는 격렬한 노동 쟁의가 사라졌다.

 당시 김회장은 정부의 분석과 달리 조선업이 곧 호황을 맞을 것이라고 예견하고 근로자들을 다독이는 한편 생산성을 올리는 쪽으로 독려하기 시작했다. 그의 현장 상주는 보고 단계를 줄이는 효과가 있었다. 그는 즉석에서 현장의 불합리한 점을 고쳐 나갔다. 또한 그는 대우조선의 생산성이 일본의 조선 업계에 비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원 감축에 착수했다. 당시 3만명에 이르던 근로자는 최군 만명 선으로 줄었다. 90년 그는 김태구 그룹 기조실장을 대우조선사장에 임명해 사내 구조 조정에 박차를 가했다. 이후 지금까지 대우조선은 대우그룹 최고의 ‘효자’가 되었다. 삼성의 돈줄이 반도체라면, 대우는 조선에서 번 돈으로 세계경영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런데도 김회장은 94년 10월 대우조선을 대우중공업에 합병했다. 이러한‘규모의 경제’는 또 다른 효과를 가져왔다. 과거에는 대우조선의 담보력만으로 돈을 빌렸으나, 이제는 대중중공업 전체를 담보할 수 있다 그만큼 기채(起債) 능력이 커졌다.

 대우조선이 정상화 길을 가는 동안 대우자동차는 죽을 쑤고 있었다. 87년 르망을 내놓을 때만해도 대우자동차에는 희망이 있었다. GM이 독일 오펠사가 개발한 르망으로 일본을 꺽고 세계 소형차 시장을 재패하겠다며, 대우를 아시아와 북미 시장용 생산기지로 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해 여름 6.29 선언이 발표되면서 노사 분규의 태풍이 대우 자동차를 덮쳤다.

 이런 시기를 거치며 르망은 제품이 형편없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클러치가 뻑뻑하다는 등 소비자의 불만이 잇따르면서 판매율이 급격히 떨어졌다. 90년 3천 cc급 대형차 임페리얼을 출시했을 때는 얼마나 품질이 형편없었는지 ‘비가 샌다’는 농담이 나돌았다. 판매 사원들은 임페리얼 판촉물로 우산을 주어야 한다며 자조했다.

 91년 말 이런 상황에서 대우조선을 정상화한 김태구 사장이 대우자동차로 옮겨왔다. 김태구 사장은 대우자동차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차가 없다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합작선인 GM은 신모델 제공을 거부했다. 유럽을 맡은 오펠사는 카데트(르망의 유럽 이름)를 4백 50만대나 팔았는데 대우는 죽을 쑤었으니 신규 투자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우중·김태구 콤비는 GM과 합작한 것이 오히려 대우의 발목을 잡는다고 보고, 92년 말 결별을 결정했다.

5개 차종 동시 개발 ‘공세 경영’
 김태구 사장은 NAC(New Automative-industry Concept·새로운 자동차산업 개념)추진 계획을 세웠다. 92~94년 1차 NAC운동에서는 신 노사 문화 정착에 노력하고, 내년부터 시작되는 3차 NAC 때는 회사 조직을 혁신할 계획이다. 이려한 의식 개혁과 동시에 두 사람은 전대 미문의 다섯 가지 차종 동시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대우차 부평연구소의 능력으로는 한 차종도 제대로 개발할 수 없었다. 김회장의 ‘콜럼버스의 달걀’ 식 발상이 이때 발휘되었다. 당시 유럽은 혹독한 리엔지니어링을 겪을 때라 매각하려는 기업과 고급 실업자가 많았다. 김회장은 영국IAD사가 갖고 있던 차체(車體) 연구기관을 통째로 인수해 워딩연구소를 차렸다. 이어 독일의 전문가를 모아 엔진 연구소를 차렸다. 신차 개발은 이 세 연구소가 연결됨으로써 추진될 수 있었다.

 김.김 콤비는 여기에 ‘프로젝트 매니저’ 네도를 도입함으로써 경쟁을 유도했다. 라노스는 유기준 박사, 누비라는 김동우 이사, 레간자는 이우종 박사 식으로 차종별 연구팀장을 정했다.(그때까지는 엔진연구팀·차체연구팀 식으로 부문 별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자 팀 간에 경쟁이 벌어져 전체의 생산성이 올라가는 상승 효과가 일어났다. 동시 출시한 세 모델이 모두 성공한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경차는 티코로 먼저 나왔고 대형차는 미출시).

 대우자동차가 1차 NAC운동을 벌일 무렵 세계화·지역화라는 용어는 언론에서 크게 회자되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해 자유 무역이 확대되고, 유럽연합(EU)과 아세안(Asean)식으로 블록화가 강화된다면 과연 한국 기업이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우려가 팽배해졌다. 이렇듯 절박한 시기에, 심회장은 양적인 팽창으로 생존을 모색하겠다는 대전략을 세웠다. 대우자동차는 세계 10대 메이커가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최소 2백만대 생산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연산 18만대인 부평 공장 규모를 50만대 수준으로 늘리고, 군산에 새 공장을 착공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해외 투자, 꿩 먹고 알 먹고 털 뽑아 부채질하기
 기업 문화 연구가들은 대우에는 ‘차남(次男)문화’가 있다고 한다. 큰아들 유리가 고주몽을 찾아와 왕위에 오르자, 차남·삼남이 된 비류와 온조는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를 세운 것과 같은 전통이 대우에 있다는 것이다. ‘큰형’격인 현대 자동차 때문에 국내에서 목표 달성이 안된다면, 해외에서 꿈을 실현해 보겠다는 것이 대우의 세계 경영이다.

 김회장은 폴란드·루마니아 등 동유럽과 우즈베키스탄·인도·동남아 등 막 산업화를 시작한 나라로 눈을 돌렸다. 이런 나라들은 리스크가 크지만 반대로 인건비와 땅값이 매우 싸다는 장점이 있다. 또 다른 ‘큰형’ 삼성이 5조~6조 원을 투자해 국내에 연산 50만대 규모 자동차 공장을 짓겠다고 결정했다면 대우는 1조~2조 원을 투자해 해외에 연산 백만대 규모 공장을 짓는 ‘실용적인’ 세계경영을 발상한 것이다.

 삼성과 LG가 브레이크가 잘 듣는 그룹이라면 대우는 액셀러레이터가 잘 기능하는 집단이다. 양적인 성장이라는 목표가 정해지자 대우는 무서운 속도로 다국적 기업으로 변신해 갔다. 이로써 대우는 90년대 중반 국내 기업들이 고임금으로 신음하는 동안에도, 해외의 저임금을 발판 삼아 성장하고, 블록 경제를 뚫는 효과 마저 거머쥘 수 있었다. 최근 대우자동차는 머지 않아 국내에서 백만다. 해외에서 1백5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구축한다. 이로써 대우의 세계경영은 ‘꿍 먹고 알 먹고, 털 뽑아 부채질하고, 둥지 뜯어 불까지 때는’ 대전략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국경이 기업을 보호해 줄 때는 문어발 식으로 벌여도 되지만, 무국경 시대에는 자신 있는것만 선택해야 한다. 기업의 세계화란 가장 자신 있는 상품으로 세계 제패를 노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배순훈 대우전자 회장이 채택한 경영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91년 사자에 취임한 그는 2000년 대우전자가 세계 5대 가전품인 텔레비전·냉장고·VCR·세탁기·전자레인지 시장의 10%를 장악하겠다며 ‘비전2000’을 제시했다.

 그러나 대우전자의 능력으로는 국내 시장에서도 1위를 점하기 어렵다. 전자산엄은 크게 가전·정보통신·컴퓨터·전자부품(반도체 등) 네 분야로 나뉜다. 반도체를 필두로 한 부품 쪽은 삼성·LG·현대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 정보통신과 컴퓨터 분야 역시 대우전자에게는 승산이 적은 분야이다. 그러나 가전 쪽이라면 해볼 만하다는 것이 배회장의 판단이었다.

 91년 대우전자가 출시한 공기방울 세탁기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이후 국내 가전품 광고에는‘일본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개발했다’는 문구가 사라졌다. 세계최초로 개발된 국산품이 늘어나면서 동글이 청소기·뚝배기 전자레인지 등 한국적인 상표가 많아졌다.

 배회장은 대우의 가전품이 치열한 국내 경쟁에서도 살아 남았으니, 해외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또 삼성과 LG가 반도체에 주력해 상대적으로 가전 쪽은 틈새가 있다고 보았다. 배회장은 텔레비전 등 부피가 작은 것은 국내에서 제작해 수출하고, 쟁장고 등 큰 것은 해외 공장에서 제작해 판매한다는 세계화 전략을 세웠다.

 이때 배회장이 직접 광고에 출연해 회자시킨 말이 ‘탱크주의’였다. 텔레비전은 그림과 소리를 보고 듣는 것이니까 이 기능에 주력하고, 대신 부가기능은 줄인다는 것이 탱크주의이다. 그는 중급 가전품이 세계 시장의 70~80%를 차지한다고 보았다. 중급 제품 가격을 30%정도 낮출 수만 있다면 대우가 세계 가전품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보고 T30 운동을 전개했다.

김우중 회장, 폴란드서 ‘김기즈칸’으로 불려
 지난 4월 대우의 한 관계자는 대우그룹에 대한 특집 기사를 만들기 위해 온 폴란드 국영 텔레비전 기자를 안내한 적이 있었다. 이 기자를 데리고 거제도 대우조선에 갔을 때 “이곳이 프레지던트(대통령) 김영삼의 고향이다”라고 설명했는데, 그 기자가 ‘프레지던트(회장) 김우중’의 고향으로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이후 그 기자는 가는 곳마다 ‘프레지던트 김우중의 고향을 취재했다’는 말을 했다. 폴란드 기자에게는 김대통령보다 김우중이 더 친숙했던 것이다.

 김회장은 세계 경영을 한반도와 그 주변의 우리 교포 시장에도 적용해 한민족 경제 공동체를 만들자는 구상도하고 있다. 대우는 약점에 연연하기보다는 강점 개발에 집중함으로써 존경과 질서를 함께 받는 그룹으로 변신했다. 동유럽에 무섭게 파고드는 김우중 회장에대해, 폴란드인들은 칭기즈칸이후 최초로 동유럽을 정복한 아시아인이라며, ‘김지즈칸’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