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재기는 절약 아니 ‘과소비’
  • 박재권 기자 ()
  • 승인 1998.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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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소비는?/필요 이상 구입하면 오히려 ‘손해’…물가 상승도 초래

지난 12월16일 아침 경기도 일산에 있는 대형 할인점 E마트 앞. 개점 시간인 10시 반이 되기도 전에 가정 주부들이 매장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발을 동동 구르던 이들은 매장 문이 열리자마자 앞다투어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밀가루·설탕·제지 코너, 원료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이들 품목은 고환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 이미 가격이 들썩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 사람 당 1개로 수량을 제한했는데도 잔뜩 쌓여 있던 물량은 30분도 못되어 바닥을 드러냈다. 뒤이어 이들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무조건 손수레에 담기 시작했다. 주부들은 이런 장면을 취재하는 방소용 카메라가 돌아가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처럼 주부들 사이에 사재기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12월 초 국제통화기금의 구제 금융 조건이 발표되고 환율이 급등하면서부터였다. 12월 중순 환율이 다소 진정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음에도 물가 오름세가 계속되자 할인점 앞은 연일 장사진을 이루었고, 매출액ㅇㄴ 평소보다 30~40%나 뛰었다. 이것은 12월 초 서울 주요 백화점들이 실시한 바겐세일 실적이 전년보다 40% 가량 줄어든 것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할인점과 반대로 환율 급등의 여파를 가장 춥게 느끼는 곳은 여행업계일 것이다. 업계 1위를 자랑하던 온누리여행사가 이미 쓰러졌고, 해외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들이 속속문을 닫고 있다. 세서울여행사 이원배 사장은 “해외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는 80~90%가 위험하다. 최근에는 여행업체가 대거 국내 여행 쪽으로 몰리면서 국내 여행전문 업체들까지 위기를 맞고 있다”라고 걱정했다. 가뜩이나 어려운 판에 항공사가 유가 인상을 이유로 요금까지 올리자 여행업계가 최악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것은 다시 항공사에 영향을 미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국제선 운항을 줄이고 심지어 노선 자체를 폐쇄하는 사태까지 빚어지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대학생들의 배낭 여행이나 해외 연수도 대폭 줄었다. 연세대 학생처의 한 관계자는 “한 해에 6천명 가량이 해외에 나갔다. 그런데 올해는 방학 때 어학연수를 떠나려던 학생들이 대부분 계획을 포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연말 특수를 노리던 음식점과 술집들도 망년회를 취소하거나 규모를 줄이는 최근 분위기 때문에 타격이 적지 않다.

 가정 주부는 물론이고 온 국민이 훌봥의 깊이를 절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지나친 절약이 오히려 경제를 망칠 수도 있다고 걱정할 정도이다. 자칫 내수가 줄어 멀쩡한 기업까지 죽일 수 있다는 경고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대세를 이루지는 못한다.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지적하는 것은 사재기 열풍이다. 사재기가 결국 물가를 올린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사재기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결코 득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일산 E마트 윤명규 총무팀장은 “물건값이 오르기 전에 사두자는 심리는 이해하지만, 고객 대부분은 필요 이상으로 물건을 많이 산다. 사재기는 절약이 아니라 또 다른 과소비이다”라고 비판했다.

 제테크 전문가인 엄길청씨는 제테크의 기본이 절약이라고 말했다. 환율 급등 시대에 소비자는 진짜 절약이 어떤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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