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경 묵살에 녹슨 방패 ‘묵비권’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1.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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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이 보장한 피고인의 권리…인간존중의 정신없이는 장식 조항에 불과

 김기설씨 유서대필 협의로 구속돼 수사를 받고 있는강기훈씨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어 검찰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검찰은 수사 첫날 강씨가 일상저인 질문에만 답하고혐의사실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다물자 "강씨가 사전에 변호인들과 협의를 한 뒤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만큼 진술을 시작할때까지는 변호인 접견을 불허하겠다"고 발표하는 둥 신경질적인반웅을 보이기도 했다.

 검찰은 강씨가 구속 이틀 만에5월의 행적과 검찰이 갖고 있는자료에 대해 부분적으로 진술을시작하자 27일 변호인 접견을 허용했으나, 변호인측에서는 검찰이 헌법에 보장된 권리인 묵비권과 변호인 접견권을 제한하려 한다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유현석 변호사 등 강씨 변호인단 17명은 26일 발표한 성명에서"검찰이 피의자의 묵비권 행사가부당한 것이며 , 변호인과 묵비권행사를 협의해서도 안되고, 검찰이 피의자 접견을 시켜줄 수도 있고 안시켜줄 수도 있다는 식으로 발표한 데 대해 법조인의 일원으로서 부끄러움조차 느낀다. 묵비권과 피의자 접견권은 어느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제한할 수 없는 국민의 기본권이다"라고 주장했다.

신문 전에 오히려 묵비권 고지해야
 이들은 또 "강씨 사건은 모든 국민이 검찰의 '공정한 수사'를 특별히 주문하면서그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면서 "검찰인 불법 부당한 행태를 계속하면 '공정성'에 커다란 흠집을 남기게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변호인단의 일원인 이석태 변호사는 "검찰의 수사가 처음부터 냉정하게 이루어졌다면 변호인들은 강씨에게 묵비권 행사를 권하지 않았을 것이다. 검찰의 수사는 진실규명보다는 정치적 목적에 비중을 두고 시종일관 피의자의 인권을 유린하는 형태로 진행돼왔다. 지금이라도 검찰은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변호인단은 "그래도 강씨는 형편이 나은편이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국민의 이목이 집중돼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우리 현실에서 피의자가 묵비권을 행사하려면 당연히 치러야 할 곤욕을 어느 정도는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변호인들은 묵비권을 행사하는 피의자에 대한 인권침해 사례 중 대표적인 것으로서 85년의 김근태씨 고문사건을의 상황과 기본적으로 달라진게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근태씨의 법정진술, 아내인 인재근씨의 증언, 대한변호사협회의 (인권보고서)를 종합해보면 공권력의 횡포 앞에서 개인과 법이 얼마나 무력한지 잘 알 수 있다.

 김근태씨는 민주화청년운동연합(민청련) 간부와 학생운동권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던 85년 9월4일 치안본부 남영동대공분실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수사관들은 김씨가 묵비권을 행사할 태세를 보이자 수사 첫날부터 샤워기를 입에 들이밀고 물고문을 해댔다. 김씨가 견디다못해 "묻는 말에는 무엇이든 대답하겠습니다"라고 말했으나 수사관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항복이다 . 그래도 진술거부를 할것이냐"고 다그쳤다. 김씨는 83년 9월 민청련 의장에 취임하고 나서부터 7번에 걸쳐 경찰에 연행돼 수사를 받은 바 있는데 그때마다 묵비권을 행사해 수사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었다. 수사관들은 그때의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김씨를 수사하는 20여일동안 10여차례에 걸쳐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해댔다. 김근태씨는 검찰에 송치된 뒤 고문경찰관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가족과 변호인의 접견이 단절된 상태에서 6차례에 걸쳐 진술을 거부했다.

 김근태씨 고문사건을 비롯, 박종철씨 고문치사사건, 권인숙씨에 대한 성고문사건둥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검찰과 경찰이 시국사건을 다룰 때는 전보다 훨씬 신중해진 것이 사실이다. 강기훈씨도 변호인과의 접견 때 밤샘 수사 외에는 별다른 가혹행위를 당하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일반 형사사범의 경우 피의자들은 대부분 묵비권의 행사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인권변호사들은 한결같이 얘기하고 있다.

 변호인들은 검찰과 경찰은 신문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피의자에게 법적 권리를 고지하게 되어 있는데 지켜지는 경우가 거의없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혐의사실을 부인할 경우 가혹행위를 당하기 쉬우며 보석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지해 피의자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인정하게 만들기 일쑤라고 한다. 화성 연쇄강간살인사건의 범인을 둘러싸고벌어졌던 여러번의 촌극이 그같은사실을 잘 대변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피의자가 검찰이나 경찰이 미리 작성한진술서를 보고 그대로 베끼는 경우도 종종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매치기 상습범이나 폭력전과범들이 그런 식으로 미제 사건 수급건씩을 떠안게 되는 사례도 드물지는 않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피의자가묵비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은아니다. 수서비리와 관련, 구속된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은 검찰의 조사과정에서나 법정에서나 묵비권을 '제대로' 보장받았다.

 정회장은 검찰 수사과정에서 정치자금 공여 여부와 청와대 관련 부분에 대해 내내 묵비권을 행사했는데 검찰은 별다른 추궁을 하지 않고 서둘러 수사를 종결해 빈축을 샀다. 검찰은 정회장을 구속하기 전날 정회장을 호텔신라로 불러 모종의 '협의'를 한 것으로 알려져 묵비할 사항을 미리 알려준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까지 했다. 정회장은 공판과정에서도 칭와대 관련 부분 등 핵심 사안에 패해 계속 입을 다물었는데 , 24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법정 최저형이라고 할 수 있는 4년 징역형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그밖에 청문회에 불려4왔거나 구속됐던 5공비리 관련자들도 묵비권을 '법대로' 보장받은 몇 안되는 사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형사상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묵비권은 영미법에서 유래했다. 17세기초 영국의 교회법원은 청교도에 대해 혹독한 탄압을 했다. 신의 제재라는 미명하에 온갖 고문을 일삼았으며 그로 인해 자백을 하면 그것을 증거로 처벌하고, 위증하면 위증죄로또 처벌했다. 당연히 청교도를 중심으로 깅제신문절차 철폐운동이 일어났고 그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 "누구든지, 어뎨한 재판에 있어서도, 어떤 사건에 있어서도 자신이 처벌당할 행위를 강요당하지 않는다"는 自己負  거부의 특권이다.

 청교도의 영향으로 미국에서도 이 특권은1791년 수정헌법 제5조에 명문화되었으며 o후 각국은 앞을 다퉈 진술거부권을 국민의기본권으로서 헌법에 명시하게 되었다. 칠레는 헌법 18조에 "형사범의 경우 피고는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선서하에 증언할 의무가 없고, 부모 자손을 포함한 3촌 이내의 친족에 관해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괴 못박고 있을 정도이다.

 우리나라도 헌법 제124에 "모든 국민은 고문을 띤 ·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고규정하고 있다. 또 형사소송법에서는 "피고인은 각개의 신문에 대하여 진술을 거부할 수 있다"(제289조) "검찰 또는 사법 경찰관이 피의자의 진술을 들을 때는 미리 피의자에 대하여 진술을 거부할 수 있음을 알려야 한다" (제200조 2항)괴 됫받침하고 있기도 하다.

피의자는 범죄자 아니다
묵비권은 강제규정이라기보다는 선언적 조항에 가깝다. 따라서 그 사회에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모든 피의자는 대법원판결이 있기 전까지는 무죄이다"라는 법의 기본 정신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으면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또 개인의 인권을 국가나 다른 어떤 집단의 이익보다 우위에 놓는 인간존중의 정신을 갖추고 있지 못하면 묵비권은 헌법 귀퉁이를 수놓는 장식 조항이 될 수밖에 없다.

 김근태씨 고문사건 때 공소유지담당변호사(특별검사)를 맡았던 김창국 변호사는"묵비권을 포함, 피의자의 인권은 제도가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바뀌어야 개선될 수 있다. 피의자를 바라보는 검찰과 경찰의 눈이 이들을 범죄자가 아니라 동등한 인간으로 보는 눈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형사정책연구원이 전국의경찰관 3백2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62%가 "인권보다는 범인검거가 더 중요하다"고 답했으며, 17,8%는 "범인을 체포할 수 있다면 인권은 다소 침해돼도 좋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사회에서 피의자의 인권을 논하는 것이 아직은 너무 이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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