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가득한 '죄수의 땅' 호주 사회복지 완벽…정치 ‘깨끗’
  • 시드니 김상익 기자 ()
  • 승인 1991.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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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많아 여가생활 만끽 범죄 늘지만 살인 거의 없어

호주에 이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한국 교민이 아내와 함께 한가로이 공원을 거닐다 갑자기 솜사탕이 먹고 싶어 가게를 찾았다. 늙수그레한 판매원은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시간이 늦어 팔 수 없노라고 했다. 호주에서는 아직 해가 중천인 5시가 채 안된 시각이었다.

 주 5일 근무에 9시부터 5시까지 주 38시간 노동이 철저히 지켜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솜사탕가게까지 그러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그가 “당신은 월급쟁이인가” 하고 물었다. 솜사탕 판매원은 “이건 내 가게다. 그렇지만 나도 가족과 함께 내 인생을 즐길 권리가 있으므로 노동시간을 지켜야겠다”면서 가게문을 닫더라는 것이다. 이 일로해서 그 교민은 한국과 호주가 ‘다른세상’임을 다시 깨닫게 됐다고 술회했다.

 

80년간 죄수 16만명 이주시켜

 호주는 먼 나라다. 태평양을 건너 적도를 지나 비행기로 10시간 이상 날아가야 밟을 수 있는 남반구의 땅이다. 땅은 넓고 인구는 적다. 남한의 78배즘 되는 대륙에 1천7백만명이 살고 있다. 시차는 1시간(서머타임에는 2시간)밖에 나지 않지만 계절은 완전히 뒤바뀌어 여름은 12월에 시작되고 6월에서 8월까지가 겨울이다.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거의 없어 눈은 구경하기조차 힘들다.

 국토의 3분의 1이 쓸모없는 땅이고, 다른 3분의 1은 목초지로만 사용된다. 이처럼 토질은 비옥하지 않은 편이지만 목축업이 발달했고 자원이 풍부하다. 양털 쇠고기 설탕 철광석 석탄 등 1차산품의 수출은 국민소득 1만7천호주달러(90년 11월 현대 1호주달러는 0.785미국달러)라는 풍요로움을 밑받침하고 있다. 특히 농산물 수축액은 88~89년의 경우 약 1백60억달러(이하 호주달러)로, 전체 수출의 37%를 차지했다. 농축산물 수입개방으로 농촌경제가 거덜이 날 지경에 이른 우리와는 사정이 영 딴판이다.

 반면 제조업이 덜 발달해 대부분의 공산품은 수입에 의존한다. 제조업 발달이 늦어진 원인은 내수시장의 협소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1901년 독립하기까지 1백여년 넘게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역사적 배경도 빼놓을 수 없다. 호주는 식량과 원자재를 영국에서 공급하는 대신 영국으로부터 공산품을 도입하는 전형적인 식민지 경제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했기 때문이다.

 1770년 영국 해군 선장 제임스 쿠크 대령이 호주대륙을 발견한 뒤 1788년 1월 26일 아더 필립 대령은 11척의 배에 7백36명의 죄수를 포함, 1천5백30명을 태워 시드니에 도착했다. 아더 필립은 훗날 뉴사우드웨일즈 식민지의 초대 총독이 됐다.

 식민지 호주의 역사는 ‘죄수의 땅’으로 시작됐다. 그로부터 1868년까지 약 16만명의 죄수가 “호주로 이송하라”는 선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낳은 ‘고른 분배’

 1851년 호주 동남부 빅토리아와 뉴사우드웨일즈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호주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세계 곳곳에서 50만명의 이민이 몰려들어 금광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골드러시’ 당시 중국인 숫자는 전체 이민의 10%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증명하듯 지금은 역사마을로 단장된 발라라트의 한 금광에 당시 사망한 중국인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세워져 있다.

 ‘골드러시’ 초기에 금은 ‘찾는 사람이 임자’였다. 그러나 자본가의 등장과 정부의 개입으로 이민의 대부부은 광산노동자로 전락했다. 당시 빅토리아 지방은 스코틀랜드 계통의 투자가들과 영국의 진보적 노동운동 세력인 차티스트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처럼 뿌리깊은 호주의 노동운동은 현재 봅 호크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의 연속 4기 집권으로 열매맺고 있다.

 이민 초기부터 호주 사회의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은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었다. 그리고 그 정신은 ‘고른 분배’라는 물질적 형태로 현실 속에 녹아있다.

 호주에서 완전고용된 성인 노동자의 주당 평균소득은 5백달러를 웃돈다. 청소원의 연봉도 2만5천~3만달러 수준이다. 고액 봉급자에 속하는 대학교수의 연봉은 대략 5만5천~7만5천달러이다.

 최고 70%까지 떼는 세금은 상당 부분이 사회복지비로 돌려진다. 89~90년 예산의 경우 총지출의 30%가 사회보장에, 14%가 보건에, 10%가 국방에, 8%가 교육에 배정되었다.

 호주의 완벽한 사회복지는 젊은이들이 일은 안하고 실업수당을 받아 놀고 먹는다는 ‘부작용’도 일으키지만 “가난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식으로 책임을 피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국민을 굶기지 않는, 그 사회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몇 년 전 어느 한국인이 호주로 이민온 지 9개월만에 아내와 어린 딸 넷을 남긴 채 암으로 사망했다. 남편의 직장만 믿고 한국을 떠난 터라 가진 돈도 한푼 없었다. 그 부인이 허드렛일을 하며 네 딸을 대학공부까지 시키고 호주에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미망인수당과 자녀수당 덕분이었다.

 이같이 안정된 사회환경 속에서 호주 사람들은 여유있는 삶을 살고 있다. 토요일과 일요일의 주말 연휴, 연중 약 10일의 법정 공휴일, 모든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4주 동안의 유급 연차휴가 때 그들은 생활을 충분히 즐긴다. 가족과 공원에서 바비큐를 해먹거나 바닷가에 나가 물놀이를 즐기는 것은 호주사람들에게 일상화되어 있다. 그것은 한국에서처럼 큰 마음 먹고 며칠간 별러야 하는 부담스런 나들이가 아니다. 가령 멜버른 같은 도시는 전체 면적의 5분의1이 공원으로 꾸며져 있으며, 공원에는 바비큐용 불판이 설치돼 있어 20센트만 넣으면 싸들고 간 고기를 얼마든지 구워먹을 수 있다.

 

“시의회 분수대는 정치인의 목욕탕”

 또 호주의 도시는 대체로 해안선을 따라 형성돼 있기 때문에 내륙지방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자동차로 1~2시간 안에 파도와 만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남편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던 주부에게 호주에서의 생활은 특히 만족스럽다.

 현재 호주에서는 자동차 절도?빈집털이 등 범죄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그렇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은 아주 드물다. 시드니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는 김태정군은 어쩌다 살인사건이 나면 온 나라가 떠들썩할 정도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사회면 구석에 처박힐 법한 사건이 각 신문의 1면 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물론이고 텔레비전에서도 시간 시간 몽타주와 함께 토막소식을 내보낸다는 것이다.

 호주 사람들의 비폭력성은 가정교육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 유학생이 영어도 익힐 겸 하숙을 했는데 그 집 꼬마가 식탁에서 자기한테 우유를 끼얹는 등 못된 짓을 한 일이 있었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다가 그래도 말을 안 듣자 큰 벌을 내렸다. “네 방에 들어가 있어.”

 나중에 그 학생은 “매를 들면 나쁜 버릇을 훨씬 빨리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점잖게 충고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정색을 하며 “내가 저 아이를 말로 설득하지 못하고 매를 든다면 저 아이가 자라면서 대화보다는 주먹을 앞세우게 될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는 폭력사회가 될 것이다”라고 말해 낯이 뜨거웠다는 것이다.

 호주 사회의 도덕성은, 역설적이지만 시드니의 환락가에서 확인된다. 호주 최대의 환락가라고 불리는 킹스크로스는 2백m도 채 안된다. 자본주의에 바탕한 경제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성의 상품화는 아직 ‘유치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어떤 호주 사람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호주 사회의 강점은 다른 무엇보다도 ‘정치의 깨끗함’에서 찾을 수 있다. 호주 동북부 퀸슬랜드 주에서 얼마전 재무장관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공금 7천달러의 용도를 밝히지 못해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방자치가 탄탄한 이 나라의 정치인과 성숙한 시민의 자랑스런 초상화였다.

 멜버른의 시의회 건물 옆 잔디밭에는 분수가 있다. 한 관광버스 운전기사가 그 모퉁이에서 차를 돌리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정치인들이 저기서 목욕을 하라고 만들어 놓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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