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간행물 ‘총체적 혼란’
  • 성우제 기자 ()
  • 승인 2006.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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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황파악 엉터리, 배포 안되고 사라지기 일쑤…“차라리 판매 허용하라”



소장 민속학자 ㅈ씨는 헌 책방 뒤지기와 책 복사에 이력이 났다. 공식학회의 연구실장이자 대학 강사인 그가 찾는 자료는 희귀한 고서나 외국 서적이 아니다.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의 자료실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정부 간행물을 구하러 다니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려 복사하는 일도 이제는 거의 불가능하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복사업자가 한글로 된 책은 제본은커녕 낱장 복사마저 꺼리기 때문이다. “자기 전공 책이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게 연구자의 기본 태도이다. 정부 간행물을 서점에서 사려고 해도 비매품이어서 불가능하다. 이제는 발간한 곳에 가서 구걸하는 수밖에 없다??라며 ㅈ씨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92년에 발간된 문화재연구소의 《한국민족종합조사보고서》(어업용구편)를 아직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90년 들어 어업과 관련한 유일한 민속 논문인 <서해안 조기잡이와 어업생산풍습>(《역사민속학》창간호, 1991)을 발표한 그로서는 이 보고서를 반드시 손에 넣어야 다음 논문을 준비하는 데 불편이 없다.

조사비와 발간비를 합쳐 연간 2천여만원과 5년이라는 연구 기간을 투자해 지난해 1천부한정판으로 발간한 《한국민족종합조사보고서》제23책이 정작 그것을 필요로 하는 연구자가 구해볼 수 없는 곳에 있다면 어디로 가 있는가. 이 보고서를 발간한 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의 李柱暎 실장은 “예산이 부족해 개인에게 돌아갈 만큼 넉넉하게 인쇄하지 못했다??라고 밝혔다. 정부 간행물은 1백여곳에 이르는 정부 각 부처 산하기관이나 시?도 발행기관이 배포선을 정한 뒤 그 기관 책임 아래 책을 발간하고 있다. 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이 밝히는 배포선은 전국 국공립 도서관, 박물관, 4년제 대학도서관, 연구기관, 그리고 관련 학자들이다. 관련 학자란 1백49명에 이르는 문화재위원과 문화재전문위원이다.

이실장은 “책자를 개인이 얻어 소유하려는 게 문제이다. 배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은 주로 대학원생인데, 각 도서관에 책자가 다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곳을 이용하면 된다??고 말했다. 예산이 부족해 국공립?대학 도서관과 교수급 관련 학자 등 최소한의 수요만 충족시키고 있으니 나머지 사람은 도서관을 이용하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도서관에는 책이 없다. 교수급 관련 학자도 책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69년부터 발간하기 시작해 문화재연구소가 ‘간판??으로 내세우는 《한국민족종합조사보고서》는 92년까지 23책이 나왔지만 이 책자를 ??확실하게 모두 ??보유하고 있는 곳은 문화재연구소 자료실뿐이다. 한국 최대의 도서관인 국립중앙도서관에는 1, 4~7, 9, 12, 22, 23 책이 빠져 있고, 국회도서관에는 9책이, 사립대학인 고려대 도서관에는 3, 16, 17, 20, 22, 23 책이 빠져 있다. 서울의 대표적 도선관에 빠진 책이 이렇게 많으니 지방의 실정은 불을 보듯 뻔하다. 민족학 교수와 관련 연구기관에도 책은 가지 않았다. 한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소장 이필영 교수는 ??개인적으로도 받은 적이 없고 연구소로도 오지 않아 책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소장인 이해준 교수는 ??문화재관리국은 선이 연결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책을 줄뿐 정작 필요로 하는 곳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연구소와 현직 교수들의 사정이 이렇다면 대학원생이 어려움이란 말할 것도 없다.

공공기관 납본규정 있으나 마나

이와 같은 사정은 비단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문화재관리국과 소속 연구기관인 문화재연구소가 지난 90년과 91년에 발간한 책자는 모두 39종이다. 그러나 국립중앙도서관에는 16종, 국회도서관에는 22종이 가 있고 고려대 도서관에는 단 2종이 있을 뿐이다. 지난 91년 대통령령인 사무관리규정에 의해 모둔 정부 간행물을 납본하도록 되어 있는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의 정부행정자료실과 공보처 정부간행물제작소 자료실에도 각각 2종과 20종이 들어가 있을 뿐이다. 논문에 문화재관리국 보고서를 인용해야 할 때 연구자들은 문화재연구소 자료실로 가야 모든 자료를 안심하고 볼 수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나마 자료실은 대출이 안되고 복사마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손으로 베끼거나, 분량이 많으면 책을 ‘편법으로??빌려 복사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복제 불허??라는 문구를 박아놓은 국가 소유의 책 저작권을 정부 기관이 국민으로 하여금 침해하도록 하는 꼴이 된 것이다.

연구자들은 비매품인 정부 간행물 중의 일부를 판매하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공보처 정부간행물조정심의위원회(이하 정간위)를 통해 교보문고 등 전국 20개 정부간행물판매센터에서 책이 판매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종류와 부수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교보문고 정기 간행물 코너 담당자에 따르면 교보문고에 나와 있는 정부간행물은 5백여종밖에 안된다. 국립중앙도서관이 해마다 발행하는 《대한민국출판물총목록》은 도서관에 납본된 책을 기준으로 한 해에 출판되는 정부 간행물을 2천종으로 집계하고 있다. 일반인이 서점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자는 전체 간행물의 30%에도 미치지 못한다. 정간위의 한 관계자는 “책을 판매할지 여부는 수요를 파악하고 있는 발행 기관의 의견을 존중한다. 국민에게 사서 보라고 할 때 과연 그렇게 하겠느냐??라며 책을 판매하지 않는 이유를 각 기관과 연구자들에게 돌렸다.

정부 간행물 문제는 그것이 공급 과정에서 일반인에게 차단된다는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정부간행물이 연간 몇종 발행되는지조차 파악되지 않는 것이다. 정부 간행물의 종류와 부수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정간위뿐이다. 정부 기관이 배포를 목적으로 간행물을 발행하고자 할 때는 사전에 정간위의 심의를 반드시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간위는 심의를 통해 책 내용의 중복 여부와 부수, 배포선, 그리고 판매 여부를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

배포·홍보 미비로 ‘지적 재산??낭비

그러나 현재 정간위는 배포선은 물론 정부 간행물의 종수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매년 발행하는 정부 간행물이 몇종에 이르는지, 그것이 정확하게 어디로 가는지 대한민국에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정간위는 심의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 책이 시의한 대로 나왔는지, 제대로 배포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정간위의 한 담당자는 “심의를 받은 책의 1백%가 공보처 홍보실에서 발행하는 《정부간행물 목록》에 수록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해 발간한 《91 정부 간행물 목록》에는 많은 책자가 빠져 있을뿐더러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한 책의 종수와 크게 어긋난다. 두 정부 기관에서 발행하는 목록집의 종수를 비교해 봐도 최소한 2백여부가 차이가 난다(92쪽 도표 참조).

정부 간행물이 어느 기관에서 어떻게 나왔으며, 그 책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일반 국민은 물론 해당 연구자도 까맣게 모르는 이 현실은, 돈 문제는 둘째로 치더라도 국가의 막대한 지적 재산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민간이 할 수 없는 일을 국가가 막대한 예산·인력·시간을 투자해 이룬 연구 성과가 배포와 홍보, 그리고 목록 작성 미비로 많은 부분이 사정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부분적으로 타개해 나가는 기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환경처는 《한국환경연감》같은 책자를 출판사·서점과 협약을 맺어 싼 가격에 판매하고 있으며, 국립민속박물관도 배포 대상에서 제외된 연구자를 위해 인세를 받고 외부 업자로 하여금 책자를 판매하도록 하고 있다. 이런 모범적인 사례가 있으므로 정부간행물 배포 문제는 결국 발행기관의 자세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수요가 없어 판매를 하지 않고 있다??는 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의 주장은 현실을 무시한 관료적 발상이라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책자를 몇백부 더 찍는 데 종이값과 제본비밖에 들지 않는다. 수천에서 수억원의 국민 세금을 들여 연구하는 보고서와 시지?도지들을 서점에서 사볼 수 있도록 해주면 더 바랄 게 없다.?? 공직자 부조리 척결을  내세우고 있는 새 문민 정부에 대한 한 연구자가 갖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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