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天安門냉전’ 화해분위기
  • 이석열 주미특파원 ()
  • 승인 1989.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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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키신저 訪中계기로 말문 트여…시위가담자 체포중지 등 美측 입장 전달

미국과 중국의 관계정상화는 핑퐁외교로 문이 열렸지만, 지난 6월 天安門사건으로 갑자기 냉각되더니 최근 들어 차츰 대화의 길이 트이면서 조금씩 개선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충격적으로 잔인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멍청한 짓”(닉슨)으로 ‘애국적 민주화운동’을 ‘반혁명 음모’로 몰아 무력으로 깔아뭉갠 사건인만치, 이의 책임자가 권좌에 있는 한, 美·中 관계는 전처럼 다시 좋아질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분위기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초중량급 해결사’들이 잇따라 北京을 방문해 거중조정에 나섬으로써 서로 말문이 트이기 사작했다.

 

“天安門사건 견해差 당연하다”

 비록 비공식적이긴 하나 리처드 닉슨 前대통령에 이은 헨리 키신저 前국무장관의 北京방문은 ‘타이밍’이 맞았다. 중국 공산당 제13기 5차 중앙위원회가 열린 때인 데다가 최고실력자 鄧小平의 후계자로 江澤民 당총서기가 지명돼, 말하자면 天安門사건 이후 흐트러졌던 지도부를 정리하고 새로운 위계질서를 확립한 중요한 시기에 절묘하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두 ‘해결사’는 모두 72년 美·中국교수립의 공로자로 중국측이 말하는 ‘老朋友(라오펑유)’로서, 거간 노릇을 하기에는 가장 적절한 인물들이었다.

 국빈에 준하는 예우를 받고 중국을 방문했던 닉슨은 출발 전 백악관으로 부시 대통령을 찾아가 의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귀국 후 다시 부시 대통령을 만나 장시간 귀국보고를 했는데 그 내용에 대해서는 백악관이나 닉슨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다.

 다만 부시 대통령이 닉슨과 만난 바로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닉슨 前대통령의 중국방문이 “매우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고 중국지도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 사실을 보면 부시는 닉슨을 통해 할 이야기를 다 한 셈이고 또 鄧小平도 할 말을 모두 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부시 대통령은 “結者解之라는 말로 중국측에서는 미국이 먼저 화해의 손길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매듭을 지은 쪽이 우리가 아닌 바로 중국”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러나 “중국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天安門사건은 아직도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이젠 미국과 중국이 냉정하게 사태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전진적인 태도를 보였다.

 닉슨이 미국의 입장을 어느 정도 단호하게 전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李鵬 총리가 주최한 만찬석상에서의 그의 연설이 중국지도부를 불쾌하게 만들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鄧小平은 “얼마 전 北京에서 일어난 반혁명분자들의 내란음모 난동에 미국이 너무도 깊숙이 개입했었다”라고 말했는데 닉슨은 이를 정면으로 맞받은 것. “귀하는 레닌사상을 신봉하는 중국공산주의자이지만 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믿는 미국의 한 보수주의자이다. 우리 사이에는 문화적·정치적 그리고 사상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한 만큼 天安門사건과 같은 비극을 이해하는 데에도 엄청난 거리를 갖게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고 단호하게 대꾸함으로써 당시 연회석 분위기가 싸늘해졌다는 後聞이다.

 닉슨은 중국방문에서 사진촬영을 거부해 중국지도부를 당황케 했다. 이는 악수하는 등의 화기애애한 사진을 가지고 중국정부가 미국의 지원(天安門사건에 대한)이 확고한 것처럼 이용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였다. 일단 이러한 ‘무례한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던 중국 지도부가 막상 약속을 어기게 되자 닉슨은 “이 사람들 꼭 불한당과 같군. 상종 못할 친구들이야”하고 버럭 화를 냈다고 한다.

 

中國측 입장 예전과 달라진 것 없어

 키신저의 경우는 당초 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의 초청을 받았으나 갑자기 외교부의 공식초청으로 격상되어 역시 국빈대접을 받았다. 그가 비밀외교로 두나라 국교수립에 끼친 공로 때문이라는 점도 있으나 미국정부나 의회를 상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의 정책연구소(키신저 앤드 어소시에이트, 여기에는 이글버거 국무차관도 들어 있음)의 대표라는 점도 고려된 것 같다.

 비교적 친중국인사로 알려진 키신저는 天安門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중국지도부 입장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해 美의회로부터 불만을 사기도 했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미국의 입장을 전달했기보다는 중국정부의 뜻을 미국에 알려주는 사절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보인다.

 중국의 폐쇄성은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동유럽의 정세조차도 거의 보도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형편이었으며, 더욱이 이번 지도부개편이 보여주는 보수회귀에다가 당의 경제정책으로 채택된 ‘경제여건정리’에서 드러나는 통제강화 등으로 미루어 중국측의 메시지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을 것이다.

 4천년 동안 외부와 접촉없이 살아온 중국은 필요하다면 앞으로도 혼자서 살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듯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天安門사건 이후 서먹해진 관계에 대한 모든 책임이 미국쪽에 있다고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인데 이런 상대를 향해 말문을 열어야 하는 것이 미국의 고민일지도 모른다.

 天安門사건 이후 미국은 분노의 표시로 중국정부와 공식관계를 동결시켰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對중국 군사물자판매 금지조치였다. 이와 함께 고위군사접촉도 취소, 한참 진행중이던 5억달러 상당의 F-8 전투기 판매협상도 중단시켰다가 최근에서야 다시 재개했다.

 국제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불편에서 겪는 고통은 이밖에도 많다. 미국이 두번째로 큰 수출시장인데다 항공협정과 해운협정 등을 개정하여 교역을 늘리는 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이던 중이었다. 또 전략물자수출억제(COCOM)에서 풀려나 미국의 기술도입에 잔뜩 가슴이 부풀어 올랐던 기대도 무너지고 GATT회원국으로 가입될 마당에 미국과의 민간교류조차도 거의 단절되고 있다는 것이다.

 

美·中관계 정상화 ‘언제’냐가 문제

 해마다 30만명의 미국관광객이 중국을 방문하여 뿌리는 돈이 갑자기 씨가 마르고 4만명씩 미국유학을 떠나던 중국학생들의 발걸음도 그쳤다. 작년에 합의각서에 서명한 美평화봉사단의 중국파견(공산국가에서는 처음있는 일)도 실현을 보지 못한 상태다.

 美의회는 아직도 부시 행정부에 대해 강경대응책을 펼 것을 촉구하고 있고 필요하다면 중국제재안을 의회에 내놓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물론 미국 조야에서는 중국의 비위를 상하게 하여 北京당국이 親蘇정책으로 나가 결국 미국이익에 역행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나타내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최근의 국제환경은 어떤 나라도 외국과 담을 쌓고는 살아나갈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자본이나 기술 또는 경영적인 측면에서 전혀 도움을 못받을 소련보다는 미국이나 유럽 그리고 일본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의 도움없이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중국사람들에게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인 것 같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중국에 호의를 갖고 있는 부시 대통령은 天安門사태 직후 빗발치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빈축을 사면서도 자제하는 듯한 미온 발언만 해왔으니만큼 기회만 있으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 참모들은 이같은 부시의 마음을 알아차려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그러면서도 중국정부의 체면을 상하지 않게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데 힘을 써온 것으로 알려졌다.

 닉슨의 訪中도 이런 움직임의 하나로, 비록 부시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간 것은 아니나 그의 입지를 유리하게 만들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중국지도부에 전하는 기회로 삼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외교전문가들은 닉슨이 갖고 갔던 메시지 내용을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北京과 티베트에 선포된 계엄을 해제할 것. 평화적인 시위를 한 가담자와 동조자들에 대한 체포·구금을 중지할 것. 외국에 대한 적대 선전 비방을 중지할 것. ‘미국의 소리’방송지국 폐쇄를 철회하고 외국언론활동 자유를 보장할 것. 유학생 교류를 재개할 것. 정치·경제개혁을 다시 하여 시장경제쪽으로 유도할 것. 한반도의 안정, 캄보디아 문제해결 및 대만 문제에 대해 취해온 과거의 협조적인 태도를 재확인할 것. 天安門사태는 중국의 국제적 위신을 추락시키고 신뢰를 잃게 한 사건임을 시인할 것. 홍콩의 장래문제에 대한 확고한 법적절차를 마련하는 협상을 재개할 것 등으로 요약된다.

 관측통들은 물러나는 鄧小平의 후임으로 군부의 지지가 없는 江澤民 당총서기가 막강한 군사위원회주석이 된 것은 楊尙昆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임에 틀림없지만, 鄧小平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대로 위계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으나 그의 死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매우 불안한 상태로, 하나의 과도적인 체제일 것이라 보고 있다.

 과도적인 형태가 몇년 갈지 모르지만 그 뒤 들어설 이성적인 정부 지도자가 天安門사태 이전과 같은 개방정책을 들고 나올 수 있도록 되기까지는 많은 곡절이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따라서 지금의 중국정부가 미국이 바라는 화해의 전제조건을 받아들여 실천에 옮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당분간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美·中관계 정상화 문제는 ‘어떻게’보다는 ‘언제’의 문제인 것이다.

 지난17년 동안 美행정부가 다섯번이나 갈리면서도 비교적 순탄하게 유지되어 온 美·中관계는 天安門사태 이후 미국의 일방적인 자제에도 불구하고 중국측 고집으로 사상 최악의 상태로까지 이르렀다.

 美·中관계는 ‘동맹관계’ 아닌 ‘우호관계’였다. 두나라 사이에 반목과 의견의 차이는 항상 있어 왔으며 비록 밀월관계라 했을 때에라도 그 최상의 경우가 ‘조화’ 아닌 ‘협조’ 정도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으니, 중국붐에 취해 있던 미국사람들은 중국의 두 얼굴을 대하면서 크게 실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숭이에게 겁을 주기 위해 병아리 목을 비틀었다”는 인민해방군이 언제 또 원숭이의 목을 조를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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