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살부터 여든까지 영어 '서바이벌 게임'
  • 정락인 편집위원 ()
  • 승인 2007.04.1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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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육은 부실하고 사교육은 갈팡질팡하는 영어 교육의 '리콜'은 가능할 것일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을 계기로 영어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영어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했다. 노대통령은 4월6일 교육방송(EBS) 영어교육 채널 개국 행사에서 “세계와 호흡하려면 영어도 잘하는 나라가 되자”라고 말했다. FTA 협상 타결 뒤에 나온 말이어서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졌다. 세계화 시대에서는 영어를 못하면 국제 미아나 다름없다. 선진국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길은 영어 등 외국어를 잘하는 것이다. 영어는 개인 경쟁력일 뿐만 아니라 국가경쟁력이 되었다. 영어는 기본, 제2 외국어는 필수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영어는 ‘뿌리는 약하고 가지만 무성하다’는 말로 대변되었다. 그만큼 기초가 튼튼하지 않다는 뜻이다. 공교육의 영어 교육은 ‘벙어리 교육’으로 치부되었다. 현지인을 만나면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는 교육 현실을 풍자한 것이다.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다 보니 교육 효과가 높지 않았다. 입시용 영어 교육에 치우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지자체들 앞다투어 영어체험마을 조성


교육계 일각에서는 영어 교육 전반에 대한‘대수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참에 거품을 빼고 체제부터 정비하자는 것이다. ‘영어 잘하는 나라’가 되기 위해 기초를 튼튼하게 다지자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선 공교육의 영어 수업이 1차 수술 대상이다. 현행 입시 위주의 영어 수업으로는 국제화 시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다. 입시용에서 회화용으로 수업 방식을 전환할 것을 주문한다. 그래야만 ‘벙어리 교육’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정부도 내년부터 공교육을 대폭 손질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방법은 크게 세 가지이다. 영어 인프라를 확충하고, 원어민 교사를 늘리며, 교사들의 자질 향상을 꾀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2009년까지 전국 1천3백 개 초등학교에 영어마을과 같은 영어체험센터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2010년까지 모든 중학교에 원어민 교사를 배치하고, 2015년까지 영어 교사 누구나 영어로 수업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어민 교사 채용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숫자를 늘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자격과 자질이 검증된 사람들을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몇몇 학교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무자격자가 유입되어 문제를 일으켰다. 외국의 범죄자가 한국에 들어와 영어 교사를 하다가 문제가 된 일도 있다. 의사 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효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능한 원어민 교사를 가리는 것이 숫자를 늘리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영어체험마을 조성에는 지방자치단체들도 적극적이다. 경기도 안산에 1호가 들어선 후 12곳으로 늘어났다. 영어마을은 학생과 부모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 3월1일 개원 1주년을 맞은 파주 영어마을에는 지난 한 해 동안 62만여 명이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공교육 영어 수업의 문제점은 오래 전부터 논란 대상이 되어왔다. 지난해에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일어났다. 4개월간 어학 연수를 받은 대구 시내 중·고교 교사 50여 명의 영어회화능력시험 평균 점수가 5백76.7점으로 같은 시험에 응시한 전국 중학생의 평균 점수보다 10점 정도 낮게 나온 것이다. 대기업 신입사원(7백78점)이나 공기업 합격자 평균 점수(8백41점)보다 훨씬 처진다. 점수 따기에 치우친 불균형 영어 교육의 현주소이다.
국회 교육위원회 이주호 의원(한나라당)은 성적이 나쁜 영어 교사에게 5년 동안 세 차례의 연수 기회를 준 뒤 영어 실력이 향상되지 않으면 영어 강의 자격을 박탈하는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실력 없는 교사는 강단에 설 수 없게 만들겠다는 뜻이다. 경기 성남 지역의 한 고등학교 영어 교사는 “현직 교사들도 영어 수업을 문법 위주로 받았다. 영어를 배워도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영어에 한계가 있다. 교사들의 자질 문제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교사들에게 정기적인 해외 연수 같은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영어 신동들, 가정 교육이 밑바탕


 
영어는 조기 교육에 성패가 달려 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어린 시절 영어 교육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정부도 조기 교육을 확대하기 위해 다각적인 정책안을 내놓았다. 1997년부터 영어를 초등학교 3학년 정규 교과로 도입한 것도 조기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단계적으로 초등학교 1학년까지 낮출 방침이다. 문제는 ‘조기 교육’의 취지가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기 교육의 광풍이 불면서 말을 막 시작한 영·유아들까지 영어 교육에 내몰렸다. 외국어를 배울 수 있는 연령대 문제는 고려되지 않았다. 서울 대치동 영어 보습학원의 한 원어민 강사는 “조기 영어 교육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릴 적에 체계적으로 영어를 배우면 발음이나 학습 능력에서도 우수하다. 그렇다고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웠다고 해서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아이의 발육이나 인지 능력을 고려해야 한다. 학부모의 막무가내식 조기 교육은 오히려 아이를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3월 서울 강남 지역에서는 만 3세 이상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영어 유치원이 문을 열었다. 이 유치원의 한 달 수강료는 1백50만원이나 된다. 1년이면 1천8백만원으로 중소기업 대졸 신입사원의 연봉과 맞먹는 금액이다. 영어에만 들어가는 사교육비가 10조원을 넘어 올해 국가 전체 교육 예산 31조원의 3분의 1에 해당한다는 계산도 나왔다. 조기 유학생의 숫자는 해마다 급증하고 기러기 아빠는 일상적인 현상이 되었다. 무분별한 조기 교육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비용 부담을 초래했다. 지난해 어학 연수와 유학 비용으로 해외에 지출된 돈이 4조4천억원에 이른다. 노대통령도 영어 교육을 위한 유학에는 신중해줄 것을 당부했다. 지난해 3월28일 대한상의 초청 강연에서“유학 가는 걸 막으면 안 되지만 영어를 배우러 가는 건 국내에서 충족시켜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교육계에서는 조기 교육을 무조건 반대하지 말고 현실적 대안을 찾자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열풍’‘광풍’을 나쁜 방향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대신‘제대로 배우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선 우리말을 확실하게 읽힌 후에 외국어를 배워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국어 잘하는 사람이 외국어도 잘한다’는 주장이다.
영어 조기 교육을 반대하는 시민 단체나 학부모 단체들은 우리말을 익혀야 할 시기에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자칫 국어와 외국어 둘 다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일선 학교의 영어 교사나 유명 영어 강사들도 ‘우리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말에 대한 기초가 잘 되어 있는 아이들이 영어도 잘한다는 데 동의한다. 서울 노량진 학원가에서 영어 강사로 활동 중인 최 아무개씨(남·35)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우리말에 대한 기초가 튼튼하다는 것이다. 우리말 어휘 실력과 독해 능력이 없으면 영문의 해석과 이해도 어렵다. 영어권 국가의 문화나 역사 등의 배경 지식을 쌓는 것도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부모들의 ‘대리 만족형’조기 교육도 문제이다. 영어 조기 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학원에만 보내면 영어를 잘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심리가 부풀려지고 있다. ‘영어 실력=성공’이라는 등식이 항상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녀들을 학원으로 내몬다. 일부 가정에서는 학원비를 벌기 위해 일터로 나가는 ‘중년 주부 취업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 영어가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영어는 성공의 필수 관문처럼 되어 있다. 영어 실력이 대학 진학, 취업, 승진을 좌우한다. 인생 행로를 가름하는 취직 시험 때는 영어 성적이 우선 평가 대상이다. 때문에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몸부림을 친다. 생존 법칙 속에서 자녀들을 살리기 위한 처절함이 엿보인다. 부모들은 투자를 한 만큼 효과가 있다고 확신한다. 효과는 열성에서 극성으로 돌변한다. 김충환 한나라당 의원은 한 경제지에 기고한 글에서 ‘현재와 같이 공교육이 영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별도의 사교육을 통해 영어를 배워야만 하는 현상이 계속되고, 사회가 영어 사용 환경을 조성하지 못할 경우 사교육과 유학 등 교육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무역과 관광은 물론 모든 산업 분야와 학문 연구 등 각 분야에서 치열한 국제 경쟁을 이겨내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4학년생 두 자녀에게 영어 과외를 시키고 있는 정효선씨(37·여)는 아이들에게 투자한 만큼 실력이 늘어난다고 믿고 있다.“가난한 집 아이가 공부 잘한다는 것은 옛말이다. 지금은 재력이 고득점의 밑천이다. 선행 학습이나 조기 유학, 해외 연수를 시키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밥은 굶어도 영어 과외는 시키겠다”라고도 했다.
이른바‘영어 신동’이라는 아이들을 보면 가정 교육이 충실했다. 특별히 학원 교육을 시키지도 않았다. 부모의 ‘돈’이 아니라 ‘관심’이 영어 신동을 키워낸 것이다.


억지 과외로 ‘스트레스성 우울증’ 부작용도


 
<우리 아이 영어, 아홉 살에 끝냈어요>의 저자 곽유경씨는 자신이 쓴 책에서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영어 환경을 만들어주는 방법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비싼 영어 학원을 보내는 것보다 부모가 영어를 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곽씨도 영어와는 무관하게 살아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영어와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런데도 곽씨의 딸은 <해리 포터> 원서를 줄줄 읽고 영어 드라마와 토크쇼를 보며 깔깔대는 수준의 영어 실력을 지니게 되었다. 곽씨는 “엄마는 아이에게 학습지니, 학원이니, 영어 선생을 이어주는 단순한 매니저가 아니다. 아이와 영어를 사이좋게 맺어주는 중매쟁이가 되어야 한다. 아이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재미를 느끼게 해줘야 한다. 엄마가 영어에 부담을 느끼거나 겁을 집어먹으면 아이는 그 분위기를 어느새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라고 경험담을 적었다. 그는 아이들의 영어 조기 학습을 연령에 따라 5단계로 나눴다. 준비기(0~4세)→첫 대면기(5~6세)→입문기(6~7세)→발전기(7~8세)→자립기(8~9세)이다.
영어 전문가들은 우리말을 막힘없이 할 수 있는 6~7세 연령대가 외국어 공부를 시작할 적기라고 말한다. 이해력·감수성·논리력이 부쩍 느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낯선 외국어에도 쉽게 적응할 수 있다고 한다.
서울 여의도에 살고 있는 회사원 이한성씨(32)는 요즘 고민이 하나 생겼다. 아이의 적성이나 취향을 고려하지 않고 억지로 영어 교육을 시키면서 부작용이 발생했다고 한다. 유치원에 다니던 다섯 살짜리 딸을 영어 학원으로 옮긴 게 화근이었다. 어느 날부터 아이가 학원 가기를 싫어하면서 우울증이 생겼다고 한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니 ‘스트레스성 우울증’진단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지금 영어에 관해 아노미 상태이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수준에서 세계화의 중심에 섰다. 영어 공교육은 흔들리고 사교육은 갈팡질팡 춤을 추고 있다. 노대통령이 말한  ‘영어 잘하는 나라’는 영어를 잘할 수 있는 여건에서만 가능하다. 국민이 영어를 잘할 수 있도록 국가가 길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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