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사와 의혹 사이에 선 ‘미술의 보고’
  • 이재언(미술 평론가) ()
  • 승인 2007.12.03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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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눈물> 파문으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삼성 미술관 리움이 한국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어떠하며 그 속에는 어떤 작품들이 들어 있을까.

 
삼성 미술관 리움(Leeum)이 문을 연 지난 2004년 10월, 이건희 회장의 한남동 자택 옆에 세워진 이 미술관의 위용을 목격한 사람들은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다. 초일류 기업을 지향하는 삼성이 가장 공들여 만든 것이 미술관이기에 미술계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조차 그 탁월한 문화적 마인드와 안목에 대해 경탄하다 못해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외국의 문화계 인사들이 방문했을 때 리움을 함께 가는 경우가 있다. 미술관의 외관부터 내부의 시스템과 컬렉션 내용 등에까지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첨단 IT산업과 문화의 조합이라는 이질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시너지의 조합을 우리는 생생하게 목격했던 것이다.
이렇게 아직도 리움 개관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거기에 비자금이라는 의혹의 그림자가 오버랩되는 정황에 많은 사람들이 착잡해 하고 있다. 무려 6백억원의 비자금이 작품 구입에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의혹만으로도 미술계에서는 비난과 질타, 안타까움과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수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나겠지만 미술계 처지에서는 다소 난감한 상황임에 분명하다. 신정아씨 사건으로 말미암아 성곡미술관이 직격탄을 맞았는데, 리움미술관도 어떤 식으로든 타격을 받을 것이 뻔하며, 그것은 곧 미술계에 적지 않은 후유증을 남길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과 미술의 특별한 인연

삼성과 미술의 인연은 고미술에 상당한 안목을 지녔던 고 이병철 회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2년 용인에 개관한 호암미술관은 그가 생전에 수집한 국보 내지는 국보 수준의 고미술품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소장·관리하는 박물관이다. 아직 소장품 내역이 상세히 밝혀진 적은 없지만, 그동안 드러난 것만으로도 국립중앙박물관에 필적할 만하다고 알려져 있다. 1987년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후 실질적인 관리인은 자연스럽게 며느리인 홍라희씨로  승계되었다.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한 미술인이라는 점도 이런 승계에 한몫을 했을 것으로 본다. 홍씨는 1995년 정식으로 관장에 취임해 한국 미술계에 비중 있는 인사로 등장하게 되었다.
삼성그룹이 본격적으로 현대미술을 취급하고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이원화시켜 미술문화 사업을 전개시켜나간 것은 1990년대 초부터의 일로 보인다. 용인의 호암미술관에는 고미술을 전담하게 하고, 중앙일보 내의 중앙갤러리를 호암갤러리로 탈바꿈시켜 본격적인 현대미술의 기지로 정착시켰던 것도 그 시기이다. 삼성문화재단을 배후에 두고 유능한 미술 전문 인력도 계속 확보해나갔다. 그러다가 1999년 서울 태평로 삼성생명 본사 사옥에 로댕갤러리를 설립했는데 이는 로댕의 에디션 작품을 소장한, 세계에서 여덟 번째 전시 전용 미술관이다. 상설 전시되고 있는 로댕의 <지옥의 문> <칼레의 시민> 등은 일곱 번째의 에디션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삼성의 미술문화 사업은 새로운 미술관 설립으로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룹의 규모와 명성에 걸맞은 거대 규모의 새로운 미술관을 설립하고자 하는 야심 찬 청사진을 준비해 오랫동안 새로운 부지를 물색해왔다. 한때 후보지가 되었던 곳 중의 하나가 운현궁 바로 뒤 삼성건설 주택전시관 자리였다. 그런데 그곳은 공교롭게도 계동의 현대그룹 사옥을 마주하고 있으며, 대형 미술관의 터로는 부지가 조금 좁은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그 자리는 후보지에서 제외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2004년 한남동 이건희 회장 자택 옆에 ‘리움’이라는 미술관이 탄생되기에 이른다. 이(Lee)씨 가문의 ‘lee’와 미술관을 상징하는 ‘um’을 결합해 명명된 것이다.
리움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고미술과 현대미술의 균형 있는 전시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미술관은 명실공히 미술과 첨단 IT 기업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글로벌 기업의 패러다임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포스트모던 건축가로 유명한 마리오 보타, 하이테크 건축가 장 누벨, 렘 콜하스가 각각 설계한 3개 동의 미술관으로 수직적 위용보다는 수평적 안정감과 첨단 기술, 구조의 편의성을 강조한 건축으로 손꼽힌다.
리움의 옥외 광장은 랜드마크적 기능의 컬렉션을 대표하는 고가의 해외 조각 작품을 설치하는 장소이다. 움직이는 조각으로 잘 알려진 알렉산더 콜더의 높이 7백42㎝ 금속 조각 <큰 주름>(1971년)이 개관 때 설치된 바 있으며, 이 작품은 개관 2주년에 맞추어 프랑스 출신 여류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의 <마망>과 <스파이더>로 교체되었다. 로댕갤러리에 <지옥의 문>이 있다면 여기에는 <거미>가 있다. 모성애를 상징하는 암거미와 새끼거미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전세계 유명 도시의 랜드마크 작품이 된 것과 맥을 같이한다. 도쿄 록본기에 있는 모리센타 입구 광장의 부르즈와의 거미가 그렇듯, 리움의 거미도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줌으로써 사랑받고 널리 회자되는 작품이다.

리움의 컬렉션, 어떤 것들이 있나

 

언젠가 홍라희 관장은 삼성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컬렉션 작품의 숫자를 약 2만여 점이라고 밝힌 바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자리에서는 1만5천여 점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그의 진술이 그렇게 차이를 보이는 것을 주목해보면 이런 해석들이 가능해진다. 정확한 양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작품들이 재단 소유의 것과 개인 소유의 것으로 구분되어 있어 혼동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아무튼 삼성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작품의 내용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내부에도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투명하게 소장 내용이 공개되고 있는 외국의 유명 미술관들과 우리의 사립 미술관들 간에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리움의 컬렉션 내용은 그동안 외부에 노출된 주요 작품들만을 언급하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리움이 소장하고 있는 현대 회화 작품들은 프랭크 스텔라의 <검은 독사>(1965년),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집>(1997년), 색면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의 <무제>(1962년) <네 개의 붉은색>(1957년), 프랜시스 베이컨의 <방안에 있는 인물>(1962년), 윌렘 드 쿠닝의 <무제>(1947년), 장 뒤뷔페의 <풍경>(1953년), 앙리 마티스의 데코파쥬(종이 오리기) 작품 <오세아니아, 바다>(1946년),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696백조>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고 있다.
조각 작품으로는 전술했듯이 로댕갤러리가 1999년에 개관하면서 설치한 프랑스 근대 조각가 로댕의 청동 조각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이 리움 조각 소장품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호암미술관 옥외에 있는 부르델 작품들, 한동안 중앙일보 사옥에 비치되었던 헨리 무어 작품, 자코메티의 인체 조각 <거대한 여인>(1960년), 그리고 아르프·노구치·마리니 등의 작품들은 소장품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밖에 1960년대 세계 미술계를 주도했던 팝아트와 미니멀리즘 경향의 작품들도 리움 소장품의 핵심으로 손꼽힌다. 선반을 연상시키는 도널드 저드의 조각, 댄 플래빈이 형광등을 이용해 만든 조각, 전시장 바닥에 펼쳐 전시하는 칼 안드레의 조각, 앤디 워홀의 작품 <마흔다섯 개의 금빛 메릴린>, 올덴버그·조지 시걸의 조각 등이 대표작들이다. 1960년대 말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 묘법적 그림으로 통하는 톰블리의 작품, LED전광판으로 문자적 메시지를 표현하는 제니 홀저·미야지마 등의 작품, 2000년대에는 구르스키·슈트루스·테일러 우드·제프 월 등의 사진 작품, 영국 스타 작가 데미안 허스트의 설치 작품 <죽음의 춤>, 매튜 바니의 영상 및 사진 등도 세계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는 것들이다. 이 작품들은 주로 그동안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 리움에서 전시되었다가 미술관측이 소장하게 된 것들로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용철씨가 제시한 리스트 속의 작품들과 화풍은?

여하튼 이번 사건으로 인해 일반 시민들은 리히텐슈타인, 프랭크 스텔라, 게르하르트 리히터, 바넷 뉴먼, 도날더 저드 등의 많은 20세기 작가 이름들을 접하고, 미니멀아트·팝아트 등 뉴스에 등장한 미술 개념들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특히 이번 논란의 초점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Happy Tears)>이라는 작품이다. 한 번의 유찰이 있었다가 2002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7백15만 달러에 익명의 소장자에게 낙찰되었다.
10년 전에 작고한 이 작품의 원작자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1923~1997)은 앤디 와홀과 함께 팝아트의 양대 축을 이룬 작가였다. <행복한 눈물>의 이미지는 이미 매체에 유포되어 있는 것과 같이 만화 이미지로 전형적인 리히텐슈타인 양식이다. 고답적인 전통 미술의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TV나 신문, 잡지 등의 매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중에게 친근하게 접근되는 이미지들을 하나의 풍경으로 간주하고 표현하는 미술 양식이다. 리히텐슈타인이 인쇄 매체상의 만화 이미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면 앤디 와홀은 대중 매체에 등장하는 마릴린 먼로나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대중적 스타 이미지를 표현한 이미지, 즉 이미지의 이미지라는 개념을 성립시키고 있다.
김용철 변호사가 제시한 리스트 속에는 ‘숭고한 추상 그림’으로 유명한 미국 거장 바넷 뉴먼의 <화이트 파이어>, 도널드 저드의 유명한 상자 모양 미니멀 금속 구조물, 에드루샤의 흐물거리는 문자 이미지, 독일 거장 리히터의 <추상> 연작, 도시인의 내면을 나른한 구도의 일상 그림으로 묘사한 영국 거장 호크니의 <닉 와일더의 초상>, 기괴한 퍼포먼스로 유명한 영상, 설치작가 매튜 바니의 <크로매스터 사이클> 연작들도 함께 보인다. 이런 내용들이 사실이라면 홍씨가 미니멀 아트를 좋아한다는 말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필자는 1990년대 중반 어느 날 도쿄에서 일본인 딜러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나와 동행한 미술계 인사와 그 일본인이 대화하는 것을 들은 내용인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 일본인 딜러가 말하기를 자기들이 알기로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씨가 미니멀 아트 작품을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케팅 차원에서 나름으로 입수한 정보들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었다.
사실 당시만 하더라도 삼성은 고미술 중심의 컬렉션을 많이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이나 취향을 가지고 운영을 하는지는 전해진 바가 거의 없었다. 호암갤러리를 근거지로 하여 현대미술로 방향 전환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기에, 그 이야기는 내게 두 가지 느낌을 주었다. 하나는 일본 미술 시장의 정보력이 대단하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삼성이 대단하기는 하구나 하는 것이었다. 외국에서 관장의 취향까지 파악하고 있을 정도로 삼성의 미술 행보는 일찍부터 국내외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모양이다. 훗날 안 일이지만 홍라희씨는 1990년 초에 어느 자리에서인가 미니멀리즘 작품들을 좋아한다고 피력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홍라희 관장,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인 1위’에 꼽히기도

사실 홍씨가 리움을 벗어나 우리 미술계에서 무언가를 기여할 입장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원했든 혹은 원하지 않았든 그녀의 취향과 행보는 우리 미술계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연인지 미니멀 아트는 1990년대부터 우리 미술계에서 유난히 강세를 보였다. 미국이나 유럽의 미술계는 거의 포스트모던이라는 거대한 조류의 등장으로 미니멀 아트와는 상반된 양식들이 판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 미술계도 1990년대는 리얼리즘 미학에 근거한 민중미술과 새로운 표현주의, 그리고 뉴페인팅 외에 다양하고 자유 분방한 양식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던 때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미니멀 양식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 원인이 바로 홍라희씨의 말 한 마디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들도 적지 않다.
얼마 전 어느 미술 잡지에서 설문을 통해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인을 조사했을 때 압도적으로 홍라희씨가 1위에 오른 적이 있었다. 현재 비자금 사건 와중에 미술품 문제가 불거진 것도 홍라희씨의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에 더 논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삼성이 자신들의 미술관 외에도 ‘서울대 현대미술관’을 지어준 것이나 박수근 미술관 후원을 했던 것 등에서 보듯, 많은 사람들은 앞으로 삼성이 우리 미술계에 더 큰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다. 이번 사건이 어떻게 종결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리움이 투명한 미술관으로 새로 태어나 우리 미술 문화에 더 많은 기여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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