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은 ‘눈치 작전’ 두고 보며 묘수 찾나
  •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 승인 2008.02.18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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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새 정부 대북 정책에 구체적인 반응 없이 ‘관망’ 이명박 당선인 취임사 지켜보고 남북관계 입장 표명할 듯

 
지난해 12월19일 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당선된 이후 북한은 아직까지 이명박 당선인과 대북 정책에 대해 구체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북한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대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가 지난해 12월26일 처음으로 이당선인에 대해 언급하면서 현재의 남북 협력 관계와 북·미 관계 개선 흐름에 역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조선신보>는 ‘서민들의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남조선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다. 일부 미디어가 선전하는 것처럼 ‘보수의 승리, 진보의 패배’라는 구도가 아니라 경제 문제가 결정적인 요인이었음이 명백하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남한 유권자들이 이명박 후보를 선택한 것이 지난 10년간의 대북 포용 정책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신보>는 특히 이당선인이 “경선과 대선을 통해 시종일관 미국과의 동맹 관계 재구축을 강조하고 대북 관계에서는 ‘핵 폐기 우선’ ‘인권 문제’를 운운해왔다. 만약 그가 6자회담의 진전과 조미 관계가 개선되는 현 추세,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의 정신과 그 이행 움직임에 함부로 역행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한다면 또 민중의 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선신보>는 같은 날 평양 특파원들의 좌담회 형식을 빌어 “남한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남북 간 합의가 성실히 이행되어야 한다”라고 밝혀 현 관계를 유지하면서 새 정부와의 관계 설정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매년 1월1일 신년 공동사설을 발표하고 한 해 국정운영의 방향을 밝혀왔다. 때문에 신년 공동사설을 주목해보았지만 이명박 당선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없었다. 북·미 핵 협상의 난항, 대북 강경 노선을 천명한 이명박 정부 탄생, 경제 위기 심화와 체제 이완 조짐 등 대내외 정세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고 체제 결속을 강조하는 신중한 자세를 견지했다. 북한은 새해 들어 국면 전환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선군정치, 선군사상, 선군문화 등 ‘선군주의’ 강화를 통한 체제 결속을 우선시하는 등 전반적으로 ‘북한식 보수주의’를 강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올해 공동 사설에서 북한은 이명박 당선인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10·4 남북정상선언 이행과 평화 번영의 새로운 역사 창조를 제안했다. 경제난 해결에 남측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점에서 공리공영,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남북 경협을 확대·지속할 것을 바란다는 입장도 밝혔다. 북한은 더 이상 ‘시혜성(施惠性)’ 경협이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고 민족 공동번영을 강조하면서 ‘퍼주기 비판’에 적극 대응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한·미 동맹을 강조하는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한·미 동맹 강화에 따른 대북 압박을 경계하는 우려도 드러냈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의 탄생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행동으로 남측 새 정부의 출범을 대비해왔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이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에 남북정상회담에 응해 다양한 대화 채널을 복원하고 많은 합의를 도출한 것은 남측의 차기 정부를 의식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합의 사항을 새 정부가 이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이 이명박 정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표시하지 않고 있지만 2007년 남북정상회담과 그 이후의 남북 관계 진전이 새 정부에 대한 간접적인 입장 표시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북측은 남측의 새 정부와 다양한 대화 및 접촉, 교류 협력을 희망한다는 행동 표시를 하고 남측 새 정부의 반응을 기다리는 중이다.

 

북·미 관계 풀릴 때까지만 참고 가자?

이전 시기와 비교할 때 김정일 정권의 대남 태도는 매우 신중하다. 김정일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첫째, 선거 과정에서 나온 ‘비핵·개방 3000 구상’ 이외에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이 구체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부른 반응을 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취임사를 지켜보고 반응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첫 대면이 중요한데 정권도 출범하기 전에 성급한 입장을 밝힐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둘째, 지금 나오고 있는 인수위 등의 대북 정책은 4월 총선을 의식한 대북 강경 노선일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늦으면 4월 총선 이후까지 기다려 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선 과정에서 확인한 것처럼 이명박 정부는 지난 10년간의 진보 정권을 이른바 ‘친북 좌파’로 매도하고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고 했기 때문에 전통적 지지층을 의식해 총선까지는 대북 강경 노선이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총선 이후까지 기다릴 가능성도 있다.
셋째, 남북 관계가 북·미 협상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대응 전략’으로 상황을 관리하는지도 모른다. 한·미 공조를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와의 관계가 나빠지면 북·미 관계 개선에도 나쁜 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반응을 자제하는 것일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한·미 관계를 중시하는 것처럼 김정일 정권도 북·미 적대 관계 해소가 ‘생존의 중심 고리’이기 때문에 모든 역량을 미국에 집중하려 할 것이다. 북한도 북미 관계가 잘 풀리면 남북 관계는 저절로 풀린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는 ‘통미봉남(通美封男)’할 수도 있다.
넷째, 식량난 등 체제 위기 심화에 따른 수세적 적응 차원에서 이명박 당선인과 인수위가 대북 강경 정책을 표명하고 있음에도 반응을 자제하고 있는지 모른다. 다소 불만이 있지만 춘궁기 식량과 파종기 비료 지원을 의식할 때 북·미 관계가 풀릴 때까지 참고 가자는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있다. 

북한이 새 정부와의 전향적인 관계 설정을 의식해 대남 비난을 자제하고 협력을 강조한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명박 당선인도 신년 대담에서 “북한에 대해 냉전이 되는 것은 아니고, 더 평화적으로 더 화해적으로 나가는 것은 틀림없다”라고 화답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미국이 참여를 요청해온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 문제와 관련해 “장기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지만 단기적으로 당장 논의할 사항은 아니다”라는 쪽으로 방침을 정리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듯이 남과 북이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서로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남북 관계 진전을 위해 매우 바람직한 일로 생각된다. 적어도 남북 관계에 있어서는 남과 북 모두 실용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0·4 평화번영 선언’ 이후 남북 관계가 급진전함으로써 차기 정부는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집권 이후 남북 관계가 후퇴하거나 경색될 경우 대북 정책 수행 능력에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실용주의를 표방한 새 정부는 핵문제에 진전이 이루어질 경우 적극적인 대북 정책을 추진할 것이다. 다만 지지 세력 중 대북 정책의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는 강경 보수 쪽에서 오는 압력으로부터 얼마만큼 정책적 자율성을 갖느냐가 중요하다. 북한은 새 정부가 적극적인 대북 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집권 초기에 ‘선물’을 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남측이 원하는 성과를 주고 지지 세력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적극적인 대북 포용 정책을 펼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가능성도 있다.

새 정부는 대북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현재 진행 중인 핵 시설 폐기와 불능화, 핵 사찰 수용 등을 규정한 2·13 합의와 2·13 합의의 부속 합의서라고 할 수 있는 10·3 합의 이행과 남북 간 합의 사항을 잘 검토해 추진력을 유지하면서 공백을 최소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북한 핵실험 이후 핵확산을 막아야 하는 긴박한 국제 정세, 부시 대통령의 임기, 남북 간 산적한 현안 등을 고려할 때 남북 관계 재설정을 위한 시간이 많지 않다.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클린턴 행정부가 추진했던 대북 정책을 전면 부정하고(ABC: Anything But Clinton) 대북 강경 정책을 편 결과 핵실험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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