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향기 담고 부활하는 ‘고인’ 들
  • 반도헌 기자 bani001@sisapress.com ()
  • 승인 2008.03.10 16:2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주영·이주일 등 생전 모습 담은 광고들, ‘향수’ 자극…다큐·비디오아트 등 접목시켜 ‘신선’

이미 세상을 떠난 유명인들이 TV 광고를 통해 부활하고 있다. 최근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등장하는 현대중공업 광고와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등장하는 흥국쌍용화재 광고가 두 사람의 인생 족적을 회상하게 하며 눈길을 끌고 있다.
현대중공업 광고는 조선소 설립 당시의 에피소드를 정회장의 육성으로 직접 들려준다. 지도와 사진 한 장만으로 계약을 체결해 조선소 설립의 발판을 만들어낸 그의 추진력과 결단력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 광고는 정명예회장의 중앙대 특강 장면 일부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주일씨가 출연하는 흥국쌍용화재 ‘이유다이렉트 자동차보험’ 광고 역시 생전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이주일씨가 생전에 보여준 코미디 공연 장면을 편집한 화면 위에 후배 코미디언 이봉원씨가 이주일씨의 목소리를 그대로 모사해서 대사를 입혔다.
고인을 이용한 이들 광고들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정주영 명예회장과 이주일씨에 대해 국민이 가지고 있는 향수를 잘담아냈다는 평가이다. 서민 경제가 불안하고 웃을 일이 없는 국민에게 경제 성장의 대명사인 정명예회장과 어려운 시절 우리들에게 웃음을 선사한 이주일이라는 두 인물이 주는 이미지가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고인을 이용한 광고는 지난해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KTF는 ‘SHOW’ 광고에서 비디오 아티스트인 백남준씨를 모델로 선정했고, 하나금융그룹은 미국의 팝 아티스트인 앤디 워홀(Andy Warhol)을 모델로 한 광고를 선보였다. 고인을 이용한 광고들이 여럿 등장하자 이를 칭하는 ‘고인 마케팅’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출연료는 “걱정마세요” 수준

이들 광고는 고인을 모델로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표현 스타일에서는 차이가 있다. 현대중공업과 흥국쌍용화재 광고가 자료 화면을 통해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익숙함을 준다면 KTF와 하나금융의 광고는 똑같이 자료화면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빠른 편집과 독특한 배경 음악으로 감각적인 느낌을 준다. 파격적인 작품 활동으로 미술계에 변혁을 가져온 백남준씨의 비디오아트와 앤디 워홀의 팝 아트가 가지고 있는 감각적인면을 영상으로 그대로 살려냈기 때문이다.
이들 광고의 모델 선정 과정에도 차이가 있다. 현대중공업 광고를 담당한 이노션 광고기획팀의 김찬경 대리는 “모델 선정을 위해 작업 현장에 근무하고 있는 분들을 인터뷰했다. 그들이 정주영 명예회장에 대해 가지고 있는 향수가 여전했기 때문에 정명예회장을 선택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명예회장의 경우 현대중공업의 창업주로서 의미를 갖는다며 다른 고인 마케팅 사례와 차이를 둘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흥국쌍용화재의 관계자는 보험업계 광고 모델이 진중한 이미지에서 친근한 이미지로 선회하는 흐름에 발맞추어 이주일씨를 모델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하나금융그룹 홍보팀의 김기홍 차장은 “미술계에서 기존의 내용적·형식적인 틀을 깬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앤디 워홀이 기업 철학과 맞는 부분이 있어 모델로 선정했다.
그가 이미 사망한 사람이라는 것은 큰 문제가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고인을 모델로 사용할 경우 빅모델을 사용하는 것에 비해 여러 면에서 이점이 생긴다. 우선 출연료에 대한 부담이 경감된다. 한국의 빅모델을 광고에 사용하려면 5억원에서 최고 10억원에 이르는 돈을 모델료로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금융그룹이 앤디 워홀을 모델로 쓰면서 앤디 워홀 재단에 지불한 비용은 저작권료와 초상권료를 모두 합쳐도 빅모델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흥국쌍용화재에 의하면 이주일씨의 광고료는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불우이웃돕기와 같은 의미 있는 일에 쓰이기도 했다. 창업자를 등장시킨 현대중공업의 경우는 출연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예상하기 어려운 광고 모델로 인한 이미지 피해도 예방할 수 있다. 최근 자신이 광고 모델로 활동했던 화장품 회사로부터 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한 가수 아이비의 예처럼 모델의 사생활이 브랜드 이미지를 훼손시키는 사례가 종종 있다. 하지만 고인 마케팅의 경우는 이미 완성된 이미지를 브랜드에 그대로 입힐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걱정에서 자유롭다.
하나금융그룹의 김기홍 차장은 “세상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유명인의 경우 사생활 노출이 빈번히 일어난다. 그들을 모델로 썼을때는 행동에 대한 위험성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데 고인 모델은 이런 부분에서 자유롭다”라고 말했다. 이미 형성된 이미지가 변하지 않고 유지되어 이미지 변형에 대한 위험 부담이 작다는 것이다.
최근 빅모델이 여러 광고에 겹치기 출연하면서 소비자가 모델과 기업 혹은 상품을 바로 연결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면 고인 모델은 이런 점을 피해갈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현대중공업과 정주영 명예회장의 경우처럼 브랜드와 모델이 직접 연결되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브랜드 자산으로서의 가치를 얻는
효과를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흥국쌍용화재와 이주일씨처럼 모델이 브랜드를 직접 연상시키기 어려울 경우에는 여타 빅모델을 사용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인을 활용한 광고 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특이한 일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나 마틴 루터 킹 목사 등 역사적인 인물을 활용한 공익 광고가 종종 등장했다. 이주일씨 역시 사망하기 직전 찍어놓은 자료를 이용한 금연 공익광고가 사후에 방송되어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미국에서 고인 등장 사례는 상업 광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GE의 경우에는 현대중공업처럼 창업자인 에디슨을 오랫동안 활용했으며 요절한 영화배우 제임스 딘 역시 사망한 지 오래되었지만 영원한 젊음을 무기로 종종 광고 모델로 등장한다.

광고업계·소비자 모두 호의적

최근에 등장하고 있는 고인 마케팅 광고에 대해 광고업계와 소비자 모두 호의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이들 광고가 성공적인 결과를 나타낸 만큼 TV를 통해 고인을 모델로 한 광고를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광고업계의 한 관계자는 “자기 분야에서 한 획을 그을 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 중에 지금까지도 소비자
들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은 여전히 많이 있다. 그들의 이미지가 기업이나 브랜드 이미지로 그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고인을 활용한 광고가 더 나올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고인 마케팅이 광고계의 트렌드를 형성할지는 미지수이다. 이노션의 김찬경 대리는 “몇몇 광고가 성공했다고 해서 고인 마케팅이 트렌드를 형성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LG애드의 한 관계자는 “이들 광고가 소비자에게 강한 임팩트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 계속 등장한다면 그 신선함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