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패권주의에 불어권이 ‘화들짝’ “뭉쳐야 산다”
  • 김세원 편집위원 ()
  • 승인 2008.04.0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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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주도 세계화·영어 공용어화 현상 가속화에 긴장 프랑스어 사용의 날 만들고 국제기구 필요성도 제기

모로코의 전통음식인 쿠스쿠스와 타진(반숙 계란을 넣은 튀김 요리), 루마니아가 자랑하는 사르말레(돼지고기와 채소를 양배추잎에 싼 요리), 프랑스의 크레프, 베트남의 쌀국수….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의 음식이 한자리에 모였다. 음식만이 아니다. 이집트 카이로와 룩소르, 흡혈귀 드라큘라의 무대인 루마니아 브란 성 관광 안내 책자가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유학 안내 기관 캉퓌스 프랑스와 프랑스어 보급 기관 알리앙스 프랑세즈, 주한 프랑스문화원의 부스 앞에는 호기심어린 학생들이 기념품을 받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지난 3월28일 오후 서울 광화문 KT빌딩 1층 아트홀에서는 전세계의 프랑스어 사용 국가 중 한국에 대사관을 두고 있는 19개국 외교관들과 프랑스어권 유학 경험자,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한국의 초·중·고·대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색 행사가 열렸다. 국제 프랑스어권의 날(Journee Internationale de la francophonie) 축제다.

중앙 무대에서는 루마니아 민속 음악 팬플룻 연주, 시 낭송 대회 수상자인 대전외국어고등학교 김민경양의 프랑스어 시 낭송과 샹송 페스티벌 수상자 석채원양의 샹송 리사이틀, 아아닌카 그룹의 코트디부아르 전통 무용, 프랑스 극단 리그의 즉흥 연극, 스위스 알프스 지방 요들송 연주, 스트롱 아프리카 그룹의 콩고 음악 연주 등이 오후 6시까지 계속되었다. 한쪽에서는 라로셸 프랑코폴리 페스티벌 수상작이 상영되고 프랑스 사진작가의 사진집과 샹송 CD가 전시·판매되기도 했다. 2층에서는 ‘Toi(너)’, ‘Apprivoiser (길들이다)’ 등 올해 프랑스어 주간 조직위원회가 선정한 ‘올해의 10 단어’를 주제로 한 교육 포스터와 사진 콘테스트 우수작 전시회가 펼쳐졌다.

일반적인 국제 행사나 외교 모임이 으레 영어로 진행되는 것과는 달리 이날 행사에서는 주한 라오스 대사, 주한 콩고 대사, 주한 프랑스 대사 등이 프랑스어로 축사를 하고 친분이 있는 스위스 외교관과 이탈리아 외교관도 프랑스어로 인사를 건넸다. 한국의 새 정부가 영어 공교육 강화와 영어 몰입 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나라 전체가 영어 교육에 관한 논란으로 시끄러운데 ‘국제 프랑스어권의 날’이라니 뜬금없게 들릴지도 모른다.

프랑스어권 국가들, 정치·경제 분야로 협력 범위 넓히기로

이날 행사처럼 3월20일을 전후해 1주일 동안 세계 각지에서 ‘국제 프랑스어권의 날’이 열리게 된 배경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와 영어의 세계 지배를 막아야 한다는 프랑스와 프랑스어권 국가들의 위기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세계 프랑스어권 국가들은 1970년 3월20일 아프리카 니제르의 니아메에서 블랙아프리카 국가들을 주축으로 18개국이 문화기술협력기구 (ACCT 후에 OIF로 바뀜)를 창설한 것을 기려 1990년부터 매년 3월20일을 프랑스어 사용의 날로, 이날부터 1주일 동안을 프랑스어권 주간으로 각각 정하고 각종 행사를 벌인다. 이는 프랑스 식민지들의 독립이 본격화된 1960년대 초반 세네갈의 셍고르 대통령과 니제르의 디오리 대통령, 튀니지의 부르기바 대통령 등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의 지도자들이 프랑스와 구 식민지 프랑스어권 국가들 간의 문화 교류를 위해 프랑스어 국가 공동체를 건설할 것을 제안한 데서 태동했다. 과거 식민지와 본국간의 주종 관계가 재현될 것을 경계하는 프랑스 공산당과 제3세계 민족주의자들의 반발을 고려해 프랑스어 국가 공동체(Franco-phonie)는 패권적 문화제국주의나 인종차별적 식민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를 배제하고 비정치적인 문화 공동체임을 강조했다. 이후 198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회 프랑스어권 국가 정상회담에서 당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회원국들의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은 프랑스어라는 공통의 중심축에 의해 결속된다”라고 밝혔다.

1990년대 들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가 정치·경제 분야의 차원을 넘어 언어·문화 분야로까지 확산되고 미국이 주도하는 정보통신 혁명이 인터넷의 보편화와 함께 영어의 세계 공용어화 현상을 가속화시키면서 상황이 급박해졌다. 위기를 느낀 프랑스는 1997년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7차 프랑스어권 정상회담에서 프랑스어권 국가들의 결속과 협력을 한층 더 강화시킬 새로운 프랑스어권 국제 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미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영을 우려하는 세계 프랑스어권 지역의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문화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국가연합을 일종의 정치 경제협력체로 전환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던 터였다. 이에 따라 당시 회담에 참석한 46개 국가들은 프랑스어권 국가들의 협력 범주를 종전의 언어·문화 분야에서 정치·경제 분야로까지 확대해나간다는 목표 아래 프랑스어권 국가연합기구(OIF)를 창설하고 초대 사무총장으로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한 이집트 출신 부트로스 갈리를 선출했다.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은 “프랑스어권 국가연합은 더 이상 문화와 기술협력에 치중하는 단순 언어공동체가 아니며 좀더 강력한 지정학적 연합체로 성장하기 위해 국제 사회에서 OIF의 정치적 비중을 확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겠다”라고 선언했다.

영어의 세계 지배 및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대한 대안으로서 OIF의 프랑스어 사용과 프랑스어를 기반으로 한 문화 보존 노력은 유네스코의 문화다양성협약 채택이라는 결실을 거두었다. OIF가 창설된 다음해인 1998년 캐나다 오타와에서 제1차 세계문화장관회의(INCP)가 개최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각국 문화 장관들은 급증하는 무역 협정이 개별 국가의 문화 정책을 위협하고 이로 인해 문화 획일화와 문화 산업의 독점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공동의 대안 마련에 나섰다. 이후 정부 간, 비정부기구 간 협의를 거쳐 2005년 제33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참가국 1백54개국 중 미국과 이스라엘이 반대하고 4개국이 기권한 가운데 148개국의 압도적 지지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 협약’(문화다양성협약)이 채택되었다. 문화다양성협약은 각 나라가 자국의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명시한 것이다. 지난해 3월18일 비준 국가가 30개국을 넘으면서 협약이 공식 발효되었고 지금까지 70여 개국이 협약을 비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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