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내어준 주인 없는 땅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 승인 2008.05.0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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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가 각 사찰에 무상으로 제공…소유권 모호해 분쟁 발생하면 조계종 패소?

 

사찰들이 임야 소유권을 갖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때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산림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1918년 임야조사령을 공포했다. 임야의 소유권과 경계를 명확히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조선 시대에는 임야에 대한 소유 개념이 없었다. 조선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산림을 개인이 점유하면 볼기 80대를 때린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른바 공산무주(公山無主) 원칙을 지켜왔다. 다만 임야에 관한 배타적 이용이 금지되었을 뿐 누구든지 주인 없는 임야에 출입해 가축 방목, 연료 채취, 토석 채취, 수렵 채집을 할 권리가 인정되었다.

일제는 군사·학술상 필요한 보안림에 준하는 국유림은 ‘요존치 임야’로 나머지는 ‘불요존치 임야’로 분류해 관리했다. 국유림에 속한 촌락공유림과 분묘림은 일본인 등에게 선심 쓰듯 내주었다. 당시 전체 임야의 50%가 총독부 소유로 되었다가 다시 일본인 개개인에게 불하되었다.

임야 조사 사업이 종결된 직후인 1926년 4월5일 일제는 ‘조선특별연고삼림양여령’을 제정한 후 국유림 중 불요존치 임야를 특별 연고자에게 소유권을 주었다. 이 법령에 따라 산속에 있던 사찰에도 임야가 무상으로 제공되었다. 당시 사찰이 총독부 산하 기관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사찰 자체에게 준 것이 아니라 국가 기관에게 소관 업무를 넘긴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현재의 사찰림은 해방 후 1950~1960년대를 거치며 사찰을 소유권자로 하여 보존 등기가 되었다. 사찰림에는 설악산·오대산·속리산·지리산 등 전국 각지의 사찰 임야가 포함되어 있다. 일제는 사찰에 임야 소유권을 양여하면서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활용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승려들을 식민지 정책에 적극 이용했다. 일제는 1911년 사찰령을 발동해 ‘31본산 제도’를 만들고, 모든 사찰의 주지 임면권과 재산의 처리, 사찰의 병합, 사찰의 신설 등의 전권을 행사했다. 이런 사실은 총독부 관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불교계의 친일 행위도 노골적으로 벌어졌다. 31본산 주지들에서 말사 주지들까지 불교 언론계와 학계 등이 전방위로 친일에 가담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친일 승려들은 ‘탁발보국’이라는 명목으로 군수품과 국방 헌금 등을 헌납했다. 이들은 1940년부터 실시된 창씨개명에서도 앞잡이 노릇을 했다. 각 본·말사 주지들이 총독부의 눈치를 보아가며 경쟁적으로 친일 행위에 나섰던 것이다.

<친일 승려 108인>의 저자 임혜봉 스님은 “친일 승려들은 징병제를 옹호했고, 적극 홍보했다. 용산에 있는 일본군 사령부를 방문해 비행기 기금을 헌납했다. 1943년 일제가 학도병을 징집하자 ‘제 발로 걸어 나가 죽는 것이 조선 청년 승려들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강변했다”라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과 임혜봉 스님의 <친일 승려 108인>을 보면 당시 승려들의 친일 행위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일본 임제종과 조계종의 합병을 도모해 불교계의 이완용으로 불리는 이회광(1862~1933)은 친일 단체를 조직하는 등 조선 불교의 매국을 선동했다. 일제 시대에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처음으로 확립한 권상로(1879~1965)는 각종 시국 강연을 다니면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월정사 주지 이종욱(1884~1969), 통도사 주지 김구하(1872~ 1965), 보현사 주지 김법룡(생몰 미상), 건봉사 주지 김보련(생몰 미상), 봉선사 주지 김송월(?~1933) 등도 친일에 적극 가담한 승려들이다.

 
사찰이 토지 소유 증명할 방법 거의 없어

<시사저널>은 취재 중에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일부 사찰 임야에 대한 소유권이 모호하고, 분쟁이 발생하면 조계종이 패소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가가 소유권을 주장할 경우 법리 해석 측면에서 논쟁거리가 될 소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우선 헌법의 관점에서 보자.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조선총독부가 사찰에게 사찰림을 양여한 사실만 가지고 그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은 위헌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지난 2005년 친일파 이근호의 후손이 제기한 ‘토지 환수 소송’에서 각하 결정을 내린 수원지방법원 이종광 판사는 80쪽에 가까운 판결문을 통해 대한민국 개인의 토지 소유권이 조선총독부의 법률적 근거에서 비롯하고 있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 판사는 판결문에서 “국회가 헌법상의 입법 의무를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헌법 이념과 하위 법률 규정들 사이에 모순 또는 충돌이 일어난다. 친일 반민족 재산권을 민사 실체법적으로 보호하는 경우 3·1 운동의 독립 정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의 계승이라는 헌법 이념에 반하는 헌법 위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라고 적었다. 즉 친일의 대가로 토지 소유권을 받거나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했다면 일제가 준 소유권을 인정하는 데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일제가 임야조사령을 실시할 당시 면적이 큰 임야는 조사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국유지로 당연시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대법원은 임야의 소유권 다툼이 있을 경우 임야조사령 당시 임야조사서의 존재 여부를 중요시하고 있다. 소유권을 인정하는 기초 근거로 삼는다. 임야조사서는 임야 조사 사업(1918~1924)을 통해 작성한 임야의 지번, 면적, 소유자, 연고자를 기록한 문서다.

현재 설악산·오대산 등의 임야에 관해서는 일제 총독부의 임야 조사 사업 당시의 임야조사서가 남아 있지 않다. 임야 조사 사업 당시 토지의 경계를 밝힌 ‘임야원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임야조사사업 관련 서류가 없는 것은 ‘국’으로 사정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해당 사찰 토지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사찰은 소유를 증명해야 하는데 증명할 방법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는 보존 등기만 되어 있는데 보존 등기는 등기 의무자가 존재하지 않을 때 등기 권리자의 단독 신청에 의한다.

조계종이 현재의 판례로 사찰림의 소유권을 주장하고자 한다면 1926년에 있었던 ‘조선특별연고삼림양여령’에 기인해야 한다. 그러나 특별 연고자 양여에 관한 자료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도 불투명하다. 조선총독부로부터 증여를 받은 자료가 있어도 1965년까지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 소유권은 사라진다.

대법원이 1993년 6월25일에 선고한 ‘소유권보존등기 말소’ 판례에 따르면 ‘조선특별연고살림양여령(대정 15.4.5. 제령7호)에 따라 임야를 양여받은 경우 위 양여는 민법 제187조 소정의 ‘법률의 규정에 의한 부동산 물권의 취득’이 아니라 일종의 증여이므로, 양수인이나 상속인이 1965년 12월31일까지 이에 관한 소유권 이전 등기를 아니하였다면 민법 부칙 제10조 제1항에 따라 그 소유권을 상실하게 된다’라고 판시했다. 현재 오대산 월정사(1973년 10월18일), 설악산 신흥사(1971년 6월11일), 속리산 법주사(1975년 7월15일) 등은 1965년 이후에 등기가 되어 있다.

조계종 기획실 박희승 차장은 “사찰의 땅은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다. 왕실에서 땅을 하사하기도 했고 또 개인이 사찰에 기증하기도 했다”라며 사찰 고유의 땅임을 강조했다.

지난해 조계종 총무원이 발간한 <국립공원 문화재와 문화재관람료 바로 알기> 책자를 보면 사찰 소유권에 대한 입장을 찾아볼 수 있다. 책자에는 “사찰 소유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역사적 기여에 의한 보상, 수행자와 불교도들의 땀방울이 모여서 형성되었다. 현재의 사찰은 각 사찰의 소유 토지나 건물들을 현대의 소유권 체제에 맞게 조계종 사찰의 재산으로 관련 공부에 등재하고 있다. 사찰 경내지에 대하여 사찰이 이용권만 가지고 있지 소유권이 없다는 식의 주장은 언제라도 정부가 사찰의 토지나 건물을 회수 조치해도 된다는 봉건 왕조 시대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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