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줄대기’는 더 이상 없다?
  • 로스앤젤레스ㆍ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8.10.2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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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누가 되든 ‘국제 협력’ 치중할 듯…미국 언론 “약소국 압박 없을 것”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후보(왼쪽에서 두 번째)가 팔레스타인의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 한 시민의 집을 찾았다. ⓒ뉴욗 타임스

지난 1993년 초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였다. 한국 정부는 청와대 고위 보좌관 ㄱ씨를 워싱턴에 급파했다. 보수 야당 성향을 지녔던 김영삼 대통령은 진보 성향의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자 백악관과의 소통 문제에 부닥치면서 신경이 예민해졌다. ㄱ씨가 점지된 것은 클린턴과 마찬가지로 예일 대학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학연을 찾아 클린턴 주변 인물에 줄을 대 백악관과의 접촉을 시도한 것이었다.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 이같은 줄대기 외교가 다시 필요할지 모른다. 자칫하면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미국 대통령의 캠프데이비드 별장에 초청받아 ‘형님’ ‘동생’ 하며 형제지애를 나눈 이명박 대통령과 조지 부시 대통령의 우호 관계가 1년도 안 되어 깨질 가능성이 있다. 보수를 지향하는 이명박 정부가 진보 성향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상대해야 할 확률이 점차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다음 주 선거에서 승리하면 이명박 정부는 15년 전 김영삼 정부가 겪었던 것과 같은 상황에 직면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골수 보수 부시 대통령과의 소통을 등한시하면서 한국이 처했던 여러 어려움에 비길 정도는 아닐 지라도 김영삼 정부처럼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가 역전극을 펼쳐 백악관을 차지하게 되면 물론 사정은 달라진다.

그러나 지난주 미국 유력 신문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대통령 선거 2주일을 앞두고 게재한 연작 사설 시리즈를 보면 이같은 염려가 모두 기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우선 줄 대기를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제국주의’ ‘경제 이기주의’도 포기하려나

이 사설 시리즈에 따르면 오바마이든 매케인이든 다음 미국 대통령은 ‘제국주의’도 ‘깡패 국가’도 ‘경제 이기주의’도 아닌 아주 멋진 미국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이전처럼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 같은 작은 나라를 묵살하고 압박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대신 국제 협력과 신뢰, 이성적 국내 정치와 합리적인 경제 정책 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멋진 나라와 뒷구멍으로 구걸 외교를 할 필요는 없다.

시리즈의 첫째 주제는 부시 정부가 만들어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관타나모 포로 수용소의 해체이다. 부시 정부가 9·11 사태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고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 만든 이 수용소에는 알카에다와 탈레반 관련자들이 구금되어 있다. 그리고 수용소 내 포로 학대 사례가 폭로되고 국제적 비난의 표적이 되면서 이 수용소는 미국의 도덕성에 결정적인 흠집을 안겨주고 있다.

오바마와 매케인은 관타나모 수용소 폐지에 모두 동의한다. 민주당의 오바마는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면서 조기 철군을 주장하는 것과 함께 관타나모 수용소를 부시 정부를 공격하는 핵심 대상으로 꼽고 있다. 매케인 역시 부시의 백악관으로부터 곱지 않은 눈길을 받으면서 관타나모 수용소 폐지에 동조한다. 그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하노이 포로 수용소에서 겪었던 고초를 상기시키며 포로 수용소 폐지에 앞장서고 있다. 오바마나 매케인 가운데 누가 차기 미국 대통령이 되든 관타나모 수용소는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다음 미국 대통령이 가장 먼저 부닥칠 난제는 월스트리트를 시발로 금융 위기가 확산되면서 미국 전역을 침체 국면으로 몰고 있는 경제이다. 오바마와 매케인은 모두 부시 대통령이 내놓은 7천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지지한다. 부분적 이견은 있을지라도 현재의 미국 금융 위기를 시급하게 해소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오바마는 부유층에 대한 세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매케인은 미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세금 인하를 주장한다. 방법은 다르나 양측 모두는 서민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길이라고 믿고 있으며, 어떻게든 미국 경제를 살려놓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목표가 같다. 미국 경제와 민감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한국 경제로서는 이같은 미국 대통령 후보들을 의식해서 굳이 두려워하거나 안달하면서 외교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게 된 셈이다.

이라크 주둔 한국군 조기 철수는 반가운 일

▲ 이라크의 하디타 시장에서 상인과 악수를 하고 있는 존 매케인 미국 대통령 후보(오른쪽에서 두 번째). ⓒ뉴욕 타임스

미국민이 귀를 기울이는 것 중 다른 하나는 미국의 에너지 위기 해결책이다. 오바마는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깨끗한 석탄’ 즉 대체 에너지의 개발을 제시한다. 이는 세계 석유 부존량의 5%밖에 갖고 있지 않으면서 세계 생산 에너지의 25%를 소비하는 미국의 에너지 독식 현상을 반성한다는 점에서 시선을 끌고 있다. 매케인은 미국 내 연안 석유 개발을 본격화함으로써 에너지 자립을 확보하고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촉진함으로써 부족한 에너지를 확충할 것을 요구한다. 오바마의 대체 에너지 개발 정책이나 매케인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 활성화는 모두가 실현성이 약하고 환경 파괴라는 위험 부담을 안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이같은 에너지 자립 노력은 결국, 국제 유가 안정의 지름길이 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도 좋은 방향이 아닐 수 없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그 밖에 이민 문제와 교육 제도 개혁, 건강보험 개혁을 다음 미국 대통령이 풀어야할 주요 과제들이라고 지적했다. 오바마와 매케인은 모두 이런 사회 문제들의 개선과 개혁을 강조한다. 정책 시행에서는 서로 방법이 다르지만 목표는 역시 같다. 미국 이민자가 증가하고 있는 한국의 처지에서 보면 이민법 개선은 중요하다. 수많은 자녀를 미국으로 조기 유학 보낸 한국 학부모들에게 미국 교육이 좀더 질적으로 발전하면 반가울 일이지 욕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미국민의 건강보험 문제는 한국민이 걱정할 이유가 없는 이슈 가운데 하나이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짚어낸 문제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오바마는 이라크 전쟁을 잘못된 판단으로 섣불리 개입해서, 결코 성공하지 못한 전쟁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잘못된 곳에서 잘못 치러지고 있는 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국제 사회에 깡패 국가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이라크 주둔 미군의 조기 철수를 요구한다.

매케인은 미군 철수에 반대하지 않는다. 군인 출신 정치인답게 그는 미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명예롭게 철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매케인은 미국의 신뢰 회복을 승자로서의 신뢰에서 찾고 있다.

오바마의 정책은 이라크 주둔 한국군의 조기 철수와 함께 추가 파병 논란을 해소시킨다는 점에서 반갑다.

매케인의 승전 논리 또한 북한이라는 군사적 위협에 직면한 한국에 믿음직한 소리로 들릴 수 있다.

누가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되든 한국이 걱정할 일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어느 이슈에서든 미국이 잘되면 한국도 잘못될 이유가 없다. 우리가 또 다른 ㄱ씨를 찾아 줄 대기 외교를 하느라 고심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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