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버리고 정부가 버리고…
  • 이은지 (lej81@sisapress.com)
  • 승인 2008.11.18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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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모 밑에서 크는 아이들, 지자체마다 지원금 들쭉날쭉…“노인·아동 복지 통합하라”

ⓒ시사저널 박은숙

도서 산간 지역에는 한 집 건너 한 집이 조손 가정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가족이 서로 떨어져 살거나 아예 가정이 파탄나면 시골에 있는 조부모에게 자식들을 맡기는 경우가 많아 나타난 현상이다. 제2의 외환위기를 우려할 정도로 경기 침체가 깊어지고 있는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조손 가정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조손 가정은 의료나 교육, 복지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손자가 어쩔 수 없이 함께 살게 된 것이 개인의 가정사로 치부될 뿐 사회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충북 단양읍 단성면에 사는 김영애 할머니(64)는 7년째 두 명의 손자·손녀를 돌보고 있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삼간 집에 살고 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번듯한 양옥집에서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집이 좋네요”라고 말을 건네자 “다 빚이여”라는 말이 돌아왔다. “이 집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도 못 받고 고생하잖여”라는 말도 뒤따라왔다.

남의 땅에 지은 것이지만 집이 있다는 이유로 손자와 손녀에 대한 생계비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예외 조항에 따르면 18세 미만의 요보호 아동인 경우에는 매달 30~35만원 정도 지원금이 나온다. 할머니가 집이 있어도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 석 자밖에 읽을 줄 모르는 할머니가 이런 조항을 알 리 없다. 할머니의 딸이 면사무소에 가서 따지고 나서야 3년 전부터 생계비를 지원받게 되었다. 

지원금 받을 수 있는데 몰라서 못 받아

김할머니처럼 불우한 경우는 허다하다. 통계청이 2006년 7월 발표한 ‘인구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조손 가정은 5만8천 가구이다. 하지만 아동에 대한 생계비 지원을 받는 세대는 2008년 기준으로 6천9백75세대(중앙가정위탁지원센터 자료)이다. 전체의 약 12.5%에 불과하다. 나머지 87.5% 가운데 조부모가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되어 지원을 받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법을 몰라서, 또는 서류상 아동의 부모가 경제적 능력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지원을 받지 못하는 조부모도 적지 않다.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전체 조손 가정의 10%는 훌쩍 넘는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말이다.    
김할머니는 매달 60만원을 지원받다가 올 6월부터는 지원금이 12만원 깎여 48만원을 받고 있다. 사연을 들어보면 기가 막힌다. 단성면 사무소 김용옥 생활복지담당자는 “무료 임차 소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즉, 할머니 집에 손자와 손녀가 얹혀살기 때문에 지원금을 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손자와 손녀는 경제력이 전혀 없는 아동들이다. 단성면은 이들이 전세나 월세를 사는 경우를 상정해서 할머니가 임차 소득을 얻은 것처럼 보고 지원금을 깎은 것이다. 주먹구구식 행정이 조손 가정의 형편을 더욱 어렵게 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지원금 집행이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동복지법에 양육 보조금은 7만원으로 명시되어 있지만 생계비 지원금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권고 사항으로 나와 있어 지자체마다 차이가 난다. 울산이나 경기도 남양주처럼 지자체 예산이 풍부한 지역은 아동 1인당 35만원의 지원금에 학습 보조비가 8~12만원 추가 지원된다. 재정 상황이 열악한 도서 산간 지역일수록 지원금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렇다 보니 예산이 적은 지역에서는 담당 직원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지원금을 줄이는 사례가 허다하다.  

김할머니는 큰아들이 이혼하고 아이들을 맡긴 2001년부터 남의 땅에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새벽 5시에 밭에 일하러 나갔다가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집에 들어온다. 먹고사는 일이 바빠 손자와 손녀의 교육 문제는 등한시할 수밖에 없다. 손녀 수민이(8)가 바로 전날(11월10일) 학습발표회를 했지만 할머니는 가지 못했다. 단단히 삐친 수민이는 2시간 동안 할머니와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수민이에게 기자가 “언제 아빠가 가장 보고 싶었어?”라고 눈치 없는 질문을 던졌다. “바로 어제”라는 답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 나왔다. 하지만 수민이에게서 그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수민이 주위에 조손 가정이 많다 보니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수민이가 다니는 단천초등학교 1학년 학생 9명 가운데 5명이 조손 가정이다. 전교생 72명 중 15명 내외가 조손 가정이다. 100m가량 떨어져 있는 단성중학교의 상황도 비슷하다. 이 학교 교무주임은 “전교생 74명 가운데 20%가량이 조손 가정이다”라고 귀띔했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워 사교육을 받는 학생은 전교생 가운데 단 한 명도 없다. 3학년에 재학 중인 신나라양도 학교 수업이 4시 반에 마치면 집으로 간다. 6시 반까지 방과 후 수업이 있지만 버스 시간 때문에 받지 못한다.

‘부자’ 지자체는 학습 보조비 추가 지원하기도

일 나간 할머니가 돌아오기 전이라 신양은 늘 혼자 저녁밥을 챙겨 먹는다. 그리고 TV를 보거나 인터넷을 하다가 10시쯤 잔다. 신양에게 “친구들은 다 공부할 텐데 집에서 놀면 불안하지 않냐”라고 묻자 “친구들도 다 나와 비슷하다”라며 수줍게 웃었다. 교무부장은 “조손 가정이 많아 서로 동질감을 갖고 위안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큰 꿈을 가지도록 목표 의식을 부여하는 것이 어렵다. 인근에 있는 단양중학교에서 밤 9시 반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학교가 지원하고 있지만 이에 응하는 학생은 18명뿐이다.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처져 있다”라고 전했다.

물론 조부모가 의지를 가지고 아이를 가르쳐 좋은 성과를 거두는 가정도 있다. 단성면에 사는 강재수 할아버지(79)는 손자 이야기가 나오자 입가에 미소부터 흘렀다. 고3인 손자가 이번 수능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숙사비와 용돈 마련할 일에 걱정도 앞선다. 강할아버지는 “대학부터는 생계비 지원이 끊긴다. 손자가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감당하기 힘들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자를 떠맡기 시작한 13년 전부터 강할아버지의 삶은 포기했다.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사고방식과 경제난 때문에 이혼율이 급격하게 증가했지만 이에 따른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가 외면해왔던 것이다. 경제적 지원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줄 심리적 지원이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도서 산간 지역의 아동들과 달리 도시 지역의 아동들은 심리 치료가 절실히 요구된다. 도시 지역 아이들의 경우 조손 가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왕따를 당하기 십상이어서 심리적으로 주눅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중앙가정위탁지원센터 안지영 팀장은 “급식비를 지원받으면 조손 가정이라는 것이 들통날까 봐 일부러 안 받는 아동들도 있다. 공부방도 나가지 않는다. 주위 친구들처럼 똑같이 학원 다니기를 원해 조부모들이 힘들어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라고 귀띔했다. 유해 환경에도 쉽게 노출될 수 있어 탈선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린이재단과 같은 사회복지기관에서 자원봉사자와 아동을 연계시켜 부모 역할을 대신해주도록 멘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일부 지역의 이야기일 뿐이다. 심리 치료 서비스도 실시되고 있으나 정기적으로 지원되지 않다 보니 이용자가 많지 않다. 이처럼 조손 가정에 대한 지원이 각 기관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탓에 돈은 돈대로 들고 효과는 크지 않다.

도시 지역 아이들은 ‘왕따’

정부 부처조차 조손 가정 업무를 서로 쪼개어 맡아보고 있다. 보건복지가족부의 가족지원과가 조손 가정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아동에 대한 생계비 지원 업무는 아동청소년복지과가 담당하고 있다. 가족지원과 류제덕 사무관은 “한부모지원법을 통해 조손 가정에 아동양육비 월 5만원과 고교 입학금 수업료를 지급하는 것이 전부이다. 지원금이 적다 보니 지원자가 50세대에 불과하다. 생계비 지원이 30만원가량 나오는 아동청소년복지과에서 조손 가정 업무를 맡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쪽에 문의해보라”라고 전화를 끊었다.

기자가 아동청소년복지과로 다시 전화를 하자 조손 가정 문제는 오히려 가족정책과에서 다루고 있다며 전화를 돌렸다. 전화를 받은 담당 공무원은 “조손 가정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라며 전화번호를 하나 알려주었다. 어이없게도 맨 먼저 통화했던 류제덕 사무관 자리 번호였다. 취재 결과 현재 아동 생계비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 자리가 1주일째 공석이었다. 올해 들어서만 담당 공무원이 4~5번 정도 바뀌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책이 통합적으로 추진되기 어려울뿐더러 일관되게 처리될 리도 만무하다. 

이런 현실에 대해 서울장신대 사회복지학과 박은미 교수는 “가족 복지에 대한 지원은 아동복지 따로 노인복지 따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가족복지로 통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부처 체계 개편을 통해 가족 복지 전담 기구가 마련되어야 한다. 공무원들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 잦은 부서 이동도 사라져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박교수는 또 “지역 복지 네트워크가 형성되어야 한다. 교육청과 지자체가 협력하면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조손 가정의 실태 파악이 가능한데도 이런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역 단위로 각각의 기관과 단체가 복지 네트워크를 형성해 실질적인 복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시사저널 이종현

조손 가정을 찾아내 여러 가지 지원을 하는 업무는 각 지자체 생활복지담당 공무원의 몫이다. 이와 더불어 전국 17개 지역에 있는 지역가정위탁지원센터(이하 센터)에서 이 일을 거들고 있다. 가정위탁아동의 64.2%가 조부모 손에 키워지다 보니 어느덧 센터가 조손 가정 전담기구가 되어버렸다. 센터의 업무를 총괄하고 위탁아동 정책을 개발하는 중앙가정위탁지원센터 이경수 소장을 만났다.

이소장은 “센터마다 직원이 4~5명에 불과하다. 인력이 부족한 탓에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조손 가정의 실태를 파악하는 일이 수월하지 않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정부 부처가 통폐합을 거듭하는 과도기적 상황이라 일관되게 정책을 추진하는 것도 어렵다. 이소장은 “2003년 여성가정부(현 여성부)로부터 가정위탁사업을 위탁받았다. 2008년 다시 보건복지가족부로 업무가 이전되었다. 조손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지원법을 만들려고 해도 전담 부서와 전담 공무원이 자주 바뀌어 이 또한 쉽지 않았다”라고 토로했다. 법률 제정이 어렵게 되자 일부 지자체에서는 조례를 만들어 관내 조손 가정을 지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소장은 “정서적으로 조손 가정 아동들을 보듬어줄 수 있는 서포터즈를 올해 말 발족할 계획이다. 이와 더불어 정부 정책이 체계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시스템도 빠른 시일 안에 마련하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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