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지는 대륙의 균열, 무엇으로 메우나
  • 소준섭 (국제관계학 박사) ()
  • 승인 2009.07.1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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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민족 대결 양상으로 번지는 위구르 유혈 사태로 시험대 올라…티베트와 함께 민족·종교 결합된 문제라 ‘난항’

▲ 중국 신장 자치구 우루무치에서 유혈 시위가 벌어진 뒤인 7월7일 시위에 참가했다가 부상을 당한 한 위구르인이 머리에 붕대를 감싼 채 길가에 주저앉아 있다. ⓒEPA


중국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 성도(省都)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발생한 대규모 유혈 시위는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카스(喀什) 등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번 시위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최악의 유혈 시위 사태로 기록되었다. 사망자는 7월7일 오전 현재 1백56명으로 늘어났고, 한족과 위구르족 간의 민족 대결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신장(新疆)’이라는 명칭은 청나라 건륭제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붙인 이름인데 ‘고토(故土)가 새롭게 귀환했다’라는 의미이다. 이곳은 고대에 흉노의 땅이었는데, 장건의 서역 개척 이후 실크로드가 열렸다. 기원전 60년 서한(西漢)은 이곳을 처음으로 점령해 서역도호부를 설치했다. 이후 5호16국 시대의 혼란기에 여러 유목민족의 영토였던 이곳은 돌궐의 지배를 거쳐 수당(隋唐)의 지배에 편입되었다. 명나라 시기에는 서역의 강국 투르판과 이곳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경합을 벌이다가 결국, 포기하고 가욕관(嘉浴關)까지 후퇴했다. 이후 17세기에는 준갈 제국이 흥기해 강력한 유목제국을 건설했다. 청나라 시대에 접어들면서 준갈 제국을 공략하기 시작, 건륭제 때 준갈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곳을 수복하여 신장이라고 지칭했다.

1933년 위구르족은 영국의 지원 하에 ‘동투르크스탄 이슬람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일시 성공했으나 곧 좌절되었다. 국민당 정부 때 상대적으로 독립 상태를 유지했던 이곳은 1944년 소련의 지원에 힘입어 ‘동투르크스탄 이슬람공화국’을 재건했다. 하지만 1945년 소련은 중국과 외몽골을 독립시켜주는 대신 신장은 독립시키지 않는다는 밀약을 맺었다. 그리고 1949년 소련이 신장 지역을 중국에 넘겨 팽덕회가 이끄는 인민해방군에 의하여 그해 9월25일 우루무치가 점령되었고, 중국의 성(省)으로 편입되었다. 중국의 자치구가 된 것은 1955년이다. 면적은 중국 전체 면적의 1/6이 넘고, 국경선 길이는 중국 전체 국경선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 왼쪽은 7월7일 중국 군인들에게 울부짖으며 항의하는 위구르족 여인들. 오른쪽은 7월5일 시위 현장에 널부러진 시신들. ⓒ로이터

민족적 박탈감과 차별, 봉기로 타올라

중국 정부는 신장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한족을 대규모로 이주시켜 ‘한족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에 따라 신장 지역 총 인구에서 한족의 비율은 1949년의 6%에서 현재 41%까지 비약적으로 팽창했다. 한족의 이주는 도시 지역으로 집중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도(省都) 우루무치 시는 한족이 75.3%를 점해 12.8%에 불과한 위구르족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다. 우루무치에서 무장한 한족들이 위구르인들에 대한 보복 행동에 나선 것도 이와 같은 압도적인 인구 비율이 그 배경이다.

이번 시위 사태는 지난 6월26일 광둥(廣東) 성 샤오관(韶關) 쉬르(旭日) 완구공장에서 발생한 위구르인 사망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위구르족 남자가 한족 여성을 강간했다”라는 글이 인터넷에 올라오면서 한족 노동자들이 6월26일 새벽 집단으로 위구르인 숙소를 습격해 곤봉 등으로 위구르인들을 구타했다. 이 과정에서 위구르족 여성 2명이 숨지고 1백2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광둥 성 현지 경찰은 단지 ‘위구르족의 한족 여성 강간 사건’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자만 체포했을 뿐 폭행·살인 범인은 검거하지도 않았다. 반면, 이 회사에 근무하던 위구르족 직원 전원은 해고되었다. ‘강간 혐의자’로 지목된 위구르인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가운데, 오히려 살인 혐의자들은 버젓이 활보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오직 자신들이 잘못해서 벌을 받은 것처럼 몰리게 된 위구르인들은 격노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 완구공장은 홍콩의 유명한 ‘완구대왕(玩具大王)’ 차이즈밍(蔡志明)이 운영하는 자회사로서 올해 5~6월에 신장 카스 지역 노동부 관련 기구를 통해 6백여 명의 위구르족을 고용했었다.

 ‘세계위구르대표대회’는 7월3일 이 사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전세계 위구르족들이 각국 정부와 중국 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정하고 아울러 중국 정부에게 외지에 나가 노동을 하고 있는 위구르족들을 신장 고향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요구했다(이들은 중국 정부가 신장 지역에서 위구르족 인구를 감소시키기 위해 위구르인들의 외지 취업을 고취함으로써 사실상 신장 위구르족의 해체를 조장하고 있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난 7월5일 우루무치에서 위구르족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던 중 심각한 유혈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 7월8일 정상을 되찾아가고 있는 중국 우루무치의 대로변에서 중국 군인들이 성난 한족들을 제지하고 있다. ⓒEPA

투쟁 단체 50여 개…무장 투쟁으로 발전할 가능성 높아

중국 정부는 광둥 성 사건을 빌미로 해외의 분리 독립 주장자들이 일반 위구르인들을 선동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광둥 성 사건 이전에도 이미 위구르인들의 민심 이반 조짐은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올해는 중국이 신장을 ‘점령’해 통치한 지 60주년을 맞은 해이기도 하다. 세계위구르대표대회가 지난 6월9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60주년을 맞아 신장 각지에서 자유와 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전단이 살포되고 ‘위구르인의 어머니’로 불리는 레비야 카디르의 초상화가 각지의 공공장소에 내걸렸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위구르족들의 움직임을 단속하고자 신장 지역에서 ‘100일 단속’을 실시, 6월9일까지 인권과 종교 자유를 요구하는 위구르인들이 최소 8백42명이나 체포되었다.

신장 지역은 지난 1998년부터 추진된 서부대개발 등에 의해 급속하게 경제가 성장했다. 하지만 위구르족들은 정작 이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은 도시에 거주하는 한족이고, 위구르족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면서 빈곤한 하층민을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루무치의 위구르 청년 실업은 한족의 다섯 배에 달하고 있다.

신장 지역은 석유와 천연가스 등의 매장량이 중국에서 가장 많은 자원의 보고로서 중국 정부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특히 중국의 가장 큰 천연가스 산출 지역으로서 이곳의 천연가스는 가스관을 통하여 중국 중심지 상하이로 수송되고 있다. 이 점에서도 위구르인들은 자신들의 자원이 ‘약탈’되고 있다고 간주한다.

결국, 이번에 발생한 시위 사태는 종교와 민족의 문제가 심층적으로 축적되어 있는 상황에서 위구르인들의 상대적 빈곤에 의한 박탈감과 민족의 정체성 및 해체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해진 가운데 명백한 차별 조치가 도화선으로 작용해 터져 나온 필연적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중국 정부가 ‘동투(東突)’라 칭하는 동투르크스탄 독립운동은 원래 범(汎)이슬람주의와 범(汎)투르크스탄이즘(돌궐주의) 영향 하에서 발생했다. 범이슬람주의는 모든 이슬람 국가들이 연합해 통일된 이슬람 정치 체제를 건설하자는 주장이다. 범돌궐주의운동은 돌궐어족에 속하는 모든 민족 즉, 터키, 우즈베키스탄, 위구르, 투르크멘스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타타르, 키르기즈스탄 등이 연합해 대(大)투르크 국가를 건설하자는 운동이다. 이들이 지향하는 통일된 조국이란 중국의 천산(天山)부터 터키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 즉 ‘투란(Turan)’이다. 구 소련 영토였던 중앙아시아를 서투르크스탄이라 부르고, 중국의 신장은 동투르크스탄이라 불린다.

앞서 거론했던 것처럼 일찍이 1933년에 동투르크스탄 독립 운동 세력은 신장 지역에 ‘동투르크스탄 회교공화국’을 건설한 바 있다. 당시 비록 3개월밖에 유지되지 못했지만, 이러한 역사적 존재는 마치 우리의 ‘고구려’처럼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지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런데 ‘대약진 운동’으로 인해 기근과 아사가 잇따르던 1962년 당시 이닝(伊寧) 시가 민중 반란으로 혼란스러워지자,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던 소련은 주이닝 영사관에서 이닝 시민들에게 대규모적인 비자 발급과 국경 개방을 허용했다. 많은 위구르인이 이때 소련으로 탈출했다. 이들 대부분은 ‘동투르크스탄 이슬람운동’의 주축 세력이었다. 따라서 현재 중앙아시아에서 활동 중인 신장의 독립 운동 세력은 이들의 후예인 셈이다.

해마다 터져 나오는 독립에의 외침

▲ 7월8일 호주 시드니 주재 중국영사관 앞에서 위구르 교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현재 해외에서 활동 중인 이들 ‘동투’ 단체는 모두 50여 개로 알려지고 있다. 주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존재하는데, 보통 몇 명의 위구르인들이 모여 하나의 조직을 결성한다. 작은 조직은 집회를 하거나 선전물을 살포하거나 또는 신장 지역에서 군사훈련을 하면서 무장 투쟁을 펼치고 있다. 대규모 조직은 미주와 유럽에서 신장의 독립을 요구하는 집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중국측 통계에 따르면, 이 ‘동투’ 조직은 최근 10년간 신장 지역에서 2백건에 가까운 테러 사건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상자가 7백명에 달한다. 특히 이 중 ‘동투르크스탄 이슬람운동’ 조직은 이슬람근본주의를 신봉하면서 빈 라덴의 알 카에다 캠프에서 훈련을 받고 여러 차례에 걸쳐 테러 폭발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은 옛 소련이 해체된 이후 중앙아시아 각국에 침투해 여러 차례 테러를 감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알 카에다와의 관련성 때문에 이 조직은 중국과 미국에서 불법 테러조직으로 규정되어 있다.

티베트 문제와 함께 위구르 문제는 민족과 종교가 결합되어 있는 복합적인 문제이다. 고대 십자군 전쟁부터 현재의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의 세계 역사가 여실히 증명하듯이 종교와 결합된 민족 문제는 결코 강제적으로 ‘통합’되고 은폐될 수 없는 문제이다. 특히 위구르 문제는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티베트와 달리 이들 주위에 이슬람교와 ‘돌궐’ 민족의 주변국이 켜켜이 포진하고 있다는 데서 해결이 더 어렵고 폭발력이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들이 다른 이슬람근본주의 조직과 연결되어 더욱 강력한 무장 투쟁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향후 신장 위구르 문제는 갈수록 첨예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중국의 ‘보도(寶島·보물섬)’로 칭해지는 타이완도 결코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2006년 2월16일자 ‘자유시보(自由時報)’의 타이완 독립에 관한 여론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35.4%가 독립을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11.8%는 통일, 현상 유지는 38.2%로 나타났다. 또, 타이완 국책원이 2006년 2월15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51%가 타이완이 최종적으로 반드시 중국과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78%의 응답자는 타이완의 앞날은 마땅히 타이완인들이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런 결과로 보면, 중국 대륙과의 통일에 대한 타이완인들의 ‘열망’은 중국 대륙의 ‘희망’에 비해 현저히 낮다. 최소한 중국 대륙에 ‘항복하는 방식’의 통일에 대한 타이완인들의 결사반대 의지는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미국과 더불어 G2 초강대국으로 떠오르면서 세계 무대에서 막강한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갈수록 내부의 균열은 심화되고 있고, 원심력은 확대되고 있다. 중국은 과연 어떤 해결책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지금 세계인들은 중국을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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