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종 세트’는 기본, ‘8종 세트’까지… ‘스펙 강박증’에 시달리는 취업 준비생들
  • 이경희 인턴기자 ()
  • 승인 2009.11.10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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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직 경쟁이 만든 신 풍속도 / 각종 자격증과 입상 경력 쌓기 등에 열 올리는 대학생들 많아

ⓒ시사저널 박은숙


하반기 취업 시즌도 이제 후반전이다. 취업 준비생이 선호하는 대기업 공채는 마무리되고 있어 구직자 사이에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배유리씨(24·고려대)는 일명 ‘낙바생’이다. 낙바생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듯 아주 어렵게 취업에 성공한 사람을 일컫는 은어이다. 올해 삼성전자에 취업한 배씨는 시쳇말로 스펙이 ‘쩐다(탁월하다)’. 명문대 출신이고 학점과 토익 점수가 높아, 이른바 ‘취업 3종 세트(학벌·학점·토익)’를 두루 갖추고 있다. 미국 교환학생을 다녀왔고 6개월 인턴 경험도 있다. 삼성전자가 주최하는 공모전에 입상한 경력까지 있으니 주요 스펙들은 모두 갖춘 셈이다. 배씨는 “스펙을 갖추고자 대학 생활을 보내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대학생으로서 삶을 즐기면서도 자기 발전에 끊임없이 투자한 것이 취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반면, 김지훈씨(가명·26)는 ‘장미족(장기간 미취업 졸업생을 일컫는 말)’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올해 회사 30곳에 이력서를 넣었으나 면접은 딱 한 차례 보았다. 김씨는 졸업을 늦출 계획이다. 졸업 후 오랫동안 취업하지 못한 선배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지방에 있는 한 대학에서 건축과 토목을 복수 전공했다. 학점을 관리했고, 어학연수도 다녀왔다. 토익 점수는 8백90점이다. 나쁘지 않은 편이나 9백점은 넘어야 안심할 수 있을 듯해 한 달에 한 번씩 토익 시험을 보고 있다.

그가 매달린 것은 자격증이었다. 3학년 때는 주로 CAD(컴퓨터 이용 설계), 정보처리, MOS(마이크로소프트 응용프로그램 전문가 자격증) 같은 컴퓨터 자격증을 취득했다. 4학년 때는 토목 기사와 건축 기사 자격증을 땄다. 김씨는 “지방 대학에 다니는 학생일수록 불안한 마음에 자격증을 되도록 많이 따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취업 포털사이트 인크루트가 전국 대학 4학년생 6백1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공 공부와 학점 관리’ ‘자격증 취득’ 항목에서 서울 지역 학생들과 비교해 지방대생은 각각 13.7% 포인트, 13.3% 포인트가 높았다.

서류전형 통과에 ‘필수’…해외 봉사 등 경험 쌓아 장점으로 부각시키기도

▲ 지난 9월17일 서울 대치동 무역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2009 대한민국 취업박람회’ 전시장에서 한 취업 지망생이 구인 게시판을 들여다보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구직자 열에 아홉은 ‘스펙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취업이 어려워진 탓에 구직자들은 더 나은 스펙을 가지려고 애쓴다. 서류전형에 통과하기 위해 ‘취업 3종 세트’에 ‘5종 세트(인턴·봉사 활동·공모전·자격증·아르바이트)’까지 갖추려는 구직자가 늘고 있다. 취업에 사용되는 스펙만 8가지가 넘는 셈이다. 그러나 스펙의 종류를 많이 확보했다고 반드시 유리하지는 않다. 이력서에 적어넣을 스펙의 종류를 늘리는 것보다 자기소개서나 면접에서 충분히 자신을 드러낼 만한 장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대학 시절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김관씨(27·성균관대)는 “나는 경험과 학점을 바꿨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해외 봉사 활동을 통해 아프리카, 베트남, 우즈베키스탄을 다녀왔다. 오지에서 도전과 인내를 배웠다. 그 밖에도 언론사에서 학생기자, 객원기자, 인턴기자를 지냈다. 한 남성 패션 잡지에서는 온라인 에디터도 했다. 친구와 함께 조그마한 이벤트 회사를 차려 포털사이트 네이트닷컴이 주최하는 홍보 이벤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경험이 무기이다. 자기 경험을 자기소개서와 면접에서 밝혀 다른 구직자와 차별화하고 있다. 차별화 전략은 중요하다. 현대·기아차그룹 인사 담당자는 “합격 기준을 명확히 밝히지 않는 것은 ‘획일성’ 탓이다. 어떤 점을 중시한다고 발표하면 지원자 대부분이 획일화된 스펙과 자기소개서를 제출한다”라고 말했다. 대기업 채용 담당자들은 자기 개성을 차별화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선발 기준이 명확치 않다 보니 구직자 사이에 스펙 열풍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구직자들이 불합격 사유를 스펙 부족에서 찾는 탓이다. 그러다 보니 ‘최고 스펙은 남자’ ‘학교 간판이 최고’라는 ‘카더라’ 식 소문만 무성하다. 

상황이 이런 만큼 대학생은 연중무휴이다. 명절, 휴일, 방학 가리지 않고 도서관은 학생들로 넘쳐난다. 희소성이 있는 자격증을 따려고 더 어려운 시험에 도전하기도 한다. 이승길씨(25·동국대)는 “금융 3종 세트(증권투자상담사, 증권FP(은행FP·보험FP), 선물거래상담사)는 금융사에 입사하기 위한 필수 자격증이었지만 지금은 별로 알아주지 않는 분위기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요즘에는 CFP(국제공인 재무설계사), AFPK(국내공인 재무설계사), FRM(재무위험관리사)을 준비하는 구직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력서에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내용을 채워넣고자 취미와 특기도 적극적으로 ‘개발’한다. 정은혜씨(25·경희대)는 “취미와 특기가 없어 고민하던 친구들은 그것들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주변에 제과·제빵 자격증을 따거나 검도를 배워 요리와 운동을 장점으로 내세우는 이들도 있다”라고 말했다. 국토대장정 같은 험난한 체험들이 스펙을 위한 도전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박카스 국토대장정’을 시작으로 ‘20세상 청년국토대장정’ ‘새생명 국토대장정’ 등 갖가지 기업과 단체가 여름에 진행하는 국토대장정 행사가 10여 개에 이른다. 대학생들이 스펙의 일환으로 이런 특별한 경험들을 선호하다 보니 참가자의 수에 따라 그 종류도 함께 늘어났다.

구직자 다수가 겪는 ‘스펙 강박증’은 기본에 특별함을 더해야만 취업문을 뚫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새 자격증과 경험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구직자들은 매번 새 도전을 ‘강박적’으로 해야 한다. 20대에 자발적으로 해야 할 경험들이 취업을 위해 의무로 소비되는 것이 이 시대 대학생들의 슬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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