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축구 스러진 자리 동북아 축구가 일어선다
  • 한준희 | KBS 축구해설위원 ()
  • 승인 2009.12.0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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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본선 진출한 중동 국가 없어…잦은 감독 교체 등이 문제

▲ 11월14일 바레인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뉴질랜드에 패해 월드컵이 좌절된 직후 울먹이고 있다. ⓒAP통신

아시아 바깥 세계 축구팬들의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는 아시아 축구의 ‘한 장면’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물론 그 답은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 북한이 축구 명가 이탈리아를 집으로 돌려보내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일, 혹은 2002 한·일월드컵에서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던 한국 대표팀의 붉은 함성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팀 단위의 성공이 아니라 경기 중 발생했던 하나의 순간을 꼽자면 아마도 1994년 미국월드컵 때 사우디아라비아와 벨기에의 대결에서 터져나온 사이드 알 오와이란의 이른바 ‘마라도나 골’일 것이다. 오와이란은 이 경기에서 중앙선에서부터 골키퍼를 포함해 벨기에 수비수 다섯 명을 제치고 골을 넣었다. 이 때문에 오와이란은 ‘아랍의 마라도나’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의 골은 FIFA 팬 투표에 의해 선정된 ‘세기의 골’ 6위에 오르기도 했다. 1994년 사우디아라비아는 오와이란의 매직 골에 힘입어 16강까지 올랐는데, 이는 아시아 국가로는 북한(1966년 8강)에 이어 두 번째로 조별 리그를 통과한 기록이다.

오와이란의 기념비적인 골이 아니더라도 아시아 현대 축구를 논할 때 중동 축구를 제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실제로 중동 축구는 19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던 이란을 시작으로 1982년 쿠웨이트, 1986년 이라크, 1990년 아랍에미리트, 1994년 사우디아라비아, 1998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2002년 사우디아라비아, 2006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에 이르기까지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월드컵 본선에 적어도 한 팀 이상을 올려놓았다. 동북아의 일본이 1998년에 이르러서야 처음 월드컵 본선행을 이루기 시작했고, 중국은 2002년 단 한 차례 본선 진출에 그쳤던 것을 감안하면 중동 축구의 꾸준한 강세를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2010 남아공월드컵 본선 진출국 명단에서는 중동 국가의 이름을 단 한 개도 발견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동의 ‘마지막 희망’ 바레인마저 뉴질랜드와 벌인 아시아-오세아니아 플레이오프에서 패퇴함에 따라 이번 월드컵은 마침내 ‘중동 국가 없는 월드컵’으로 치러지게 되었다. 반면, 동북아의 한국, 북한, 일본은 호주와 더불어 월드컵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는 아시아 축구의 흐름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중동 축구의 하락세를 가져온 원인을 꼽을 때 첫 번째로 지적될 만한 것은 역시 그들의 ‘잦은 감독 교체’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독일월드컵이 열리기 몇 개월 전 가브리엘 칼데론을 경질한 이래 2006년부터 지금까지 마르코스 파케타, 엘리우 도스 안조스, 나세르 알 조하르, 조세 페세이로에 이르는 감독 네 명을 맞아들였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더불어 중동의 ‘양대 산맥’을 자임해 온 이란도 사정이 비슷하다. 이란은 2006 독일월드컵을 브랑코 이반코비치의 지휘 하에 치렀으나 이후 아미르 갈레노에이, 만수르 에브라힘자데(임시), 알리 다에이, 에리히 루트묄러(임시), 마옐리 코한을 거쳐 지금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아프신 고트비가 지휘봉을 잡고 있다. 이들 중에는 심지어 공식 경기를 전혀 치르지 않은 감독도 있다.

중동, 클럽 축구에서도 쇠퇴 조짐

▲ 북한 축구 대표팀의 홍영조 선수(위 왼쪽)는 국외파 선수로서 경험과 실력을 두루 갖추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이것은 한국, 북한, 일본 등 동북아 국가들의 상대적 안정성과 비교할 때 중동의 강호들이 매우 불안정한 지휘 체제에서 월드컵 예선을 치러왔음을 의미한다. 감독 교체의 상당 부분이 성적 부진에 따라 이루어진 경우들이라고 하더라도, 중동 축구의 근본적 문제는 감독에 대한 존중과 신뢰가 지나치게 부족한 문화가 형성되어온 데에 있다. 선수 구성 자체가 워낙 괜찮은 시기에는 이러한 문화적 약점이 덜 부각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시기라면 감독을 ‘밥 먹듯 갈아치우는’ 문화는 성공보다 실패를 가져오는 경우가 훨씬 많은 법이다. 이번 월드컵 예선 결과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중동 축구가 동북아에 뒤떨어진 원인은 ‘오일 머니’가 가져다 준 안락함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수한 중동 선수들은 굳이 중동 지역을 벗어나지 않아도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리그 등에서 매우 높은 연봉을 받는 갑부들이다. 이란 출신 선수들을 제외하면 자신의 잠재력을 해외 리그로 나아가 담금질하는 중동 선수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반면,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은 한국은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박주영(모나코), 이청용(볼턴), 이영표(알 힐랄), 설기현(풀럼), 김동진(제니트), 조원희(위건), 차두리(프라이부르크), 이정수(교토상가), 이근호(주빌로) 등에 예비 해외파 기성용(셀틱 입단 예정)까지,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광범위한 해외파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 대표팀에도 하세베(볼프스부르크), 모리모토(카타니아), 이나모토(렌), 마쓰이(그레노블), 혼다(VVV), 나카무라 순스케(에스파뇰) 등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포진한다.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켠 북한에도 이제 홍영조(로스토크), 안영학(수원), 정대세(가와사키 프론탈레)에다 중국 리그에서 뛰는 국외파 선수들이 있다. 결국, 중동이 ‘오일 머니’에 휩싸여 제자리걸음 내지 퇴보를 하는 동안 동북아 축구의 경험치와 경쟁력은 날로 증가하고 있는 셈이다. 동북아 최고의 폐쇄성을 고수하던 북한 축구마저도 이제는 좀 더 넓은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 대표팀은 최근 들어 유럽과 남아공 전지 훈련을 포함해, 해외 팀과의 평가전을 다섯 차례 치렀다. A매치에서뿐 아니라 클럽 축구에서도 중동은 동북아에 밀리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2000년대 초·중반 알 이티하드를 필두로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 초강세를 드러내온 중동 축구는 2006년 전북, 2007년 우라와 레즈, 2008년 감바 오사카에 이어 2009년에는 포항에 우승 트로피를 내줌으로써 역대 우승 팀 명단에서 사라져버렸다. 특히 올 시즌 K리그의 포항이 중동의 맹주격인 알 이티하드를 침몰시킨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 이는 ‘오일 머니’로 만들어낼 수 있는 팀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음을 증명한 것에 다름 아니며, 상대적으로 동북아 클럽들의 축구가 전술, 조직, 리그 시스템 등의 측면에서 앞서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호주 클럽, 우즈베키스탄 클럽 등까지 간간이 경쟁에 뛰어드는 모습이 펼쳐지면서 이래저래 중동 축구는 시련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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