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정권 들어선 뒤 다시 커지는 ‘그들’ 목소리
  • 이경희 인턴기자 ()
  • 승인 2009.12.15 17:3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해 ‘촛불 정국’ 계기로 운동권 후보의 강세 이어져…등록금 투쟁 ‘강경’ 주문 등 학내 상황도 반영

▲ 지난 4월2일 대학로에서 전국등록금네트워크 주최로 열린 ‘등록금 인하 촉구 범국민 대회’에서 대학생들이 등록금 인하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3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1996년 8월 ‘연세대 사태(범민족대회에 대한 정부의 강경 진압 사태)’와 1997년 5월 한양대에서 벌어진 이석씨 치사 사건으로 치명타를 맞았다. 한총련이 국가보안법상 이적 단체로 규정되면서 공안 정국이 조성되었고, 이씨 치사 사건으로 도덕적 문제의식까지 제기되면서 학생들은 시나브로 단체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한때 2백개 대학이 가입하며 전국적인 조직력을 자랑하던 한총련은 이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1990년대만 해도 대학 총학생회(총학) 선거에서는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 때나 듣던 ‘NL(민족해방)’ 계열이냐, ‘PD(민중민주)’ 계열이냐를 따지곤 했다. 사회 변혁을 어떤 방식으로 이룰 것인지는 주요 논쟁거리 중 하나였고 ‘사투(사상 투쟁)’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총학은 더 이상 어떤 방식으로 사회 변혁을 이룰 것인지 말하지 않는다. 이제는 ‘학생 운동 한다’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비운동권이 총학을 장악한 뒤로 이미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서울대는 2000년부터 비운동권 총학이 들어섰다. 이후 고려대, 한양대, 성균관대 등 전통적으로 운동권이 강세였던 대학에서도 비운동권 총학이 대세처럼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대학에서 이제 운동권은 사라졌을까. 아니다. 규모가 큰 총학생회보다는 단과대학 단위에 집중하거나 자치회 단위 활동에 힘을 쏟곤 했다. 성균관대 졸업생 권준현씨(27)는 “총학은 비운동권이 강세였지만 학교에서 ‘노동문제연구회’ 같은 자치회 등이 총학보다 등록금 문제 등에 더욱 목소리를 크게 냈다”라고 말했다. 

잠자고 있던 운동권 총학은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기지개를 켰다. 지난해 촛불 정국이 그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는 등록금 투쟁을 강하게 펼칠 필요성과 비운동권 학생회에 대한 실망이 조금씩 늘어가는 시대적 상황도 반영되었다.

올해 총학 선거 결과를 지난해와 비교해보면 급격한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운동권 후보의 반격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운동권의 강세라고 딱히 규정하기도 어렵다. 운동권 후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선명성을 감추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구분이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는 현상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임민지 울산대신문 편집국장(21)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민주노동당 계열의 총학생회가 당선되었다. 하지만 학우들도 복지에 얼마나 신경 쓰느냐를 고려할 뿐 운동권인지 아닌지에 대해 예전보다 덜 민감해한다”라고 말했다. 올해 울산대에서 당선된 후보측은 등록금 상한제와 함께 지역고용할당제(울산 내에서 울산대 출신이 취업이 가능하도록 일정 부분 보장해주는 제도) 도입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운동권·비운동권 구분 모호해져 ‘정체성 혼란’ 겪기도

역으로 비운동권이 비운동권임을 내세우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전북대에서는 지난 2년간 비운동권이 당선되었지만, 이번 선거 기간에는 비운동권이라는 호칭을 아예 뺐다. 장예슬 전북대 학보사 기자(20)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등 사회적 사안에 대해서 전북대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총학생회가 혼란을 겪은 경험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올해 경희대 총학회장에 당선된 유승현씨(24) 역시 ‘운동권 대 비운동권’ 프레임에 동의하지 않는다. 유씨는 “총학은 학우들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만약 투쟁이 필요하면 할 수도 있는 것이지, 운동권 총학은 하고 비운동권 총학은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말했다. ‘총학은 학생들을 위한 곳이 되어야 한다’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처럼 대학 총학생회 선거에서 후보들이 정치적인 지향을 뚜렷하게 내세우지 않자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 아니냐”라는 비판이 나온다. 반면, 시대가 요구하는 학생회상이 변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대에 다니는 박세웅씨(24)는 “운동권-비운동권으로 구분하기보다는 어떤 공약이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한지 그리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가 지지 후보를 결정하는 잣대이다”라고 말했다.

실제 변화 움직임이 눈에 띈다. 올해 서울지역 총학 선거에서는 ‘아름다운 재단’과 연계한 사회 공헌 활동 등 사회적인 활동에 참여하겠다고 공약을 내세운 비운동권 후보와 건물에 매점을 설치하고 오토바이 도난을 방지하는 CCTV를 설치하겠다는 운동권 후보가 공존하기도 했다. 오히려 서로의 고질적인 약점을 메우며 접점을 찾는 모양새이다. 그나마 선명성을 뚜렷하게 드러낸 곳으로는 중앙대가 눈에 띈다. 올해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임지혜씨(23)는 “학생회는 서비스하는 곳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자신을 운동권이라고 소개했다. 이는 학내 문제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중앙대는 지난해 두산그룹에 인수되면서 적지 않게 내홍을 겪고 있다. 100% 상대 평가로 바꾼 학사 제도에 대한 불만 등이 그것이다. 임씨는 “최대한 노력해보고 안 되면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운동권이다”라는 소신을 밝혔다.

하지만 중앙대와 마찬가지로 운동권 후보 당선 대학으로 분류된 경희대가 스스로 “운동권이냐, 아니냐의 구분에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밝히는 것처럼, 실제 외부에서는 운동권 당선 대학으로 분류했더라도 막상 대학 내에서 느껴지는 온도는 또 다르다.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향후에는 ‘운동권이냐, 비운동권이냐’ 하는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을 듯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