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보다 문화로 명맥 잇는 유럽 기독교
  • 조명진 | 유럽연합집행이사회 안보자문역 ()
  • 승인 2010.04.20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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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의 동성애·아동 성추행 등 일탈 원인, 교황청의 역사에서 엿볼 수 있어

313년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으로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로 지금까지 약 1천7백년간 기독교는 유럽인들의 삶의 푯대로서, 그리고 문화의 구심점으로서 역할을 해왔다. 초기 기독교의 수장인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 중 수제자인 성 베드로(St. Peter)를 1대 교황으로 해서 2백56번째 교황인 지금의 베데딕토 16세에 이르고 있다. 역대 교황은 1929년 라테란 조약(Lateran Treaty)이 체결될 때까지, 황제와 유럽 각국의 왕들 위에 군림할 정도로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했었다.

▲ 4월4일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부활절 미사를 올리고 있다. ⓒAP뉴스

르네상스는 중세 시대까지 이어진 기독교 중심의 생활을 인간 중심의 생활로 옮겨놓았다. 계몽주의자들은 이러한 인본주의를 ‘Progress(발전 또는 진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그 해석은 신본주의적 견지에서 보면 세속적인 것이다. 그리스의 고전을 다시 탐독하는 문예 부흥 운동인 르네상스는 개인주의 사상을 담고 있어 마키아벨리가 1513년에 쓴 <군주론(The Prince)>에서 보듯이 인간의 권력에 대한 탐욕을 정당화했다. 결국, 이러한 사조는 기독교계마저 세속화하는 데 일조했다.

돈을 주고 표를 사듯이, 돈을 내면 구원을 받는 ‘면죄부’ 판매로 교회의 부패가 정도를 넘어서자, ‘종교 개혁자들(Reformers)’이라 불리는 깨어 있는 양심의 성직자들은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침묵하지 않았다. 1517년 마틴 루터는 95개조의 반박문을 공표하며 그 당시 기독교의 문제인 ‘면죄부’에 대해서 비판했고, 이것은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메디치 가문 출신인 로렌쪼 디 메디치의 둘째아들로서, 세속적인 교황은 루터의 성직을 박탈했다. 당시 세속화된 로마 교황청은 강력한 통치 기반을 확보한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보다는 분열된 독일에서 더 많은 재정적 착취를 자행했다.

▲ 교황이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제단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AP뉴스

종교 개혁은 순탄치 않았다. 기존 가톨릭(구교)과 프로테스탄트(신교)는 오랜 기간 충돌했고, 혁명을 일으키거나 전쟁까지 치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의 위그노 교도들(Huguenots)과 구교 간의 전쟁인 위그노 전쟁과 영국의 청교도들(Puritans)이 일으킨 청교도 혁명이다. 프랑스의 위그노 교도들(프랑스의 칼빈주의 프로테스탄트)은 메디치 가문 출신의 왕비 까뜨린느 디 메디치(Catherine di Medici)의 박해를 받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1570년대에 스위스, 네덜란드, 독일 등지로 피신했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영국의 왕 제임스 1세 통치하에 박해를 피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떠나 그곳에 정착했다.

그러고 보면, 종교 개혁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개혁에 반대한 세력은 금권에 의해서 권력을 잡은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 덕에 화려한 르네상스가 펼쳐진 것도 사실이지만, 세속적인 메디치 가에서 배출된 교황과 왕비는 종교를 인간 중심의 권력을 행사하는 도구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한편, 유럽에서 기독교의 문화적 기여는 건축 그리고 그림 및 조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유럽의 3대 성당인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 독일 쾰른 대성당, 런던 세인트폴 성당에서 보듯이, 유럽의 도시마다 성당이나 교회가 자리 잡고 있고, 그곳이 바로 지역 사회의 중심으로 광장을 형성했다. 그리고 성당 내부는 성경을 테마로 한 그림과 조각들로 채워졌다. 대표적인 예가 미켈란젤로(1475~1564)가 시스티나 예배당(Sistine Chapel)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The Last Judgement)>이다. 이 그림은 메디치 가 출신 교황인 클레멘트 7세(Clement VII)의 의뢰에 의한 것이었다.

동시에 왕실과 함께 교회는 음악 발달에도 기여했다. 궁중 음악과 함께 종교 음악으로서 지금의 서양 음악의 두 갈래를 차지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헨델은 1710년 하노버 왕가 조지 공의 음악 책임자가 되었는데, 조지 공은 1714년에 영국 왕 조지 1세로 등극했다. 헨델의 대표적인 교회 음악으로는 1741년 런던에서 작곡한 <메시아(Messiah)>가 있다. 바흐는 1747년 프리드리히 대제를 위한 곡으로 <The Musical Offering>을 증정했고, 라이프치히에서 1727년 작곡한 고전 교회 음악의 대작으로 꼽히는 <St. Matthew Passion>을 비롯한 많은 종교 음악을 남겼다.

볼프강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던 잘츠부르크의 궁중음악 책임자였고, 그의 아들 모차르트가 작곡한 6백여 곡 중에는 수없이 많은 종교 음악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에서 1791년 비엔나 근교의 휴양지인 바덴에서 작곡한 곡 <Ave verum corpus, K.618>은 그곳 교회의 성가대를 위해 작곡한 곡이다. 베토벤은 1796년 베를린을 방문하던 중에 빌헬름 2세를 위해 첼로 소나타 두 곡 <Cello Sonata No. 1, No.2 Opus 5>를 선사했고, 자신의 교회 음악곡 중 하나인 <Christ on the Mount of Olives>를 1803년에 작곡했다.

가톨릭(구교), 프로테스탄트(신교) 그리고 유대교의 공통점은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30년 전쟁에서는 유럽 가톨릭 국가와 프로테스탄트 국가 간에 총칼을 겨누고 싸웠고, 2차 대전에서 기독교도들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이런 전쟁들을 볼 때 종교는 인간에게 명분이고 구실이었지,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참된 신앙이 아니었다.

신앙의 내용은 없고 형식만 존재하는 경우 많아

종교의 본질이 퇴색되는 것은 인본주의로 흘러갈 때이다. 신앙으로서의 종교의 모습은 조물주에 대한 피조물의 숭배이다. 하지만 현대 개인적 자유주의는 피조물을 위해 존재하는 조물주로 종교를 문화와 전통으로 전락시켰다. 절대자의 위치를 인간의 편의에 맞추는 양상이다.

르네상스 이후 기독교의 타락을 초래한 인본주의처럼, 21세기 유럽의 비뚤어진 성(性) 풍조는 성경이 죄악시하는 동성애와 로마 제국 말기의 현상인 아동 성추행이 성직자에 의해 자행될 정도로 도덕적 타락상을 보이고 있다. 바로 영국 성공회와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가 여기에 해당되며 비난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중세 종교 개혁자들처럼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징계 조치로 맞서는 성직자들이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유럽에서 종교로서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성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이 서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공휴일로 자리 잡고 있는 사실에서 보듯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즉 신앙의 내용은 없고 형식만 존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제 유럽의 기독교는 일부에게만 종교로 남아 있을 뿐, 대다수의 유럽인에게 문화와 전통으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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