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부양 위해 성매매 나선 두 여성의 집창촌 생활
  • 한수연 인턴기자 ()
  • 승인 2011.05.2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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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가 성매매 여성을 인터뷰하고 있다(등돌린 사람 중 왼쪽이 손연주씨, 오른쪽이 이혜선씨). ⓒ시사저널 임준선
서울 출신인 손연주씨(가명·29)는 지난 2008년부터 성매매를 시작했다. 손씨의 부모는 그녀가 어릴 때에 이혼했다. 세 살 위 오빠가 있었지만 가출해 행방이 묘연했다. 손씨의 아버지도 집을 나갔고, 결국 손씨 혼자 남게 되었다. 그때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한창 학교에 다닐 나이이지만 손씨는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중국집에서 배달도 하고, 국수도 삶았다. 집에서 지낼 형편이 안 되어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간경화를 앓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집을 나간 후 소식이 없던 오빠가 나타났다. 오빠는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손씨 남매는 아버지의 3일장을 치르고 친엄마를 찾아갔다. 그런데 엄마는 혼자가 아니었다. 배 다른 동생과 함께였다. 엄마는 한눈에 보아도 병색이 완연했다. 그는 “당시 단백뇨 수치가 3천(0~30mg이 정상)이 넘었다. 어릴 적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깡마른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엄마는 몸이 심하게 부어 살짝 찌르기만 해도 터져나갈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이복동생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이후 병원비와 생활비는 고스란히 손씨의 몫이 되었다. 그때부터 성매매 업소에서 일을 했다. 집에는 친구네 집에서 지낸다고 거짓말을 했다.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숙식하며 일하는 오빠는 100만원이 조금 안 되는 월급을 받는다. 그 돈으로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진 빚을 갚아나가고 있다.

손씨와 친자매처럼 지내는 이혜선씨(가명·33)의 사정도 비슷하다. 광주광역시 출신인 이씨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동생 셋을 부양해야 했다. 등록금과 수업료를 감당할 수 없어 다니던 고등학교도 중퇴했다. 편의점, 호프집, 클럽 등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루 24시간 동안 2시간만 자면서 투 잡, 쓰리 잡을 뛰었다. 그러다 지인의 도움으로 회사 경리 일을 시작했다. 월급 70만원은 방세와 공과금을 내기에도 빠듯했다. 동생들 학비, 할머니 병원비에 턱없이 모자랐다. 10년 가까이 일을 했지만 빚만 잔뜩 쌓였다.

이씨의 할머니는 지금 심장혈관이 막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런데도 병원비가 없어 수술이 계속 미루어지고 있다. 이씨는 “나중에 돈 벌면 영어 공부도 하고 싶고, 운동도 하며 일반인이 사는 것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 꿈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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