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창촌 폐쇄해도 “다시 성매매 한다”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1.05.29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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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의 집창촌 모습. ⓒ시사저널 윤성호

서울 영등포 지역 집창촌 폐쇄를 둘러싼 성매매 업소 여성들의 집단 시위로 집창촌 업주와 여성들의 문제가 새삼 이목을 끌고 있다. <시사저널>은 집창촌 운영과 이를 통한 성매매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언론사로는 최초로 집창촌 내 업주와 성매매 여성들을 대상으로 직접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성매매 업주와 여성들은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된 이후 집창촌 여성들의 생존권이 크게 위협받고 있으며, 음성적인 성매매 업소가 더 늘어났다고 답변했다.

▲ 서울 강동구 천호동의 집창촌. ⓒ시사저널 윤성호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4가 집창촌 일대는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지난 4월부터 경찰이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가자 성매매 업주와 여성들이 반발하며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각 업소의 유리문 앞에는 단속에 항의하는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집창촌 입구는 경찰 순찰차가 가로막고 있다. 경찰은 일회성 단속이 아니라 아예 이 지역의 집창촌을 와해시킬 방침이다. 관할 영등포경찰서는 성매매 업주와 건물주에게 3월 말까지 영업장을 폐쇄하겠다고 통보했다. 불법 영업을 계속하면 업주뿐만 아니라 건물주까지 입건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4월1일부터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갔다. 영등포역과 인접해 있던 신길동 텍사스촌의 경우 1997년 9월 검찰이 45개 업소 전부를 강제 폐쇄한 전례가 있다.

성매매 업소의 업주들과 여성들은 여기에 강력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생존권 보장’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처음에는 영등포 집창촌 업주와 성매매 여성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서울 지역은 물론 전국의 집창촌 업주와 성매매 여성들이 가세하고 있다. 경찰의 ‘집창촌 폐쇄’가 특정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강현준 한터전국연합 대표는 “우리는 더 이상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경찰이 단속을 중단하든지 아니면 우리가 죽든지 할 것이다”라며 끝장 투쟁을 선언했다.

영등포 집창촌 업주와 여성들은 최소한의 이주 또는 취업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먹고살 대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6개월 이상의 유예 기간을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집창촌을 떠나지 않겠다며 배수진을 치고 있다. 한터전국연합은 경찰이 단속에 나선 배후로 집창촌 인근에 있는 타임스퀘어와 신세계백화점을 지목하고 있다. 경찰이나 이 지역 국회의원이 대기업의 사주를 받고 자신들을 몰아내려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경찰이나 신세계백화점 등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라고 일축한다.

현재 영등포경찰서와 관계 당국은 집창촌과의 “어떠한 협상이나 타협은 없다”라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양측이 팽팽히 맞서면서 자칫 대형 사고가 날 우려까지 낳고 있다. 일부 성매매 여성들은 몸에 시너와 휘발유를 붓고 분신도 불사할 태세이다. 지금 영등포에서는 아주 위험한 ‘성전(性戰)’이 펼쳐지고 있다.

<시사저널>은 집창촌 운영과 성매매 실상을 성매매 현장에서 알아보기로 했다. 이를 위해 언론사로는 처음으로 집창촌 업주와 성매매 여성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는 5월19일과 20일 이틀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집창촌(영등포, 천호동, 미아리 텍사스촌)의 업소를 직접 방문해 업주들과 성매매 여성들을 만났다. 설문 내용은 업주와 성매매 여성을 각각 달리했으며, 총 3백69명(업주 92명, 성매매 여성 2백77명)이 응답했다. 복수 응답도 설문에 포함시켰다.

“정부의 재활 사업, 도움 안 된다” 87%

집창촌 업주와 성매매 여성들은 2004년 9월에 시행된 ‘성매매특별법’을 단속의 원흉으로 보고 있었다. 성매매특별법이 생기면서 단속이나 처벌 기준이 훨씬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매매 단속이 집창촌에 집중되면서 신·변종 성매매 업소나 유사 성매매 업소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부풀어 오르는 ‘풍선 효과’ 때문이다. 지난 7년간의 학습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성매매 여성들은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된 후 우리 사회의 성매매가 ‘증가했다’(47%)라고 보았다. ‘감소했다’는 25%에 불과했고, ‘변함없다’도 15%였다.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된 후 가장 큰 문제로는 집창촌 여성들의 생존권 위기, 음성적인 성매매 업소 증가, 해외 원정 성매매 증가, 장애인이나 외국인 노동자 등의 성 욕구 해소 불가능, 성매매 여성에 대한 질병 관리 부실 등의 순으로 꼽았다.

성매매 여성들은 또 성매매특별법에 대해서는 ‘폐지’(35%)보다는 ‘수정해야 한다’(41%)라고 보았다. ‘현행대로 유지해야 한다’라는 의견도 15%나 되었다. 이는 성매매특별법이 한계가 있지만 ‘보호 장치’라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된 후 ‘처벌받은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21%가 ‘있다’라고 대답했고, 77%는 ‘없다’라고 했다.

성매매특별법은 성매매 여성들에게 생존권의 위기를 가져왔다. 당장 수입이 급감했다. 전체 86%가 ‘크게 줄었다’라고 답변했다. 수입이 50% 이상 줄었다고 답한 여성들이 90%에 달했다.

집창촌을 폐쇄하면 그곳에 있던 여성들은 어디로 갈까. 10명 중 6명은 ‘성매매를 계속하겠다’라고 답변했다. 56%는 ‘다른 성매매 업소를 찾아 나서겠다’라고 했으며, 4%는 ‘해외 원정 성매매를 하겠다’라고 답변했다. 경찰의 단속과 성매매특별법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부는 성매매특별법을 시행하면서 성매매 여성들의 재활과 자립을 돕겠다는 당근을 제시했다. 하지만 성매매 업주와 여성들은 정부 재활 사업이 ‘빛 좋은 개살구’라며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해달라고 요구했다.

강현준 한터전국연합 대표는 “정부는 지금까지 약 1천억원을 성매매 여성 재활 기금으로 썼다. 이런 거금을 투입했는데 성매매 여성들이 얼마나 동참하고, 성공 사례가 몇 명인지를 묻고 싶다. 여성부에서 내놓은 보조금 40만원과 재활 프로그램은 실질적인 도움도 되지 않고 비현실적이다”라고 강조했다.

성매매 여성들의 시각도 그러했다. 정부의 재활 사업에 대해 ‘극히 형식적이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답변이 87%나 되었다. ‘재활에 도움이 된다’는 8%였다. 정부의 재활 사업에 대한 불신은 참여율을 떨어뜨렸다. 성매매 여성들 중 4%만 ‘참여한 적이 있다’라고 답했으며, 85%는 ‘참여한 적이 없다’라고 했다. ‘참여했다가 곧 그만두었다’라는 답변도 2%였다.

재활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는 한 성매매 여성은 재활 사업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일단 시설이 도심 외곽에 있다. 아침 6시 기상, 저녁 9시 취침,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외박이나 외출이 안 된다. 일요일 단 하루 외출이 허락되지만 그것도 몇 시간뿐이다. 급한 일이 있어서 어디 갈 때는 관계자를 대동해서 가야 한다. 흰 티에 청바지를 입어야 한다. 미용 기술이나 요리 같은 것을 배운다는데 급여는 41만원이다. 우리 나이에 그런 환경에서 그런 교육을 받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다. 여성가족부에서 한 번이라도 우리를 만나줄 줄 알았다. 진짜 여성을 생각한다면 직접 현장에 와서 우리와 대화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 달에 한 번 오기는 왔다. 검은 비닐봉지를 나누어줬다. 봉지를 열어보니 옛날에 학교 앞에서 팔던 아폴로나 무지개 같은 각종 불량 식품이 들어 있었다. 컵라면도 한 사람당 하나씩 줬는데, 유통 기한이 일주일 남은 것이었다. 면담 요청도 몇 번씩 했다. 그런데 묵살했다. 홈페이지도 닫아버렸다. 대화를 하고 싶다는 의사 표현을 하기 위해 홈페이지에 들어갔지만 닫혀 있었다.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 같았다”라고 토로했다.

성매매 여성들과 업주와의 관계는 어떨까. 이에 대해 63%가 ‘가족 같은 관계’라고 답변했으며, 32%는 ‘평등 관계’라고 했다. ‘종속 관계’라는 답변은 2%였다. 집창촌에서 성매매 여성들은 업주를 ‘삼촌’, 마담을 ‘이모’라고 부른다. 성매매 여성 대부분은 업주에게 ‘선불금’을 받지 않고 있었다. 7%만 선불금이 있다고 했고, 나머지 93%가 선불금이 없다고 답변했다. ‘최근 2년 이내에 감금이나 폭행, 임금 착취 등 부당 행위나 인권 유린을 당한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98%는 ‘없다’라고 했고, 2%는 ‘있다’라고 답변했다.

성매매 이유, “경제 사정 때문”이 가장 많아

집창촌에 있는 성매매 여성들의 생활은 어떠할까. 이들은 또 어떤 이유로 성매매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그녀들의 가슴속에 있는 이야기도 들어보았다.

‘집창촌에 언제 들어왔는가’라는 질문에 절반에 가까운 42%가 ‘1년 이내’라고 했다. ‘3년 이내’가 18%, ‘2년 이내’ 14%였고, 5년 이상이 15%였다. 이를 통해 성매매 여성들 상당수가 집창촌에 들어왔다가 얼마 있지 않아 다른 곳(성매매 업소 등)으로 옮겨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창촌에 들어오기 전의 직업은 ‘직장인’이 34%로 가장 많았고, ‘다른 곳에서 성매매를 했다’ 28%, ‘무직’ 23%, ‘학생’ 6% 순이었다. 그 밖에도 유흥업소에 종사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집창촌에 들어왔다는 답변도 있었다. 성매매 여성들이 성매매를 시작한 시기는 ‘20대’가 74%로 가장 많았다. 

성매매 여성들이 집창촌에 들어온 사연은 다양했다. 자신들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일이어서 평생의 한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장 컸다. 전체 성매매 여성의 50%가 말한 ‘성매매를 시작하게 된 이유’이다. 가난은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했다. 성매매 여성 중에 유독 소녀 가장 출신이 많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가족 부양’을 이유로 든 여성도 30%나 되었다.

영등포 집창촌의 한 여성은 “4월1일부터 지금까지 단돈 만원도 손에 못 쥐었다. 영업 자체를 못해서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애들이 대다수인데 집에 병원비나 학비도 보탤 수가 없다”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성매매 여성들은 자신들이 성매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변에 숨기고 있었다. 10명 중 7명이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르고 있다’라고 답변했다. 성매매 여성들의 최종 학력은 ‘고등학교 졸업’이 63%로 가장 많았다. 한 달 수입은 절반 이상이 ‘2백만~3백만원’을 번다고 했다. 수입 대부분은 ‘가족 부양’에 들어간다는 답변이 50%였다.

성매매 여성들의 생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출퇴근하는 여성이 많다는 것이다. ‘집에서 출퇴근 한다’라고 답한 여성이 49%나 되었다. ‘성매매 업소에서 숙식 해결’도 45%였다. 집창촌 여성들의 달라진 풍경이다.

성매매 여성들에게 ‘결혼’은 피하고 싶은 단어이다. 자신의 일 때문에 ‘자신감’이 없어서다. 그래서인지 미래 계획에 대해 ‘결혼하겠다’라고 답한 여성은 16%에 불과했다. 결혼에는 자신이 없지만 성매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는 강했다. 61%가 ‘돈을 벌면 새로운 일을 찾겠다’라고 답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계속 성매매를 하겠다’는 답은 8%였다.

성매매특별법이 실효를 거두고 성매매 여성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재활 프로그램이 시급한 것으로 보인다.   


▲ 기자가 성매매 여성을 인터뷰하고 있다(등돌린 사람 중 왼쪽이 손연주씨, 오른쪽이 이혜선씨). ⓒ시사저널 임준선

서울 출신인 손연주씨(가명·29)는 지난 2008년부터 성매매를 시작했다. 손씨의 부모는 그녀가 어릴 때에 이혼했다. 세 살 위 오빠가 있었지만 가출해 행방이 묘연했다. 손씨의 아버지도 집을 나갔고, 결국 손씨 혼자 남게 되었다. 그때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한창 학교에 다닐 나이이지만 손씨는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중국집에서 배달도 하고, 국수도 삶았다. 집에서 지낼 형편이 안 되어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간경화를 앓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집을 나간 후 소식이 없던 오빠가 나타났다. 오빠는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손씨 남매는 아버지의 3일장을 치르고 친엄마를 찾아갔다. 그런데 엄마는 혼자가 아니었다. 배 다른 동생과 함께였다. 엄마는 한눈에 보아도 병색이 완연했다. 그는 “당시 단백뇨 수치가 3천(0~30mg이 정상)이 넘었다. 어릴 적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깡마른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엄마는 몸이 심하게 부어 살짝 찌르기만 해도 터져나갈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이복동생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이후 병원비와 생활비는 고스란히 손씨의 몫이 되었다. 그때부터 성매매 업소에서 일을 했다. 집에는 친구네 집에서 지낸다고 거짓말을 했다.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숙식하며 일하는 오빠는 100만원이 조금 안 되는 월급을 받는다. 그 돈으로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진 빚을 갚아나가고 있다.

손씨와 친자매처럼 지내는 이혜선씨(가명·33)의 사정도 비슷하다. 광주광역시 출신인 이씨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동생 셋을 부양해야 했다. 등록금과 수업료를 감당할 수 없어 다니던 고등학교도 중퇴했다. 편의점, 호프집, 클럽 등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루 24시간 동안 2시간만 자면서 투 잡, 쓰리 잡을 뛰었다. 그러다 지인의 도움으로 회사 경리 일을 시작했다. 월급 70만원은 방세와 공과금을 내기에도 빠듯했다. 동생들 학비, 할머니 병원비에 턱없이 모자랐다. 10년 가까이 일을 했지만 빚만 잔뜩 쌓였다.

이씨의 할머니는 지금 심장혈관이 막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런데도 병원비가 없어 수술이 계속 미루어지고 있다. 이씨는 “나중에 돈 벌면 영어 공부도 하고 싶고, 운동도 하며 일반인이 사는 것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 꿈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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