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대학언론상] 우리 모두 은진이네 가족을 짓밟았다
  • 김영태(서강대 정치외교학과 4년)·김원진(서강대 신& ()
  • 승인 2013.09.04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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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어린이 성폭행 사건 그 이후

<시사저널>은 2013년 ‘제2회 시사저널 대학언론상’ 수상작 6편을 매주 한 편씩 연재합니다. 예비 언론인들의 풋풋한 열정이 담긴 작품들입니다. 이번 호에는 우수상으로 선정된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이야기-80일간의 기록’을 싣습니다.

사건이 발생하면 언론은 주목한다. 초점은 사건 그 자체에 맞춰진다. 정확히 말하면 사건은 언론에 의해 ‘소비’되고 이내 관심 밖으로 사라진다. 지난해 8월30일, 나주에서 발생한 아동 성범죄 또한 그랬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 언론과 각계 인사들은 나주로 향했다.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까지 발표했다. 거기까지였다. 사람들은 ‘사건 이후’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피해 어린이와 피해자 가족의 상처는 얼마나 치유됐을까? 그들과 동행한 80일간의 기록이다.

 

ⓒ 일러스트 오상민
     

#1. ‘고모님은 가난해본 적 있어요?’

한 문단도 되지 않는 글이었지만 내용은 다급했다. 2013년 3월30일, 아동 성범죄 추방을 위한 시민 모임인 ‘발자국’ 게시판에 새로운 글을 알리는 ‘New’가 떴다. 글쓴이는 온 국민을 분노하게 했던 사건의 피해자, 은진이 엄마였다. 활동가 중 한 명이 급히 은진이 엄마를 만나러 내려갔다. 상처는 깊었지만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다. 분노한 국민 여론이 모아준 성금으로 당분간은 큰 문제없이 지낼 거라 믿고 있었다. 모두가. 

“고모님(활동가), 고모님은 가난해본 적 있으세요?”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때서야 꽉 다문 입이 열리고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복받친 설움이었다. 한(恨)이었다. 응어리였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먹고살기 위해 그는 안간힘을 썼다. 비록 잘되진 않았지만 두 번이나 식당을 차렸다. 한 번은 선술집이었고 한 번은 분식집이었다. 빚을 내서 식당이라도 하면 아이들 끼니는 거르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편견이 힘들어요. 제가 한 행동들을 인정하지만 너무 과장됐어요. 그리고 그런 보도 때문에 우리 가족 모두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만 같아요.” “구체적으로 말을 해봐, 은진 엄마야. 뭐? 어떤 부분? PC방? 무책임한 부모? 가출?”

은진이 엄마에게 발언권은 없었다. 모든 결정은 시청이나 구청 담당자, 구호단체 직원,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관계자에 의해 이뤄졌다. 처음에는 피해자 가족의 의견 반영은 원래 안 되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사람들이 날 무시하는구나’ ‘난 그냥 업무의 대상이자 골칫덩어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듯 가출한 PC방 엄마였기 때문이었을까. 피해자의 부모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빚 독촉에 시달릴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혼자 끙끙 앓았다. 활동가 한 명이 은진이 엄마 전담자가 됐다. 직접 관할 구청, 구호단체, 아동 성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해바라기센터 관계자를 만났다. 은진이 엄마를 대신해서 따져 물었다. “왜 엄마의 의견은 귀담아 듣지 않느냐”고.

구호단체에 모인 후원금은 1억원 남짓이었다. 제법 큰 액수였다. 문제는 후원금 약정서였다. 한 국회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후원금 지원 약정서를 본 주변 사람들은 혀를 찼다. ‘단, 을은 갑이 제공한 물품 중 구입가 10만원 이상의 물품에 한해 무상임대 표시를 부착하고 이를 임의로 훼손시키지 아니하며 물품을 임의로 처분하지 않는다.’ 구호단체에서는 과도한 복지 의존성을 경계한다며 약정서에 ‘아버지의 노동’을 지원의 전제 조건으로 달았다. 또 다른 성금 지급 관련 서류에는 ‘도덕적 해이를 경계한다’ ‘자립 의지를 전제로 지원한다’는 문구가 적혔다. 기관 입장에서는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피해자 입장은 달랐다. 복지 의존성이니 뭐니 하는 것보다 일단은 회복이 우선이었다. 피해자 가족이 겪는 정신적 고통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아이들은 거칠어졌고 아빠는 술이 전보다 늘었다. 엄마는 지쳐갔다. 발자국 활동가는 말했다. “당연한 거겠죠. 모든 지원은 피해자의 자립을 기반으로 해야죠. 근데, 아직 아프잖아요. 아이가 입은 육체적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가지만, 피해자 가족이 입은 2차 피해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어요. 일단 일부터 하라는 식의 지원 조건은 탁상행정이 아니면 도대체 뭡니까. 자식새끼들이랑 정신 상태를 회복하고 먹고사는 게 우선 아닙니까?”

#2. 서울 나들이

아이들은 들떠 있었다. 2013년 5월10일 오후 1시, 은진이네 가족은 서울의 한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밥을 먹었다. 다들 한 그릇씩 뚝딱 해치웠다. 은진이는 서울에 오면 밥맛이 더 좋아지는 모양이다. 진료 시각까지 2시간 남짓 남았다. 은진이는 엄마를 달달 볶았다. 볼을 꼬집었다가 머리를 풀었다가. 한시도 엄마를 가만두지 않았다.

진료가 시작됐다. 아빠는 의사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담당 의사는 은진이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떤 장면이 제일 무서워?” “괴롭혔던 거요.” “그 아저씨 어떻게 된 줄 아니?” “많이 혼나고 있어요. 경찰에. 죽었으면 좋겠어요.”

은진이는 의사와 몇 마디 더 주고받더니 언니·오빠와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엄마는 은진이가 전과 달라진 점을 의사에게 얘기했다. 밤새 잠을 잘 못 잔다는 점, 전보다 훨씬 난폭해져 막내를 때린다는 점 등을 상세히 전했다.

“은진이가 지금 겉은 멀쩡해도 속은 그게 아닙니다. 마음의 상처 부위가 아직도 너무 아파요. 효과가 금방 나타나진 않겠지만 장기적인 심리 치료가 중요해요.” 의사는 잠시 레지던트에게 의학 용어로 차트에 기록할 것을 주문하곤 말을 이었다. “은진이만 아픈 게 아닙니다. 가족 모두 함께 치료를 받아야 해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남매들 모두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가 있어요.”

엄마·아빠는 땅만 바라봤다. 진료가 끝나자마자 서초동 법원 근처의 언론인권센터로 향했다. 언론인권센터는 언론을 상대로 소송을 담당해줄 시민단체다. 담당 변호사들은 이미 회의 장소에 모여 있었다. 이들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데 주력했다.

“PC방에 자주 다닌 건 사실이죠?” “갔죠. 게임만 하러 간 게 아니라 집에 컴퓨터가 없어서 아이들이랑 같이 과제도 하러 갔어요.” “게임 중독이라는 표현도 있던데요.” “중독이란 표현은 억울합니다. 무엇보다 제가 아이들을 팽개치면서 게임을 한 것도 아닌데….” 다시 변호사가 물었다. “문은 왜 열어뒀습니까?”

8월30일 새벽. 가해자 고종석은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은진이네 집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부모의 관리 소홀을 지적했다. 사실 이날 문고리는 고장 나 있었다. 문고리뿐만이 아니었다. 수도, 벽지, 보일러,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었다. 오래된 집이었지만 집주인은 나 몰라라 했다. 문고리도 그랬다. 고쳐달라고 요청했지만 듣는 둥 마는 둥 넘어갔다. 하루 한 끼 먹고살기 바빴다. 고칠 여력이 없었다.

담당 변호사들은 사정없이 찔러댔다. 소송을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였다. 쟁점에 대한 정확한 사실 확인이 필요했다. 어느 부분이 과장되고 왜곡됐는지, 또 어느 부분이 사실인지 확인해야 했다. 엄마는 언론에 보도된 내용 중 상당 부분을 인정했다. PC방에서 게임을 한 것, 가해자와 그날 몇 마디 나눈 것. 하지만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고 부풀려진 보도에 대해선 억울함을 호소했다.

잠자코 있던 아빠가 거들었다. “기자 새끼들! 내가 뭣 땜시 그놈 매형이오? 다 조져불랑께. 소설을 쓰요, 소설을.” 며칠 전부터 아빠의 휴대전화로 모르는 사람의 번호가 찍힌 문자와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기자들의 연락이 싫어 전화번호를 바꿨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2심 재판이 다가오자 다시금 연락이 왔다. 한 번은 쌍욕을 하고 끊어버리기도 했다. “내가 아직도 기억나는 게 그놈들이 은진이 사건 나고 전기를 하도 돌려써서 집 전기세가 그달에 30만원이나 나와부렀소. 양심도 없는 새끼들이랑께.”

아빠는 말이 트였다. “왜 사과 한마디 없는지 모르겄소! 그라믄 이렇게 소송 안 해도 되고.” 센터 직원과 산책 나갔던 아이들이 돌아왔다. 변호사들은 더 많은 걸 묻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소송 가액도 높고 거대 언론을 상대로 하는 소송이라 부담이 커보였다. 은진이네 가족이 타야 할 막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 만남을 기약해야 했다.

 

2012년 9월3일 나주 성폭행 피해 초등생이 입원한 전남대 병원 관계자들이 브리핑하고 있다. ⓒ 연합뉴스

#3. 윤리 불감증

또 카메라였다. 2013년 5월16일. 공판이 끝나자 방송국 카메라는 은진이 엄마를 ‘줌인’했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공판에 따라왔던 발자국 활동가들은 카메라를 막아섰다. “여긴 포토라인도 없습니까? 어떻게 재판정 문을 열자마자 카메라를 들이댑니까! 서울은 딱 선이 있던데! 당신들이 기자입니까?” “서울은 서울의 규칙이 있는 거고, 여긴 그런 거 없습니다.” 한 종합편성 채널 기자였다. “찍지 말아요! 피해자 부모 얼굴 찍어서 어디다 쓰려고 하는 거냐고요!” 활동가가 분을 못 이겨 씩씩거렸다.

이날 항소심에서도 1심과 마찬가지로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5월26일이었다. 은진이 엄마는 혼잣말을 읊조렸다. “도대체 저를 왜…. 제가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영상은 은진이네 가족을 옥좼다. 어딜 가나 카메라가 있었고 은진이네가 자리를 비운 집안 곳곳을 촬영했다. 일기장은 물론이고 집안 내부까지 남김없이 찍어갔다. 집 안마당에 있던 술병은, 사건 당시 술을 먹고 잠을 자고 있던 아빠를 비난할 좋은 먹잇감이었다.

은진이가 입원했던 대학병원 8층엔 기자들이 진을 쳤다. 병실은 복도 끝 모퉁이에 있었다. 바로 맞은편 휴게실에는 언제나 기자들이 득실거렸다. 은진이와 가족들이 불안에 떨자 병원에서 경호원을 붙였다. 은진이 엄마는 문 앞으로 나갈 때마다 경호원에게 노크를 해서 신호를 보내야 했다. 아이들은 병실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고종석 사건 피해자의 부모가 돈을 갖고 튀었다’는 게시물이 어느 포털 사이트 카페에 올라왔다. 댓글이 주루루 달렸다. ‘보니까 전형적인, 아이들이 무관심에 방치되어 있는 가정임’ ‘귀하디 귀한 내 자식인데 부모인 내가 지켜줘야 하는 건 당연지사 아닐까요. 저는 그 부모들도 벌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댓글을 봤다. 멀쩡히 옆에 있는 엄마가 1억원이 넘는 돈을 들고 집을 나갔단다. 은진이의 언니가 울먹였다. “우리 엄마 나랑 같이 살고 있는데….” 은진이의 언니는 마음에 짐이 있다. 언론에서 고종석이 원래 범행 대상으로 은진이의 언니를 지목했다는 보도를 접한 이후로, 사건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닫는다. 전보다 짜증도 늘어났다.

은진이 엄마는 사진을 캡처했다. 그리고는 신고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게시물을 올린 분은 30대 여성이고 현재 임신부입니다. 거주지는 수도권이고요. 소송 진행하실 겁니까?” 맥이 풀렸다. 임신부라니. 소송은 무슨. 소문은 돌고 돌아 또 다른 소문을 낳았고, 은진이 엄마는 ‘PC방 엄마’에서 이젠 ‘돈을 갖고 튄 엄마’라는 오명을 받게 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날, 은진이 엄마는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기로 결심했다.

#4. 서울 나들이 2

5월9일 성범죄 피해자 가족들과 만나는 모임이 있었다. 첫 만남이었다.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하나같이 밥 타령뿐이었다. “나, 짜장면!” “난 볶음밥!” “탕수육도 시켜주세요!”

오후 타임까지 일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온 은진이 아빠가 식당에 도착했다. 은진이 동생은 아빠에게 쪼르르 걸어가 무릎에 안겼다. “아우~ 저 깍쟁이.” 발자국 활동가가 은진이 동생의 볼을 꼬집었다.

아이들의 식사가 끝나자 어른들이 남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들 배가 고팠는지 별 말이 없었다. 접시가 바닥을 보이고 나서야 하나 둘 입을 뗐다. “이젠 정말, 정말로 조금씩 괜찮아질 거예요.” “네, 항상 감사해요. 사진 보세요. 은진이 1년 전 모습인데 몸무게도 거의 그때로 돌아가고 있어요.”

짬뽕밥을 주문한 아빠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밥만 국물에 담갔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은진이 엄마는 스마트폰에 저장된 아이들의 사진을 오른손 검지로 하나하나 넘겼다. “나아질 거예요. 너무 미안해요.” 엄마는 또다시 목이 멨다. 아빠는 땀을 닦으며 짬뽕밥만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었다.

※ 다음 호에는 우수상 ‘성매매 집결지 성공적 해체? 차라리 그때가 나아’가 이어집니다.

 

ⓒ 시사저널 최준필

2012년 8월30일. 전국을 뒤흔든 성범죄가 터졌다. 일명 나주 아동 성폭행 사건. 자극적인 언론 보도가 줄을 이었다. 언론의 직업윤리가 실종됐다고 생각했다. 언론인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기에 현장의 기자는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이때 처음으로 그 꿈에 대해 회의를 느꼈다.

취재는 지인을 통해 우연한 계기로 시작됐다. 나주 사건의 피해자 가족이 한 시민단체에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동의를 구하고 피해자 가족을 만나보기로 했다. 가족들과의 첫 만남은 조심스러웠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취재가 거듭될수록 여러 윤리적 문제가 드러났다. 여타 기관의 담당자들과 국가 제도 또한 피해자 가족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우리는 거의 모든 동선을 따라다녔다. 녹취를 하며 취재 현장의 배경, 몸짓을 스케치했고, 녹취가 불가능할 때는 수첩을 꺼내들었다. 때때로 기관이나 관련 공무원들의 입장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현실적 한계를 이야기했다. 한편으론 수긍이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려움도 있었다. 피해 어린이의 거주지와 서울 간 거리다. 왕복 7시간. 학기 중에 시간을 내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고민했던 점은 바로 ‘팩트’였다. 기사의 생명은 정확한 팩트라 배웠다. 하지만 우리는 가지고 있는 팩트를 모두 말할 수 없었다. 지명, 가족 수, 다른 성범죄 피해자의 이름과 나이 등등. 모두 포기해야 했다. 굳이 독자가 알아야 할 정보가 아니라면 적시하지 않기로 원칙을 세웠다. 진정성에 관한 고민도 있었다. 취재를 하면서 과연 우리는 문제의식을 유지하고 있나, 기사 작성이라는 목표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취재에 적극 협조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하고 죄송할 따름이다. 취재한 것의 절반도 내놓지 못해 그분들의 목소리를 모두 반영하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직 세상에 팽배한 은진이(가명)네 가족에 대한 오해가 우리가 쓴 기사로 인해 조금이라도 풀어지길, 그래서 더 이상 은진이와 가족이 상처받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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