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진실의 편이 아니었다
  • 대구=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3.09.16 14:57
  • 호수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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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의문사’ 15년 추적 끝에 성폭행범 잡은 아버지 사연

15년이 걸렸다.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998년 한 여대생이 고속도로 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경찰은 교통사고로 결론 내렸다. 납득할 수 없었다. 단순 사고사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아버지는 진실을 원했다. 딸의 죽음에 얽힌 합리적 의문을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년의 삶을 바쳤다. 발이 부르트도록 뛰었다. 목이 쉬도록 외쳤다. 반기는 곳이 없었다. 들어주는 이도 많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저세상에 있을 딸의 한(恨)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마침내 진실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사랑하는 딸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닥뜨린 아버지가 견뎌내기에는 더욱 그렇다. 15년 동안 아버지는 진실을 외면하는 공권력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 결과로 일부분의 진실이 겨우 밝혀졌다. 하지만 그 과정은 지난했고 아버지의 고통은 깊었다. 과연 무엇이 한 아버지의 평범했던 삶을 굴절시켰을까.

9월10일 정현조씨가 죽은 딸의 사진을 바라보다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숨진 정은희양의 방에는 사건과 관련된 서류가 쌓여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초동수사 미흡했던 경찰, ‘사고사’ 결론에 집착

1998년 10월17일 오전 정현조씨에게 비보가 날아들었다. 대구 구마고속도로 위에서 딸 정은희양(당시 18세)이 트럭에 치여 숨진 채 발견됐다는 것이다. 발견 당시 시신의 머리 부분은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훼손돼 있었다. 차량에 깔렸던 흔적이 있었다. 경찰은 정양이 무단 횡단을 하다 23t 덤프트럭에 치여 죽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정양 친구들의 진술에 따르면 정양은 학교 축제에 참가해 밤 10시40분쯤까지 술을 마시다 교문을 나섰다. 정양이 발견된 곳은 학교로부터 7.7km 떨어져 있었다. 전날 밤 학교를 떠난 딸이 왜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발견됐을까. 정씨는 의아했다. “얘가 고속도로에 뭐 하러 갔을까.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병원 영안실에서 딸의 시신을 확인했다. 정씨의 의구심은 더욱 깊어졌다. 사체에 속옷이 없었다. 성추행 혹은 성폭행을 당한 뒤 사고사로 위장됐을 가능성을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사라진 속옷은 다음 날 사고 현장 주변 갓길에서 발견됐다. 정양의 가족 및 지인들이 직접 찾아 경찰에 증거물로 제출했다. 사고 직후 경찰이 현장 유류품 수색 등 초동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단면이다.

시신을 수습했던 소방관 등 담당자를 직접 만나 얘기를 들었다. 정양을 치었다는 덤프트럭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이상했다. “(사고 차량의) 운전석 바로 옆, 헤드라이트와 맞닿은 부분만 부서져 있었다. 우발적인 사고로 강한 충돌이 있었는데 어떻게 바로 옆의 헤드라이트는 멀쩡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이미 죽은 사람의 몸을 차와 벽 사이에 대고 천천히 밀었던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현장에 남은 흔적도 이상했다. 덤프트럭이 살아서 무단 횡단하던 정양을 덮쳤다면 사방에 피가 튄 흔적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없었다. 중앙 분리대에 소량의 혈흔만 남아 있었다. 이미 죽은 정양을 고속도로 위로 끌고 와 사고로 위장한 것이 아닌지 의심해볼 만한 정황이었다. 상반신의 뼈가 거의 부서졌음에도 내장이 튀어나오지 않은 점 역시 사후 경직이 시작된 후에 차량과의 접촉이 있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했다.

정씨는 여러 의문점을 근거로 경찰에 ‘진실 규명’을 호소했다. 그의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현장 주변, 정양의 몸 등 곳곳에서 ‘교통사고사’ 결론에 어긋나는 증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이를 확인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은폐했던 셈이다. 미흡했던 초동수사만으로 이미 직무 유기였다. 그럼에도 경찰은 정씨의 합리적 문제 제기를 아예 듣지 않았다. 이미 도출한 ‘교통사고에 의한 사고사’라는 결론을 꺾지 않았다.

사건 수사를 담당하는 기관과 피해자 가족은 흔히 ‘정보 비대칭 관계’에 놓인다. 수사 당국은 사건과 관련된 정보를 다방면으로 수집한다. 반면 사건의 당사자 중 하나인 피해자 및 그 가족은 수사 당국이 공개하지 않는 한 관련 정보를 얻는 데 한계가 있다. 종종 ‘잘못된 결론’을 내린 수사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저지하는 장벽으로 공권력의 권위가 활용되는 이유다.

“우리가 아니라면 아닌 줄 알아야지”

정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해당 결론을 입증할 수 있는 부검감정서, 시신 발견 당시의 현장 사진 등을 보여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른 수사관, 혹은 검찰로 자료가 넘어갔다는 식으로 얘기하면서 계속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씨는 “내가 이야기를 하면 (경찰이) ‘우리가 아니라면 아닌 줄 알아야지 뭘 안다고 그래’ 하는 식이었다. ‘채소 장사나 하는 주제에’라며 모멸감을 주기도 했다”고 밝혔다.

정씨는 경찰이 제대로 된 수사를 할 의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2000년 9월 그는 담당 형사를 직무 유기로 고소했다. 항고와 재항고를 거쳐 헌법소원까지 이어졌다. 사건 발생 후 수년의 시간이 법정에서 지나갔다.

그런데 정씨는 그 과정에서 수상한 정황을 확인하게 된다. 경찰이 공개하지 않았던 일부 수사기록을 법정 싸움 과정에서 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갓길에서 발견된 속옷에서 정양의 혈흔, 신원을 알 수 없는 자의 정액 성분이 검출됐음을 뒤늦게 확인했다. 정양이 죽기 전 성폭행당했음을 암시하는 결정적 증거가 가족들에게 은폐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족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부검감정서에는 ‘흔히 보는 보행자의 교통사고와는 다르며 시신은 사고 전 신변에 중대한 위협을 받아 매우 긴박한 상황임을 암시해준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정씨의 고소 및 헌법소원은 모두 기각됐다. 경찰이 제출한 증거자료가 ‘사고사’임을 증명한다고 인정됐다.

이에 대해 정씨는 “경찰이 조작한 자료가 핵심 증거로 채택됐기 때문”이라며 분개했다. 한 예로 정양의 죽음이 ‘사고사’임을 증명한 목격자가 있었다. 정씨는 경찰에 관련 진술서를 작성·제출한 목격자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는 “(진술) 서류를 본 적도 진술을 한 적도 경찰을 만난 적도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정씨는 경찰이 ‘사고사’라는 애초의 결론을 지키기 위해 허위 증거를 내세웠다고 주장한다.

정씨는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좇았다. 각 시민단체, 정부기관 등을 찾아 억울함을 호소하고 조언을 구했다. 해당 사건을 끊임없이 검찰에 고소했다. 2008년, 2011년, 2012년에 낸 고소는 각각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았다. 이에 대해 정씨는 항고하지 않았다. 횟수 제한이 없는 ‘재고소’만을 이어갔다.

2013년 5월 정씨는 네 번째 고소장을 제출했다. 고소를 접수한 검찰은 ‘DNA법’(DNA 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주목했다. 이 법이 2010년부터 시행되면서 검찰과 경찰은 강력 범죄자의 DNA를 채취해 보관하고 있다. 검찰은 정양의 속옷에서 나온 정액의 DNA와 같은 것이 2011년 채취됐음을 확인했다. 성매매 사건에 연루된 한 스리랑카인의 것이었다. 검찰은 수사를 통해 스리랑카인 3명이 정양을 성폭행한 사실을 밝혀냈다. 정양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이 일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15년만의 결실이었다.

억울한 국민 저버린 공권력 향한 분노

아버지는 굴하지 않았다. 숱한 패배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정의감이 투철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부성애가 남달랐기 때문일까. 그 이유에 대해 정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교통사고가) 아닌데도 교통사고라고 하나. 왜 (우리를) 속이나. 사건을 철저하게 수사해야 할 수사기관이 계속 의문을 증폭시키는 것이 말이 안 되더라. 우리처럼 없이 사는 서민들은 평생 한(恨)을 품고 살란 말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꼭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

국민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이 딸의 죽음을 외면했다. 그에 대한 분노가 아버지를 지탱했다. 15년을 바쳐 진실을 추적하도록 했다. 한때 정양의 방이었던 곳에는 서류더미가 잔뜩 쌓였다.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모인 자료들이다. 딸이 떠나고 없는 빈방에서, 딸의 한을 풀어주려 했다. 그 결과 딸을 집단 성폭행한 이들을 잡아낼 수 있었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딸의 사진을 넘겨보던 정씨는 잠시 창밖을 응시했다. 눈동자에 회한이 가득했다. 이미 떠나버린 딸이 영영 돌아올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진실은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정양이 왜 그곳에서 죽었는지는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아버지의 싸움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지난해 11월8일 오전 7시쯤 김종필씨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주희 아버님이시죠? 주희가 자다가 사망했어요. 빨리 병원으로 오세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김씨의 딸 주희(사망 당시 11세)는 시각장애 1급, 뇌병변 4급으로 2011년 11월부터 충주의 한 맹아원 기숙사에서 쌍둥이 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주말마다 김씨 부부가 경기 화성에서 충주로 데리러 오고 또 데려다 주는 생활을 반복했다.

김씨 부부가 병원에 가보니 주희는 싸늘한 주검이 돼 영안실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주희의 시신이 이상했다. 여기저기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는 등 정상이 아니었다. 등에는 움푹 팬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고, 귀 뒤쪽에도 큰 상처가 있었다. 숨지기 사흘 전 주희를 만났을 때는 없던 상처들이었다. 

주희의 사망을 놓고 맹아원 관계자들의 말도 석연치 않았다. 처음에는 “자다가 사망했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새벽에 혼자 방에 남아 음악을 듣다가 의자 팔걸이에 목이 끼어 사망했다”고 말을 바꿨다. 주희 몸에 난 상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는 대답만 들려왔다. 김씨에 따르면 맹아원은 교사와 원생들이 함께 숙식하면서 3교대로 24시간 생활한다.

그런데 당시 보호교사는 4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다. ‘사망 원인을 밝혀달라’는 요구에 맹아원 측은 ‘위로금을 준비했다’며 합의를 종용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맹아원 측은 주희가 사망한 지 12시간 넘게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방치했다. 또 시신을 임의로 옮겨 사건 현장을 보존하지 않았다. 증거 인멸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김씨는 주희의 사망 원인을 밝혀달라며 경찰에 수사를 요청했다. 하지만 경찰은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김씨는 “경찰은 유족들을 귀찮다는 듯이 대했고, 냉담한 반응만 보였다. 조사는 너무 허술하고 무성의해 보였다”고 말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부검을 진행했으나 ‘사인 불명’을 통보했다. 시신의 상처에 대해서는 소견을 내지 않았다. 검찰은 시설 관계자 5명을 불기소 처분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주희의 시신은 4개월간 병원 영안실 냉동고에 있다가 지난 3월에야 장례를 치렀다. 시신은 화장해 강물에 뿌렸다. 김씨는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가 시신을 확인하겠다고 영안실로 왔다. 그리고는 ‘내가 확인했으니 주희를 그만 보내주자’고 설득했다. ‘책임지고 수사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우리는 그 말을 믿고 장례를 치렀는데, 사흘 후에 검사가 바뀌었다. 그리고 ‘급사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너무 억울했다. 주희의 죽음은 분명 의문투성이이고, 석연치 않은데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이로 인해 김씨의 아내는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김씨는 재수사를 촉구하며 청와대·대검찰청·감사원 등에 진정서와 탄원서를 제출했다. 또 국회와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에 나섰다. 저녁에는 거리, 지하철, 음식점 등을 다니며 서명을 받았다. 김씨는 지금까지 이 생활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정락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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