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구’ 사라진 자리 ‘토착 양아치’들이 꿰찼다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승인 2013.10.16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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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관리 폭력 조직 216개, 조직원 5425명 충북 ‘파라다이스파’ 76명으로 최다

#1. 지난 5월15일 오전 11시쯤 대구지방법원 주차장에서 한 법인의 출자증권을 낙찰받고 나오던 50대 후반의 김 아무개씨가 건장한 체격의 40대 남성 다섯 명에게 둘러싸였다. 이들은 김씨에게 “너 때문에 낙찰을 못 받았다. XX새끼, 젊은 놈한테 당하기 전에 경비나 주고 가라”고 협박했다. 멱살을 잡고 다리를 차는 등 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6월25일 오전 10시10분께 같은 장소 복도에서 다시 만난 이들은 “X새끼야, 여기 왜 또 왔어. 안 꺼져”라고 겁을 주면서 발로 허벅지를 차는 등 김씨를 또다시 구타했다. 이들 중 한 명인 윤 아무개씨는 폭력 조직 ‘동성로파’의 행동대원이었다.

#2. 7월6일 새벽 2시쯤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의 한 주점 앞에서 50대 초반의 건장한 남성 두 명이 30대 중반의 남성 한 명을 주먹과 구둣발로 무자비하게 난타했다. 인사를 하지 않는 등 예의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가해자 50대 남성 중 한 명은 폭력 조직 ‘향촌동파’의 두목 탁 아무개씨였고, 피해자 30대 남성 김 아무개씨는 ‘내당동파’ 행동대원이었다. 김씨가 ‘선배를 몰라본 불경죄’로 탁씨로부터 이가 빠지도록 흠씬 두들겨 맞은 것이다.

ⓒ 시사저널 구윤성
한동안 잠잠하던 조직폭력배(조폭)가 다시 활개를 치고 있다. 2011년 10월 인천 길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벌어진 조폭들의 칼부림 난투극을 계기로 검찰과 경찰이 대대적인 단속에 나서면서 수백 명의 조폭이 구속되거나 입건됐다. 그 결과 조폭 세력이 크게 위축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뿌리까지 근절되지는 않았다. 지역에서는 ‘토착 조폭’이 여전히 위세를 부리고 있고, 신흥 조직도 영향력을 확대해 ‘조폭 지도’를 새롭게 그리고 있다.

경찰청이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강기윤 새누리당 의원에게 제출한 ‘관리 대상 조직폭력배 현황’ 자료에 따르면 올 8월 말 현재 경찰이 관리하고 있는 국내 폭력 조직은 216개에 이르며 조직원 수는 5425명이다. 이는 경찰이 관리하고 있는 비교적 규모가 큰 폭력 조직의 간부급 주요 인물을 집계한 것으로, 실제 폭력 조직에 가담하고 있는 조직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른바 ‘전국구’로 통하던 거대 조직의 경우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자리를 ‘토착 조폭’과 ‘신흥 조폭’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향촌동파’와 ‘동성로파’도 여기에 속한다. 두 조직은 오래전부터 대구 지역의 양대 폭력 조직으로 악명을 떨쳐왔다. 강기윤 의원실이 경찰청 자료를 토대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향촌동파’는 경찰의 관리 대상 조직원 수가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폭력 조직이다. 충북의 ‘파라다이스파’가 76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향촌동파’로 조직원 수가 75명에 이른다. ‘동성로파’도 관리 대상 조직원 수가 61명으로 전국에서 일곱 번째로 많다.

최근 ‘향촌동파’ 두목이 다른 조직의 행동대원을 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기에 앞서, 이 지역의 또 다른 폭력 조직인 ‘동구연합파’ 두목 김 아무개씨도 오락실 업주를 위협해 이권을 빼앗으려고 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동구연합파’는 1990년대 후반 양대 조직에 대항하기 위해 동구와 북구 일대 군소 조직이 통합해 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경찰이 관리하는 조직원 수는 33명인데, 실제는 100명이 넘을 것으로 당국은 보고 있다.

전국구 조폭 3인방 시대 막 내려

지난 1월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이 사망하자 ‘전국구 조폭 3인방’ 시대가 마침내 막을 내렸다는 분석이 나왔다. 김태촌의 ‘범서방파’와 함께 조양은의 ‘양은이파’, 이동재의 ‘OB파’는 1980년대 전국을 무대로 악명을 떨치며 3대 폭력 조직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1990년대 ‘범죄와의 전쟁’을 거쳐 2000년대에 이르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현재 경찰에서 관리하고 있는 조직원 수는 ‘범서방파’ 11명, ‘양은이파’ 26명에 불과하다. ‘OB파’의 경우 광주를 근거지로 한 ‘충장OB파’가 49명인 것으로 파악됐다.

한때 국내 조직폭력계를 평정했던 김태촌은 숨을 거두기 전까지 감옥과 병원을 오갔다. 그런 와중에도 유명 배우에게 일본 팬 사인회를 강요한 혐의로 기소되는가 하면, 한 중견 기업인의 부탁을 받고 다른 기업 대표에게 사업 투자금 25억원을 돌려달라며 협박한 혐의로 기소되는 등 여러 차례 구설에 올랐다.

1월8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의 영정과 시신이 영구차에 실려 화장터로 이동하고 있다. ⓒ 뉴시스
‘전국 최대’ 칠성파도 몰락 위기

그가 사망한 지 한 달쯤 후인 2월3일에는 그의 후계자로 거론된 ‘범서방파’ 행동대장 출신 나 아무개씨가 다른 조폭들에게 납치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호남 최대 폭력 조직인 ‘국제PJ파’ 부두목 조 아무개씨가 경남 진해에 근거를 둔 ‘양포파’ 부두목 정 아무개씨를 통해 조폭 네 명을 동원해 나씨를 납치한 것이다. ‘국제PJ파’의 경우 현재 65명의 조직원이 경찰의 관리 대상에 올라 있다. 전국에서 네 번째로 많은 규모다.

김태촌의 오랜 숙적이던 조양은도 금융권 대출 사기에 연루돼 경찰의 수배를 받는 등 재기가 어려운 상황에 있다. 그의 후계자로 지목된 ‘양은이파’ 간부 김 아무개씨가 룸살롱·모텔 등을 운영해 번 돈으로 조직 재건에 나선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폭행과 감금, 공갈, 갈취 등의 혐의로 구속되면서 사실상 물거품이 됐다. 이동재는 1980년대 말 ‘양은이파’의 공격을 받은 후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은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전국 최대 폭력 조직 중 하나로 꼽히는 ‘칠성파’도 와해될 처지에 놓였다. 부산 지역을 기반으로 한 ‘칠성파’는 근래 몇 년 동안 인근 군소 조직을 흡수하고 호남 지역 폭력 조직과 연합하는 등 세력 확장을 노려왔다. 하지만 최근 두목 한 아무개씨를 비롯해 행동대장 김 아무개씨와 조직원 등 25명이 무더기로 구속되면서 조직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한씨는 1대 두목인 이강환이 고령과 지병으로 일선에서 퇴진한 후 ‘회장’ 자리를 물려받아 2010년부터 조직을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칠성파’의 새 조직도를 파악하고 자금 흐름을 추적하는 등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경찰의 관리 대상인 ‘칠성파’ 조직원은 71명으로 전국에서 세 번째로 많다. 실제 조직원 수는 이보다 세 배 이상 많을 것으로 당국은 보고 있다.

부산의 대표적 폭력 조직으로 지난 수십 년간 ‘칠성파’와 앙숙으로 지내온 ‘신20세기파’도 세력이 상당히 위축됐다. 범죄단체 구성 및 활동 등의 혐의로 구속된 3대 두목 홍 아무개씨와 행동대장 견 아무개씨 그리고 조직원 12명은 모두 대법원으로부터 실형을 선고받았다. 홍씨의 경우 징역 6년형이 확정돼 당분간 사회로 복귀할 수 없게 됐다.

‘무주공산’ 지역, 군소 조직이 자리 차지

부산 지역 양대 폭력 조직이 동시에 두목이 없는 초유의 사태를 맞은 것은 그동안 두 조직이 세력 다툼 과정에서 보복 폭행을 일삼아온 탓이 크다. 1993년 7월 ‘칠성파’ 조직원들이 ‘신20세기파’ 행동대장 정 아무개씨를 흉기로 10차례 넘게 난자해 살해한 후 이른바 ‘피의 보복’이 시작됐다. 이 사건은 2001년 영화 <친구>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검·경의 집중 단속으로 지역의 유력 폭력 조직이 와해된 곳에서는 다른 군소 조직들이 영향력을 확대해 그 자리를 꿰차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인천의 양대 폭력 조직이던 ‘간석식구파’와 ‘부평식구파’는 대대적인 단속으로 조직이 사실상 와해된 것으로 당국은 보고 있다. 검찰은 2012년 9월 이들 조직의 두목과 핵심 조직원들을 무더기로 구속 기소했다. ‘간석식구파’의 경우 두목 허 아무개씨를 비롯한 조직원 100여 명 중 50명이 입건돼 이 중 24명이 구속됐다. ‘부평식구파’도 두목 송 아무개씨를 비롯한 100여 명 중에서 72명이 입건돼 이 중 22명이 구속됐다.

최근 들어 이 지역에서는 양대 조직에 밀렸던 ‘주안파’와 ‘꼴망파’ 등이 치고 올라오는 양상이라고 한다. 조직을 잃고 뿔뿔이 흩어진 간석·부평파의 조직원을 흡수하거나 이들 영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세력을 경쟁적으로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인천 남구에 기반을 둔 ‘주안파’는 인천 시내 유흥가에서 각종 불법 행위를 벌이면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 중구에 기반을 둔 ‘꼴망파’는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폭력 조직으로 근래 들어 젊은 조직원을 대거 영입해 세력 확장을 노리고 있다고 한다.

서울에 기반을 둔 폭력 조직이 수사기관의 단속으로 와해 상태에 놓이자 인근 경기도에서 조직을 재건하기도 했다. 서울 강남 일대에서 활동해온 ‘연합새마을파’는 2005년 검·경 합동 수사로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자 시흥·안산 지역으로 내려가 지부 형태의 조직을 결성했다. 경찰 수사 결과 다른 조직에서 활동하던 조폭들까지 규합한 이들은 재건축이나 철거 현장 등에서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가 하면, 티켓 다방을 통해 성매매를 알선하는 방법으로 운영 자금을 마련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기도는 경찰의 관리 대상 폭력조직이 31개, 조직원이 893명으로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에서 가장 많다. 최근에는 미분양 아파트의 이권 다툼에 조폭이 깊숙이 개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한다.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한 아파트의 경우 ‘안산목포파’와 ‘광주동아파’ 조직원들이 입주민을 위협해 아파트 가격을 낮추려고 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폭들이 기존의 폭력 범죄에서 벗어나 지능 범죄에 뛰어드는 경향은 더욱 뚜렷해지는 추세다. 최근 검찰은 서울에서 활동 중인 조폭들이 ‘몸통’ 역할을 한 보이스피싱 조직을 적발해 여덟 명을 구속했다. 고 아무개씨를 비롯한 ‘답십리파’ ‘화양리파’ 조직원들은 고씨가 교도소에서 만난 보이스피싱 사기범과 함께 점포 양도 중개를 가장해 1100여 명의 영세 자영업자들로부터 37억원 상당을 뜯어냈다. 고씨는 범행 기간 중 폭행을 저질러 재차 구속되자 교도소 안에서 범행을 지시해 수익금을 계속 분배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조폭 검거 왜 줄어드나 


경찰의 조폭 검거 실적은 매년 줄어드는 추세다. 2008년 5411명을 검거한 데 반해 2012년에는 3688명을 잡아들였다. 경찰에서 관리하는 조폭 수는 2008년 5413명, 2012년 5384명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 구속되는 조폭 수는 더욱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 1468명(27.1%)에서 649명(17.6%)으로 급감했다. 올해도 이런 경향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8월 말 현재 검거된 조폭은 1732명이며, 이 중 구속된 이들은 311명이다.

조폭 검거 실적이 감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조폭이 폭행 등으로 검거되더라도 폭력 조직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범죄단체 구성 및 활동 사실이 밝혀질 경우 일반 폭행보다 훨씬 더 형량이 무거워진다. 그러다 보니 실제 조폭이라고 해도 자신은 조폭이 아니라고 발뺌하기 일쑤다. 관련 사실을 입증해야 할 책임은 경찰에게 있다. 일선 경찰에서 조폭 사건을 수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다.

7월5일 대법원은 두목과 고문, 부두목, 행동대장 등 간부를 정하고 지역에서 조직폭력배로 활동하던 이들을 불러 모아 행동대원으로 가입시킨 ‘부여식구파’ 조직원 24명에 대한 상고심에서 범죄단체 구성 및 활동 혐의를 무죄로 본 원심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들이 조폭 행세를 했을 뿐 범죄를 함께 저지를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조직원에게 자금을 지원하거나 조직의 위세를 과시하는 등의 조직적인 범죄를 저지른 일이 없는 점, 탈퇴해도 별다른 보복을 하지 않은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자기들끼리 서열을 정하고 패거리로 몰려다니며 행패를 부렸더라도 조직적인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면 범죄단체로 볼 수 없다는 설명이다.

기존에 구성돼 있던 폭력 조직의 두목을 새로 맡은 경우에도 범죄단체 구성 및 활동 혐의로 처벌할 수 없다는 법원의 판결도 나왔다. 지난 5월20일 대전고법은 심 아무개씨 등 ‘당진식구파’ 두목과 부두목, 행동대장 등 5명의 범죄단체 구성 및 활동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고 밝혔다.

심씨가 살인죄로 복역하다가 잠시 귀휴했던 2007년 6월21일 조직원 40여 명과 함께 심씨를 두목으로 하는 새로운 폭력 조직 ‘당진식구파’를 구성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들은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기존 조직과 동일성이 없는 별개의 조직으로 인정될 정도가 아니라면 범죄단체 구성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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