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꾸민 유일한 곳은 손톱… 하지만 모두에게 아름다움 선사했다
  • 조유빈 기자 (you@sisapress.com)
  • 승인 2014.02.1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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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2연패 달성한 ‘빙속 여제’ 이상화

이상이 현실을 갈랐다. 소치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이상화는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합계 74초70을 기록하며 대한민국에 첫 번째 금메달을 안겼다. 1차 레이스 37초42, 2차 레이스 37초28. 올림픽 신기록으로 밴쿠버올림픽 이후 4년 만에 다시 올림픽을 제패한 것이다. 최고의 자리를 지켜낸 이상화는 또 한 번 최고의 라이벌인 자신을 넘어섰다.

오빠를 따라간 아이스링크장에서 이상화는 스케이트와 처음 조우했다. 처음 신은 스케이트화는 중고였다. 낡은 스케이트 때문에 계속해서 넘어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했다. 하도 바닥을 쓸고 다녀 주변 사람이 “너는 청소하러 여기 왔냐”고 말했을 정도다. 스케이트 날에 얼굴을 찢기는 부상을 당해 일곱 바늘이나 꿰매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훈련장과 가까운 동네 산부인과에서 마취도 없이 수술했다.

ⓒ 연합뉴스
어머니는 딸이 위험한 스케이트를 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화는 특기 활동으로 스케이팅을 하며 점점 재미를 붙여나갔다. 본격적으로 아이스링크에 올라선 이상화는 곧 두각을 나타냈다.

초등학교 3학년, 1997년의 외환위기는 이상화의 집에도 그늘을 드리웠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운동을 그만둬야 했다. 세 살 위 오빠 상준씨(28)도 여동생과 함께 스케이트화를 벗었다. 아버지는 이상화에게 상대적으로 돈이 덜 드는 피아노를 배우라고 설득하면서 “콩쿠르에서 입상하면 피아노를 제대로 가르치겠다”고 했다.

스피드에 매료돼 스케이트에 빠지다

작은 전자피아노로 연습해 대회에 나가 2등을 했다. 그러나 이상화는 스케이트를 타고 싶었다.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 위를 활주하는 스피드에 매료된 그는 울면서 부모님을 설득해 다시 아이스링크 위에 섰다. 4학년 때까지 쇼트트랙 선수였다가 5학년 때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500m를 41초에 달렸다. 이상화를 본 김관규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팀 감독이 “어떻게 초등학생이 저런 기록을 낼 수 있나 생각했었다”고 말할 정도로 빠른 기록이었다. 국내 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거머쥐었고 국제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집안 사정은 어려워졌다. 이상화의 모교인 휘경여고에서 교직원으로 일하던 아버지의 월급으로는 전지훈련을 한 번 다녀올 때마다 드는 600만~700만원을 대기가 막막했다. 융자를 받아 비용을 마련했다. 어머니는 새벽 네 시면 일어나 도시락을 쌌다. 처녀 때 의상실에서 일하던 기술을 살려 시간이 날 때마다 봉제 일을 하고, 티셔츠 공장에 나가기도 했다.

이상화에게 첫 번째 슬럼프가 닥쳤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춘기의 예민한 시절, 성적이 좋지 않아 혼날 때마다 힘들어했다. 발목 인대의 잦은 부상은 이상화를 더 고통스럽게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전지훈련에서 인대가 끊어질 위기를 겪었다. 한일 교환 경기에 가기 전 종아리 부상을 입었다. 스케이트 날에 찍혀 꿰매야 했다. 주변 모든 사람이 출전을 말렸지만, 누구도 이상화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경기 도중에 실밥이 터졌다. 유니폼이 피로 얼룩졌지만 끝까지 달려 우승을 차지했다. 힘이 들 때마다 가족을 생각하며 버텼다. 부모님이 쏟았던 정성과 마음을 떠올리며 일어섰다. 이상화에게 ‘가족’은 특별한 원동력이었다. 그는 “사춘기에 흔히 일어나는 부모님과의 트러블도 없었다”고 말한다. 선수촌에서 하는 잠깐의 전화 통화가 가족을 이어주는 소통의 전부였기에 마음 놓고 투정을 부릴 수도 없었다.

이상화는 2004년 태릉에서 열린 전국 남녀 주니어 빙상선수권대회에서부터 주목받았다. 앳된 여중생이 칼날처럼 빙판을 가르며 500m 경기에서 40초48의 대회 기록을 수립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한국 여자 빙상의 1인자로 등극한 것이다. 이듬해 10년 만에 메달이 터졌다. 세계종목별빙속선수권에서 이상화는 한국에 값진 동메달을 안겼다.

이상화 선수의 어린 시절 모습. 초등학생 때부터 각종 대회의 우승은 그의 몫이었다. ⓒ 시사저널 이종현
빙상계의 희망, 역사를 쓰다

이상화가 있기 전까지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계는 암울했다. 1960년 김경희와 한혜자가 미국 스퀘밸리에서 열린 8회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이래 20년 넘게 20위권 진입조차 하지 못했다. 유선희가 1992년 알베르빌올림픽에서 처음으로 10위권에 진입했으나 메달권에는 미치지 못했다.

휘경여고 1학년 때인 2004년 겨울 이상화는 태극마크를 달았다. 2006년 드디어 토리노올림픽에 참가했다.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종목이었다. 2차 레이스를 마치고 뜬 전광판의 순위는 3등. 그러나 마지막 조 경기가 끝나자 이상화의 순위는 5등이 됐다. 동메달을 딴 중국의 런후이와는 0.17초 차였다. 1차 시기에 첫 코너링에서 주춤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메달권에 들 수 있는 기록이었다.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며 다음을 기약했다. 메달은 아니었지만 한국 빙상계의 ‘희망’을 땄다.

2007년 한국체대에 입학한 이상화에게 또 슬럼프가 찾아왔다. 기록이 떨어져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밀려났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 8km 산악 코스를 뛰고 170kg의 역기를 들었다. 스케이트 훈련도 모태범·이규혁 등 남자 선수들과 같이했다. “다음 올림픽엔 꼭 메달을 따겠다”던 소녀는 약속을 지켜 2010년 밴쿠버올림픽에서 또 하나의 역사를 썼다.

역대 동계올림픽 사상 ‘빙속 여자 1호 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그동안 피겨스케이팅이나 쇼트트랙에 가렸던 설움이 생각났다”며 이상화는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다. 세계선수권에서도 1위를 했지만 김연아가 금메달을 따자 국민들의 시선이 바로 옮겨갔다. 이상화는 온 국민을 이상화에, 스피드스케이팅에 주목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소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냄으로써 올림픽 2연패의 위업을 달성했고, ‘빙속 여제 이상화’의 이름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이상화가 벌이는 또 다른 싸움의 대상은 ‘부상’이다.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허벅지까지 올라온 하지정맥류를 수술하는 것도 미뤘다. 하지정맥류는 서 있을 때 악화될 뿐 아니라 다리가 붓고 쥐가 자주 나는 등 스케이팅 선수에게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운동을 할 때마다 퉁퉁 부은 다리를 마사지해가며 소치올림픽을 마친 후에 수술을 하기로 했다. 2011년 아시안게임 이후부터는 무릎의 추벽증후군도 문제였다. 이상화는 “왼쪽 무릎에 물이 차 재활을 병행하며 운동하고 있다. 수술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고 밝혔다.

‘네일아트’ ‘레고 조립’이 취미

이상화는 취미로 ‘네일아트’를 꼽는다. 선수로서 꾸밀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손톱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끝난 후 코치와 하이파이브를 할 때도, 금메달을 거머쥔 손에서도 ‘금색’ 네일아트가 빛났다. 또 경기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을 이겨내고 안정을 취하기 위해 레고 조립을 한다. 이상화의 방에는 퍼즐로 이뤄진 액자들이 있다. 빙상 위 여제의 아기자기한 취미들이다.

SNS에 셀카를 자주 올리는 ‘청춘’이지만 “단거리 선수가 되려면 허벅지가 더 굵어져야 한다”며 남자들도 힘겨워하는 고중량의 스쿼트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상화가 밴쿠버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지 2년 만에 가족들은 본래 살던 오래된 연립주택에서 장안동의 43평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 아파트에 이상화를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주민들은 플래카드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며 이상화의 선전을 함께 축하했다.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들은 맨발로 스케이트를 탄다. 스피드스케이팅은 순위 싸움인 쇼트트랙 스케이팅과 달리, 기록을 0.01초라도 단축해야 하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양말을 신고 스케이트를 타면 스케이트와 양말 사이에 마찰이 생길 수 있어 기록 단축이 어렵다. 또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발의 감각을 최대한으로 살리려면 양말을 신지 않는 것이 좋다.

경기를 마친 뒤 스케이트를 벗는 이상화 선수의 맨발은 온통 굳은살로 뒤덮여 있었다. 뒤꿈치는 크고 작은 물집과 상처들로 가득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어떤 신발보다 자주 신은 스케이트화가 이상화에게 남겨준 훈장이다. 그간의 연습과 노력을 짐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발’. 그 발로 이상화는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이상화, 광고계의 신데렐라로 뜨다 


이상화는 광고계의 ‘블루칩’으로 각광받게 될 전망이다. 기아자동차는 올림픽 직전 이상화와 자사 K5 터보의 경주 영상을 공개해 눈길을 끈 바 있다. IOC 규정에 따라 공식 후원사가 아닌 기업은 올림픽 기간에 선수를 주인공으로 한 광고를 내보낼 수 없어 현재는 이상화가 등장하는 기아차 광고를 브라운관에서 볼 수 없는 상태다.

기아자동차와 KB금융지주의 전속 광고 모델로 활동 중인 이상화의 광고 출연료는 1년 전속 계약을 기준으로 2억원에서 3억원 정도다. 그러나 이번 소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면서 광고료가 5억원 수준으로 뛸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지금까지의 어려움을 딛고 성공 신화를 이뤄낸 이상화의 잠재력이 광고 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평가다. 피겨선수인 김연아는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2007년 초부터 지금까지 광고 시장을 지배하며 편당 10억원대의 광고 수입을 올렸다. 소치에서 확실한 눈도장을 받은 이상화도 김연아 못지않을 전망이다.

지난 1월에는 남성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공개한 이상화의 여성스러운 화보가 눈길을 끌었다. 하얀 셔츠만 입은 채 하의 실종 패션을 선보이고, 검은 드레스를 입어 몸매를 드러내기도 했다. 평소 스케이트복과 고글을 착용한 채 아이스링크를 누빌 때와는 다른 이상화의 새로운 모습에 사람들의 관심은 폭발했다.

그러나 ‘선수’ 이상화는 “나는 운동선수다. 화보보다  경기 결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했다. 그리고 소치올림픽에서 그는 가장 멋진 모습으로 빙판을 질주했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눈물을 흘리는 이상화의 모습은 화보보다 더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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