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신화, 우리들 이야기의 강 흐르다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4.10.07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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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에서 히말라야까지 현장 기록한 공원국 작가

“길이 이어져 있듯 이야기는 모두 이어져 있고, 세상의 모든 문명 지대는 거미줄처럼 이어진 길 위의 한 점에 위치한다. 그러나 오늘날 길은 국경으로 인해 너무나 자주 끊어지고, 길이 끊어진 곳에서는 여지없이 분쟁과 학살이 벌어지며, 우리의 상상력은 그 분단선에 가로막혀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다.”

최근 <유라시아 신화 기행>이라는 책을 엮은 공원국 작가(50)는 결국 인문학자로 남아야 했다. 잠깐 등반장비 업체를 경영하기도 했지만 가야 할 길은 따로 있었다. 책에서만 얻는 정체된 지식이 아닌 살아 있는 지식을 얻고자 거친 길 위의 삶을 택했던 지점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 그에게 지인들은 ‘여행하는 인문학자’라는 별칭을 달아주었다. 그를 서울 경희궁에서 만났다.

“문명의 편견 끊어야 국경과 분쟁 없애”

<유라시아 신화 기행>은 모든 문명의 편견을 넘어서 그 끊긴 길을 이으려고 떠난 여행의 결과물이다. 그는 2012년 5월 봄부터 11월 늦가을까지 중국-몽골-러시아-우크라이나-터키-조지아-이란-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인도에 이르는 유라시아 신화와 서사시의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스무 날 동안 시베리아의 심장부를 자전거로 달리고, 카르파티아의 깊은 산중에서 우정을 배우고, 엘부르즈 산맥 최고봉 다마반드에서 이란 청년과 혁명을 이야기하고, 파미르 고원에서 만난 아이의 눈물에서 사랑을 체험하고, 신들의 나라 인도에서 카스트를 탐사하며 아이들의 맑은 눈에서 희망을 마주했다. 

ⓒ시사저널 구윤성
“호쾌한 여행이었다. 툰드라, 사막, 우림을 비롯해 해수면보다 더 낮은 곳에서 눈 덮인 지구의 지붕까지, 걷고 또 걸으며 보이는 것을 보고 들리는 것을 들었다.”

공 작가는 20대의 막바지에 안정된 미래를 준비하는 대신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중국 오지로 여행을 떠났다. 역사적 기록이 객관을 가장하면서 의도된 침묵과 추측으로 변방의 역사를 왜곡했기에 직접 현장을 찾아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살아 있는 지식을 체득하러 간 것이다. 10여 년간 중국 서부를 탐험한 그는 유라시아 전역으로 탐구 범위를 넓힌다.

공 작가는 왜 그 길에 들어섰을까. 갓 태어난 아들을 두고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아이가 두 팔을 활짝 펴야 안을 수 있는 이야기책 더미를 만들 거야. 우리가 서 있는 대륙의 모든 이야기가 들어 있는 책 말이야.”

아이를 위한 <유라시아 신화 전집>을 만들려던 공 작가의 꿈이 본격적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어른을 위한 전집을 먼저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공 작가는 그 제안에 따라 만주에서 시작해 몽골 고원과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흑해와 캅카스를 돌고, 아나톨리아와 이란 고원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통과해 중국으로 들어가고, 다시 히말라야 남쪽의 인도 대륙까지 여행을 떠났다.

공 작가는 중국 서부 탐험에서처럼 승자에 의한 기록의 폭력성을 경계하며, 기록을 남긴 사람이나 기록 없이 사는 사람 모두 똑같이 지혜로웠음을 이야기한다. 그는 “어떤 이야기는 잊혔고 어떤 이야기는 기록되고 전승됐지만 그것마저도 우연에 의한 것이다”고 설명한다.

“몽골 초원과 시베리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중국, 인도와 동남아시아 권역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나누지만 그저 편의상 구분일 뿐이다. 알타이는 몽골 고원을 넘어 한반도로 이어지고, 다시 투르크를 통해 유럽-페르시아 세계로 연결된다. 페르시아는 유럽을 인도-투르크로 연결하고, 파미르와 히말라야의 낮은 봉우리를 따라 중국과 인도가 이어진다. 인도는 해안을 따라 동남아시아와 이어지고, 동남아시아는 북쪽 산길을 따라 중국과 이어진다. 이처럼 길이 이어져 있듯 이야기도 모두 이어져 있다.”

“유라시아 사람을 친구처럼 다가오게”

공 작가는 자신이 신화에 천착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개인을 위해서든 사회를 위해서든 창조성을 기반으로 한 질적 도약이 절실히 필요한 때에 가장 원시적인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신화는 인간 정신의 원초적인 부분을 구성하는 인자이며 인문학적 상상력의 기반이다. 그러므로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 사는 우리가 유라시아 신화를 창조적 상상력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공 작가는 시베리아 곳곳에서 백인 러시아의 약탈과 학살의 흔적을 마주하고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와 원주민 차별 등 여전한 부조리에 분노하지만 나그네에게 하룻밤 안식처를 제공해준 알렉산드르, 물고기와 순록 고기를 아낌없이 내어준 코미 족 할머니, 길에서 만난 수많은 선량한 농부의 모습에서 위로를 받는다.

서로 돕는 이는 모두 영웅이며 빛을 내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초원의 지혜가 담긴 북두칠성 이야기, 이기기 위해 경쟁하지만 막상 경쟁자 없이는 홀로 설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타이가의 삼림, 인간은 달리고 모음으로써 강해지지만 멈추고 나눔으로써 완성됨을 말해주는 사냥꾼 이르카프의 전설, 썩은 나무도 함부로 자르지 않는 우데게 족의 믿음은 무엇이 진정한 ‘문명’인가를 묻는다.

“나의 꿈이라면 이 땅의 어린아이들을 이야기의 강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가슴에 광대한 유라시아 사람이 친구로서 다가오도록 돕는 것이 내 야심의 전부다. 친구를 파는 가게는 어디에도 없으므로 어린 왕자처럼 우리는 친구에게 다가가 정성을 쏟아야 한다. 인문학이란 결국 사람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배우는 과정일 뿐인데, 우리가 들인 정성만큼 우리는 남을 사랑하고 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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