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취한 자의 오만이 성추행 불러
  • 김윤태│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
  • 승인 2014.11.1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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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형 성범죄의 사회학…남녀 차별 큰 사회일수록 많아

1986년 군사정권 시절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폭로됐다. 피해자는 스물두 살의 서울대 여학생 권인숙씨였다. 그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경찰서에서 끔찍한 성고문을 당했다. 너무 수치스러웠지만, 다른 여성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경찰관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성고문 경찰관은 무고죄로 맞고소를 하며 독재 정권의 보호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나중에 다시 구속돼 징역 5년을 선고받은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였다.

권인숙씨는 나중에 대학교수가 된 후 <대한민국은 군대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1980년대 가장 진보적이었던 학생운동도 군대식 문화와 가부장적 관계를 유지했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또한 한국 사회 전체가 군사화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의 군사화는 1960년대 이후 반공주의와 같이 대중적인 동의를 통해 전 사회적 차원에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해 지배한다는 가부장주의와 성차별주의가 지속적으로 재생산됐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성접대를 받은 장소로 알려진 강원도 원주시의 한 별장. ⓒ 시사저널 임준선
권력형 성범죄가 증가하는 이유

지금도 한국의 많은 사람은 남자와 여자가 고유한 ‘성 역할’을 따로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생물학적 성 구분에 따라 남자는 능동적이라고 간주하는 반면, 여자는 수동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남자는 여자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할 수 있는 반면, 여자는 남자의 구애를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로 그려진다. 이런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에 관한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여자가 ‘야한 옷’을 입기 때문에 성범죄가 늘어난다는 말도 어느 서울대 의대 교수의 입에서 나왔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진화심리학자 도널드 시먼스는 “일부 유인원을 제외하곤 동물 세계에서 강간은 없다”고 단언했다. 성범죄는 인간의 문화적 결과라는 것이다.

한국의 성범죄율은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다. 증가 속도도 매우 빠르다. 2000년대 초반에 비해 거의 두 배 늘어났다. 최근 성범죄가 많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한국 사회의 도덕성이 날로 추락하고 있다고 본다. 정말 그럴까. 성범죄가 증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범죄에 대한 신고가 급증하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에도 성추행은 엄청나게 많았지만, 힘없는 여성 피해자들은 제대로 신고할 수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여성 피해자들이 참지 않는다. 여성의 의식이 변화하면서 성범죄에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의 변화와 달리 남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 사회의 성범죄는 우발적이거나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사회적 성격을 갖는다. 특히 검찰총장, 국회의장, 군 장성 등 권력층 남자들의 성추행이 그렇다. 높은 지위를 가진 남자 중 일부는 자신들의 성추행 범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피해 여성이 제대로 저항하거나 신고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실제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저지른 성범죄는 은폐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직장 상사와 학점과 논문 통과의 권력을 악용하는 대학교수의 범죄에 당당하게 맞서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추행 피해 여성의 신고는 남성이 지배하는 조직에서 무시되거나 오히려 체계적인 보복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을 악용하는 남자는 성추행을 상습적으로 저지르고, 심리적으로 위축된 피해 여성은 어쩔 수 없이 순응하거나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최악의 덫’에 빠져들기도 한다.

성추행 피해 여성의 직업은 대개 사회적 약자다. 골프장 캐디, 여학생, 계약직 직원, 여군 부사관 등 대부분 성범죄 남성에 비해 지위가 낮다. 남자의 직속 부하인 경우도 많다. 이러한 위계적 권력 관계는 권력을 가진 남성의 오만을 키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신의 영역을 넘보는 오만을 ‘휴브리스(hubris)’라고 불렀다. 델피 신전에 적혀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는 휴브리스에 빠지지 말라는 말이다. 영국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 신화에 젖어 휴브리스에 빠질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다. 자신이 가진 권력에 취한 남성은 성적 농담, 신체 접촉, 성추행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자신의 우월한 권력을 앞세운 위험한 일탈이 결국 범죄가 된다.

한국 사회의 성차별주의는 사회적 차원에서 재생산된다. 남녀의 사회적 지위의 격차가 너무 크다. 2014년 기준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약 53%로 세계 최하위권이다. 자녀 출산, 보육을 지원하는 복지제도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를 가진 여성이 경제활동을 하기는 매우 힘들다. 남녀의 임금 격차도 크다. 고용부에 따르면, 2013년 여성의 임금 수준은 남성 임금을 100으로 볼 때 70.5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다. 많은 기혼 여성이 비정규직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 가운데 정규직 비율은 절반 수준에 그치기 때문이다.

남녀 격차가 더 큰 원인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2년 세계 젠더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젠더 격차 지수는 135개국 중 108위였다. 보고서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같은 일을 하는 남녀 간 임금 차이, 성별 문자 해독률, 초·중·고등교육을 받는 비율, 출생 성비와 기대수명, 의회 의석 수, 각료직 여성 비율과 최근 50년 동안 국가수반에 여성이 재임한 기간 등을 평가해 점수를 매긴다. 2014년 기준 한국의 남녀 각료 비율(12%), 남녀 국회의원 비율(16%)은 최하위권이다. 남녀 차별이 큰 사회일수록 성범죄는 더욱 커질 것이다.

권인숙 교수는 <대한민국은 군대다>라는 책에서 성폭력이 성폭력을 당하는 사람을 두 가지 의미에서 ‘여성화’시킨다고 지적한다. 성범죄 피해자를 주로 여성들이 겪는 성적 대상으로 환원시키고, “폭력을 당하는 약자”라는 의미를 더하면서 여성화시킨다. 이 속에서 “위계질서가 확인되고 자신들의 공격적 남성성을 확인하는 집단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결국 남성과 여성 사이에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 여성은 다시 대상화되면서 ‘약자의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성폭력 남성에 대한 엄벌로는 성범죄가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남녀 차별을 바로잡는 노력이 더 중요한 예방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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