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허락 받고 우리 이름 쓰는 거야”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5.01.2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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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LG·SK, 유사 상표 사용한 업체들에 소송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위치한 식당 장비 업체 A사는 최근 삼성전자로부터 한 통의 서류를 받았다. ‘삼성’이 들어간 상호와 간판을 당장 내리라는 내용이었다. A사는 1985년 설립된 회사다. 그릇·숟가락에서부터 대형 냉동 장비, 가스레인지까지 식당 장비를 전문적으로 납품하는 회사다. 지난 30년간 삼성이란 상호를 사용했음에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업이 겹치는 것도 아니어서 삼성의 통보를 받고 적지 않게 당황했다.

삼성 측은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법적 대응에 나설 수 있다고 경고했다. A사는 결국 수십 년간 키워온 브랜드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재벌 기업과 맞섰다가 회사 문을 닫는 경우를 주변에서 종종 봐왔기 때문이다. 매머드 기업인 삼성과 부딪쳐서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A사는 1월 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회사 상호를 바꿨다. 수십 년간 사용해온 간판도 바꿔 달았다. 하지만 불만이 없을 수 없다. 김 아무개 대표는 최근 지인들에게 “회사 규모가 비교도 되지 않고 업종도 다른 영세 업체의 간판까지 내리려는 삼성 측의 저의를 모르겠다”며 “법률 서류를 받고 고심을 거듭하다 상호를 내리기로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 일러스트 오상민
업종 겹치지 않으면 놔두는 게 관행

삼성그룹 측은 “사명에 삼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A사를 압박한 것은 아니다”고 강조한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A사가 삼성의 관계사인 것처럼 주변에 말하고 다닌다는 제보를 여러 차례 받았다”며 “삼성의 브랜드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한 조치였다. A사와도 합의서를 작성한 만큼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해명했다.

실제로 삼성·LG·SK 등 주요 그룹들은 그동안 자사 상호나 로고를 차용한 업체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구두 경고를 하거나 소송을 제기했다. 삼성그룹은 2011년 1월 삼성의 로고나 유사한 로고를 사용해 계열사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킨 업체 300여 곳에 내용증명을 보냈다. LG그룹은 2008년 5월과 8월 자사 브랜드를 무단 도용한 엘지항공과 LG건설, 엘지상재 등 7곳을 상대로 상표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에는 LG 브랜드를 도용한 대부업체를 상대로 상표권 침해 금지 소송을 제기해 10억원 배상 판결을 받았다. SK그룹도 최근 자사 브랜드 무단 사용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대부업체에 시정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종이 겹치지 않거나 규모가 영세한 경우 특별한 제재를 가하지 않는 것이 그동안의 관행이었다. 이런 기조는 최근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로고 도용이나 계열사 사칭 등으로 브랜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지 않는 경우 묵인하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상표 사용의 권리를 어디까지 봐야 하는지는 논란거리”라며 “그동안에는 업종이 겹치지 않을 경우 눈을 감아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말했다.

삼성그룹은 1993년 현재 사용하는 영문 오벌(Oval·계란형) 마크를 등록했다. 이전에 등록한 ‘삼성’ ‘三星’ ‘Samsung’ 등은 다른 업체들도 상당수 특허청에 상표 등록을 마친 상황이었다.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사명이나 상호에서 “삼성을 빼라”고 밀어붙이기 부담스러운 처지다. 먼저 상표를 등록한 기업들도 있고, 자칫하면 대기업의 횡포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최근 이재용 부회장 체제로의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 부회장은 현재 와병 중인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그룹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 부회장은 팀 쿡 애플 CEO와 만나 특허 소송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특허 소송으로 중단됐던 D램 반도체 공급 역시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블룸버그는 “이 부회장이 글로벌 협력 관계를 강화하면서 삼성의 새로운 시대를 이끌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이 A사에 법적 대응까지 언급하며 간판을 내리도록 한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재계에서는 “삼성을 필두로 주요 그룹들이 본격적인 브랜드 단속에 나선 것 아니겠느냐”는 시각을 보인다. 버버리·샤넬 등 해외 명품업체들은 최근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을 상대로 잇따라 소송을 제기했다. 버버리는 2010년 충남 천안의 한 노래방이 버버리 이름을 사용했다며 2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는 노래방 업주가 이겼지만 항소심에서는 버버리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프랑스 대표 럭셔리 브랜드인 샤넬 역시 지난해 5월 자사 상표인 ‘CHANEL’을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국내 기업에 소송을 진행해 승소한 바 있다.

국내 대기업들의 기조 역시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다. 겉으로는 “영세 업체들까지 손볼 계획은 없다”거나 “브랜드 이미지에 치명적인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상관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2007년 중소기업인 삼성산업을 상대로 특허 소송을 벌였다. 삼성산업은 1995년 설립된 건설 기자재 납품업체다. 2003년 특허청에 상표 등록을 내자 삼성은 특허심판원에 특허 취소 청구를 냈다. 삼성그룹이 ‘삼성’ ‘三星’ ‘Samsung’을 먼저 등록한 만큼 삼성산업에서 ‘삼성’을 빼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특허심판원은 최근 삼성의 손을 들어줬고, 삼성산업은 삼성의 ‘S’와 산업의 ‘I’를 조합한 ‘비전SI’로 사명을 변경했다.

LG그룹 역시 2008년 8월 환기 송풍기 업체인 LGT와 LGD, LGB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들 회사의 사명이 계열사인 LG텔레콤과 LG디스플레이로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LG그룹은 1998년 환기 송풍기 사업을 접은 상태여서 과민 대응 아니냐는 뒷말이 나왔다. 최근 삼성이 영세 업체인 A사를 상대로 엄포를 가한 것도 그동안 취해왔던 조치의 연장선이라고 재계에서는 보고 있다.

10개 그룹 상호 차용 55만72곳

시사저널이 최근 한국전화번호부의 데이터베이스(DB)에 등록된 상호를 분석한 결과도 비슷했다. 그에 따르면 삼성·LG·현대·동부·롯데 등 10개 그룹의 이름을 회사나 가게 상호로 사용하는 곳은 전국적으로 55만72곳에 이른다. 이 중 삼성을 상호에 넣은 업소가 30.1%(16만5760곳)로 가장 많았다. 뒤를 이어 현대 28.8%(15만8399곳), 롯데 9.1%(5만230곳), 동부 9%(4만9595곳), SK 6.2%(3만4003곳), LG 5%(2만7638곳), 금호 4%(2만1791곳), 한화 3.2%(1만7528곳), GS 2.3%(1만2669곳), 한진 2.3%(1만2461곳) 순이었다. 대부분은 대기업의 인지도에 편승해 유사 상표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기업들의 공세가 본격화할 경우 이들 영세 업체는 상호를 바꿀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경영난이 더욱 가중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김혜숙 특허청 상표심사정책과 사무관은 “최근 샤넬과 버버리의 소송으로 상표권 침해 소송이 주목받고 있다”며 “일률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주요 판례로만 보면 영세 업체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기업 스스로 브랜드 관리 개선해야” 


상표권 분쟁은 다른 기업이나 그룹 간에 벌어지는 문제만은 아니다. 롯데관광은 최근 ‘롯데’라는 브랜드를 두고 롯데그룹과 법적 다툼을 벌였다. 대성그룹에서 분리된 대성합동지주와 대성홀딩스주식회사도 경쟁적으로 ‘대성’이라는 상표를 특허청에 출원했다. 이후 상대방을 향해 상표 사용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14년째 법적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삼성의 경우 CJ나 한솔 등 방계 기업도 현재 ‘삼성’ ‘三星’ ‘SAMSUNG’ 등의 상표를 출원해 보유하고 있다. 향후 3세나 4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상표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태다.

무엇보다도 대기업 스스로가 상표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허청에 따르면 상표법상 타인이 먼저 등록한 상표와 유사한 상표는 등록할 수 없다. 그룹 계열사라도 법인이 다르면 상표법상 타인에 해당한다. 하지만 수많은 대기업 계열사가 사실상 그룹 명칭을 포함한 상표를 사용하고 있다.

일례로 범(汎)현대가는 2000년 발생한 ‘왕자의 난’을 전후로 8개 그룹으로 쪼개졌다. 이들 그룹 계열사 중에서 ‘현대’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계열사만 100여 곳에 이른다. 이런 추세로 가다 보면 ‘현대’는 아무나 써도 되는 브랜드로 전락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롯데그룹 역시 74개 계열사 중 12개 계열사에 상표권이 분산돼 있다. 일본에서 주식회사 롯데가 ‘롯데’ 상표권을 일원화해서 관리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브랜드 희석이나 상표 가치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재벌 그룹이 2세 혹은 3세, 4세 체제로 핵분열되는 과정에서 이런 현상이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특허청은 최근 상표 심사 지침을 발표했다. 그룹 계열사의 상표권이 하나의 지주회사로 일원화되지 않으면 새로 설립되는 회사는 상표 등록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박호형 상표디자인심사국 상표심사정책과장은 “향후에는 대기업 그룹 명칭이 들어간 상표는 하나의 관리회사가 일괄적으로 관리하도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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