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군단이 문화의 젖줄 되다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5.05.13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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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공연·음반 제작에 크라우드 펀딩 붐

가수 서태지는 지난해 10월 9집 발매 기념으로 컴백 콘서트를 가졌다. 2009년 발매한 정규 8집 이후 5년 만이다. ‘문화 대통령의 귀환’을 학수고대하던 팬들이 서울 올림픽주경기장에 몰려들었다. 서태지가 히트곡을 부를 때마다 2만5000명의 관객은 함성을 쏟아냈고, 비트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5년 만에 서태지를 불러낸 곳은 대형 기획사나 엔터테인먼트 전문 투자회사가 아니다. 밸류인베스트코리아라는 이름 없는 회사다. 이 회사의 주요 고객은 개미 투자자들이다. 회사는 개미 투자자들의 돈을 모아 유망 기업이나 문화 콘텐츠 등에 투자한다. 투자 수익이 나면 투자자들에게 다시 배당하는 구조다. 일종의 ‘개미 군단’인 셈이다. 서태지의 컴백 콘서트 역시 이런 방식으로 투자금을 유치했다. 개인투자자 500여 명으로부터 총 투자비의 절반을 펀딩받았다.

서태지 공연 ⓒ 뉴시스
외국에서는 이미 크라우드 펀딩이 벤처기업이나 스타트업 기업의 새로운 자금줄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 스마트워치 2위 업체인 미국의 페블은 올 2월 크라우드 펀딩업체 킥스타터를 통해 하루 만에 600만 달러를 펀딩받았다. 영국의 조파닷컴은 개인 대출형 펀딩 서비스로 1조원 넘는 대출을 기록하고 있다.

유명 게임업체 적대적 M&A 막아

국내에서도 최근 크라우드 펀딩이 벤처기업의 자금줄로 자리 잡고 있다. 국내 제약업체 최초로 항암 바이러스를 이용한 간암 치료제를 개발한 신라젠과 게임업체 블루사이드 등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초기 투자금을 조달했다. 블루사이드의 경우 한때 해외 헤지펀드로부터 적대적 M&A(인수·합병) 위협까지 받았다. 하지만 밸류인베스트코리아로부터 200억원을 투자받으면서 위기를 넘겼다. 이철 밸류인베스트코리아 대표는 “투자 대상은 선정 단계에서부터 엄격하게 진행된다. 기존에 알려진 크라우드 펀딩에서 한 단계 더 진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계에도 크라우드 펀딩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6월11일 개봉 예정인 영화 <연평해전>이 한 예다. 이 영화는 2002년 북한 경비정이 한국 해군 함정을 선제공격하면서 일어난 제2연평해전을 다루고 있다. 30분간의 치열한 교전 상황을 재연할 예정이어서 개봉 전부터 관심을 끌었다. 1차 예고편이 공개되자마자 조회 수 200만을 돌파했다. 제작 과정에서 자금이 부족했지만, 크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20억원가량을 끌어모아 영화 제작을 마칠 수 있었다. 허남웅 영화평론가는 “과거의 경우 독립영화나 이념 성향이 있는 영화를 제작할 때 크라우드 펀딩이 도입됐다”며 “요즘에는 대작 영화로 펀딩 개념이 확대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실제로 2012년 개봉한 영화 <26년>은 300만명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다뤘다는 이유로 갑작스럽게 투자가 철회됐다. 국내 최대 기업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직원 가족들의 힘겨운 싸움을 다룬 <또 하나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국내 유력 대기업의 문제를 꼬집는 영화여서 투자처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 크라우드 펀딩이었다. 학생과 직장인 수천 명으로부터 조금씩 자금을 모아 영화를 개봉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공연이나 음반 제작, 지방 축제에도 크라우드 펀딩 개념이 도입되고 있다. 가수 제이워크의 음반과 세바스치앙 살가두 사진전 ‘GENESIS’, 경기도 가평에서 열린 ‘자라섬 불꽃축제’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국회 정무위는 2013년 6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 관련 법률 개정안(일명 크라우드 펀딩 입법)을 발의했다. 이 법은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추진해왔다. 2년 가까이 표류하다 최근 국회 정무위원회를 통과했다. 현재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있다. 고영하 고벤처포럼 회장은 “기술의 발전 속도에 비해 법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한 면이 있다”며 “크라우드 펀딩은 민간 자본을 산업자본에 흘러가도록 길을 터주는 것인 만큼 본회의 통과도 문제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철 밸류인베스트 코리아 대표 ⓒ 시사저널 최준필
이철 밸류인베스트코리아 대표는 국내 크라우드 펀딩업계의 선두 주자로 꼽힌다. 개미 투자자들로부터 유치한 자금만 수천억 원에 이른다. 이 돈은 다시 국내의 유망 벤처업체나 문화 콘텐츠에 재투자되고 있다.

이 대표는 크라우드 펀딩을 ‘프로슈머(Produce+Consumer)’에 비유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얼리어답터(early-adopter)’들이 한국 전자제품의 성장을 이끌었다. 한국 소비자들은 해외 유명 브랜드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얼리어답터에서 한 단계 진화한 것이 프로슈머다. 이들은 현재 기업과 일반 소비자 간의 쌍방 커뮤니케이션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대표는 “프로슈머의 개념을 금융 시장에 도입한 것이 크라우드 펀딩”이라며 “단순히 펀드에 돈을 묻어놓는 것이 아니라 투자자들이 직접 투자 대상을 결정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가 자회사인 밸류컬처앤미디어를 통해 문화 콘텐츠에 투자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국내 가전회사의 경우 초창기에는 기술이나 제품력에 목숨을 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콘텐츠로 승부를 본다. 문화 콘텐츠 투자 역시 장기적인 안목에서 진행하고 있다. 이 대표는 “당장 수익이 나지 않아도 문화 콘텐츠에 꾸준히 투자하고 있다”며 “시장이 무르익으면 콘텐츠를 통해 수익 모델을 창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크라우드 펀딩이 금융사기 등 각종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이런 이유로 최근 국회 정무위를 통과한 개정안은 규제 일색이다. 이 대표도 이 부분에 대해 아쉬움을 표시한다. 그는 “크라우드 펀딩 자체가 국내 자본 생태계의 선순환을 위해 마련됐다”며 “시장이 성숙되면 관련 규제 역시 완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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