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과의 대화] “비참하게 살아갈 가족이 안타까워 죽였다”
  • 배상훈 | 서울디지털대 경찰학과 교수 (프로파일러) (.)
  • 승인 2015.12.17 18:46
  • 호수 1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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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가장이 아내와 두 딸 살해…강남의 특권층 삶 잃을까 두려웠나

2015년 1월6일 한 40대 가장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아내와 두 딸을 목 졸라 살해한 ‘서초동 세 모녀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피의자 강 아무개씨는 유서 내용과 119 신고, 조사 과정에서 일관된 진술을 했다. 현재의 곤궁한 삶을 견디지 못해서, 그리고 앞으로 비참하게 살아가야 할 가족이 너무 안타까워서 아내와 두 딸을 죽였다는 것이다. 2012년 잘나가던 IT(정보기술) 대기업에서 실직한 그는 이후 아파트를 담보로 5억여 원을 대출받아 주식 투자에 나섰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패한 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가족과 함께 삶을 끝내려 했다고 주장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동반 자살’(‘가족 살해 후 자살’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이 너무나도 흔한 일이 돼버려서 신문 사회면 메인에도 오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사건 역시 사건 자체만으로 보면 그리 특별할 게 없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건 속으로 깊이 들어가보면 그동안 발생했던 중산층이나 하층의 생활고 비관 자살과 크게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가족 살해 당시의 정황을 좀 더 살펴보면, 강씨는 강남 한복판에 있는 44평 규모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었고 일제 중형차와 국산차 등 총 두 대의 자동차를 갖고 있었다.

ⓒ 일러스트 오상민

실직한 후에도 부인에게 생활비로 매달 400만원 정도를 가져다줬으며,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받은 돈 중 1억원 정도가 남아 있었다. 여기에다가 아내의 통장에는 현금으로 3억원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44평의 아파트는 시가로 최소 11억원 정도라고 하니 만약 매각을 하면 5억원의 대출을 전부 갚고도 최소한 5억원 정도가 남을 수 있다. 이전에 비해 부족할지 모르지만 얼마든지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강씨는 스스로를 ‘곤궁하다’고 하고 ‘비참하다’고 했다.

‘강남 이탈’에 대한 공포가 불안·강박으로

월급 200만원, 연봉 2500만원을 받는 사람이 매년 1500만원을 저축한다고 했을 때 30년이 걸려야 5억원 정도를 모을 수 있다. 그런데 40대에 그러한 돈을 손에 쥐고도 스스로 곤궁하고 비참하다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무엇이 그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을까. 강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그는 ‘강남’이라는 곳에서 ‘특권층’으로 살아온 ‘강남 사람’이다. 강남에서 태어나 강남에서 사교육을 받아 강남의 초·중·고를 나왔고, 명문대를 졸업한 후 그 연줄로 대기업에 취업했다가 IT기업으로 직장을 옮겼다.

강씨의 부모도 강남에 살며 고학력자다. 그의 처가 또한 강남에 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 회사 동료들, 하다못해 종교를 공유하는 사람들 등 그와 연결된 거의 모든 사회적 관계는 강남으로 집결된다. 그가 강남을 떠나 살 수 있었을까. 그의 아이들도 부모가 살아온 삶을 이어받아왔다. 지금까지 누려온 강남 중산층의 삶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엄청난 절망감을 느꼈을 수 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면 평생을 감옥에서 살던 ‘부룩스’라는 좀도둑이 가석방 결정에 절망해 동료 재소자에게 상처를 입히려 한다. 결국 가석방됐는데 감옥이라는 통제된 시스템에 익숙해져버린 그는 너무나도 변해버린 외부 세계에 적응하지 못해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강씨는 강남을 벗어나 산다는 것을 적응하지 못할 외부 세계로 떠밀려나가 사는 것이라고 여겼을 수 있다. 그는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강남’이라는 기형적인 괴물 속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왔다. 스스로 말하듯 강남에서 별 큰 어려움 없이 유복하게 살아온 것이다. 그런 그에게 강남을 떠난 삶 자체가 ‘루저’로의 추락을 의미했을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강남’은 무엇일까. 얼마 전 현직 강남구청장의 ‘강남자치구’ 발언에서도 볼 수 있듯 강남은 우리 사회 특권의 정점에 있다. 부와 권력의 정점이며, 이를 재생산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의 정점이다. 그 교육 시스템이 바로 강남의 사교육과 연결된다. 이 지점에서 바로 한국 사회의 특권 재생산과 독특한 가족주의가 교묘하게 연결된다. 부와 권력 등 특권이 가족을 통해 재생산되는 사회인 것이다. 가족주의와 사교육은 떼어낼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가족주의는 발전국가 시스템에서 일정 정도 그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회와 같은 공적인 영역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게 만든 걸림돌이 됐다.

이론적인 관점에서 발전국가의 성장 프로세스 차원에서 볼 때 혈연·지연을 중심으로 학연이 연결되는 폐쇄 구조는 일정 단계까지는 발전의 촉진제가 되기도 하지만, 일정 단계를 넘어서면 그 자체가 폐쇄와 고립, 특권과 반칙, 불통과 억지의 부작용으로 변화한다. 그러기에 그 영역에 들어가려고 비정상적인 방법까지도 사용하고, 또한 그 영역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가족주의의 경계선에는 필연적으로 ‘동반 자살’이라는 비참한 결말이 내재돼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만의 강남이라는 특권을 가지고 그 외의 사람들을 배제해버리는 시스템에서 강남에서의 이탈에 대한 공포가 거대한 불안이나 강박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공포가 결국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 폭력이라는 형태로 발현된 것이다.

폭력이 외부로 향할 때는 타인을 무자비하게 짓밟게 되고 내부적으로 향할 때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 여기에서 자기 자신에는 같은 영역에 속한 가족도 포함된다. 자신의 지위가 불안해질수록 무자비하고 과도한 방식의 폭력이 행사된다. 한 번 넘어진 사람은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무자비하게 밟아버린다. 가장 만만해 보이는 특정한 사람은 타깃이 돼 집중적으로 이지메(왕따)를 당한다. 이게 진짜 폭력이다. 이 과정에서 모든 사람이 괴물로 변해간다.

가족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힘을 잃고 지위가 불안할수록 아주 단순한 곳에 기대게 되는데 그 단순한 것이 바로 혈연·지연 같은 것이고 그 정점이 바로 가족이다. 가족만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공적인 신뢰가 무너진 사회일수록 사적 영역인 자신의 핏줄만을 믿게 된다. 문제는 사적인 신뢰 자체가 제한된 정보와 자원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제한된 소수를 제외하고는 재생산의 안정성을 보장해줄 수 없다고 여긴다. 이마저 무너지면 이제 선택의 자유는 없다. 유일한 길은 판을 다시 짜는 것이다. 판을 다시 짠다는 것은 자신과 주변 상황을 파산 상태로 만든다는 의미다. 그래서 가족을 모두 죽이는 것이다.

사건 당시 구체적인 상황은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고 한다. 강씨는 우선 수면제를 먹인 아내를 죽인 후, 작은딸부터 목 졸라 살해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체가 발견된 현장 상황을 보면 큰딸이 약에 덜 취해 깨어나 아빠의 악마 같은 모습을 보고 도망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씨가 도망간 방에까지 따라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큰딸을 죽인 것으로 보인다. 평소 애정을 쏟았던 자녀를 자기 손으로 살해하는 심리는 ‘거울 효과’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자녀의 얼굴에서 자신의 못나고 비참한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못 견뎠을 것이다. 그가 비참하게 남은 삶을 살게 될 딸들이 가여워서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딸들이 아닌 자기 자신이 비참한 삶을 살게 될까 두렵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가족문화가 자녀를 마치 부모의 소유로 인식하도록 만든다고 얘기한다. 자신의 소유로 여기니까 마음대로 죽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소유의 개념보다는 거울 효과로 설명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소유라고 생각했다면 굳이 도망가는 딸을 따라가서까지 죽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일종의 자기학대이자 자기부정이라고 본다. 자기부정이 더 클수록 살해의 방법이나 수단도 참혹하고 잔인한 것이다.

‘서초동 세 모녀 살인 사건’ 피의자 강 아무개씨가 현장 검증을 위해 걸어가고 있다. 강씨는 1월6일 서초동 자신 소유의 아파트에서 아내와 두 딸을 잇달아 목 졸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됐다. ⓒ 연합뉴스

자녀 살해 심리는 자신 투영한 ‘거울 효과’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자살하는 데는 강한 두려움이 따른다. 본질적으로 자살보다 타인을 살해하는 것이 더 쉽다.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신을 죽이는 것이 그만큼 더 큰 결단력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녀들은 죽였지만 자신은 자살하는 데 주저한 것이다. 강씨의 경우 자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본다. 그 정도로 자존감이 낮고 우유부단한 사람이다.

계층은 다르지만 강씨와 같은 ‘루저’의 문제는 비단 강남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2016년을 눈앞에 둔 지금 대한민국의 상당수 국민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최악의 선택을 하고 있다. 이전의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상대적 박탈감을 곤궁함과 비참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다. 전 계층, 전 연령층에서 한 번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기 어려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병폐도 이번 사건과 맥락을 같이한다. 서초동 세 모녀 살인 사건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특권 의식과 그로 인한 폭력성의 민낯을 여과 없이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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