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답은 시즌제” 알면서도 왜 못하나
  • 정덕현 | 대중문화 평론가 (.)
  • 승인 2015.12.17 18:55
  • 호수 1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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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에서 성공 입증된 예능의 시즌제, 지상파가 취하지 못하는 딜레마

11월25일 김태호 MBC PD는 서울대학교에서 학생들과 일반인을 상대로 강연을 했다. ‘새로운 도전’이라는 주제로 열렸는데, 그는 <무한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시즌제’를 언급했다. “2008년부터 TV 플랫폼을 벗어나 영화·인터넷 등의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서 건의를 많이 했다. 하지만 <무한도전>의 시즌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아이템을 해결할 수 없더라.” 즉 시즌제처럼 어떤 휴지기 없이 지금처럼 매주 달려야 하는 편성 아래서는 영화나 인터넷 등의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는 “<무한도전>이 토요일 저녁에 할 수 있는 웬만한 이야기는 2009년까지 다 했다”고까지 말하면서 “TV 밖으로의 도전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김 PD의 고민은 지금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2009년부터 지금까지 시즌제를 건의해왔고, 그것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MBC

여기에는 김 PD가 품은 남다른 포부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훨씬 더 긴 호흡으로 <무한도전>을 지속시키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변화된 플랫폼에도 <무한도전>이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늘 예능의 프런티어에 서 있던 <무한도전>이다. 하지만 지금은 플랫폼 변화의 시대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그 징후가 나타나고 있듯이, 지상파 플랫폼 그 자체는 한계에 봉착해 있다. 인터넷이든 모바일이든 콘텐츠가 뻗어나가지 않으면 정체되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 <무한도전>이 지상파 플랫폼에만 고여 있는 건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는 일이다. 그러니 다른 플랫폼에 도전하려는 것이고, 그게 가능한 유일한 대안이 ‘시즌제’라는 것이다.

나영석 PD가 증명한 시즌제의 파워

예능에서 시즌제에 대한 고민은 김태호 PD만 갖고 있던 게 아니었다. 매주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영해야 하는 대다수 PD들은 누구나 한 번쯤 시즌제를 언급한 바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나영석 CJ E&M PD다. 그는 KBS 시절 초대박 상품이었던 <1박 2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쉬지 않고 돌아가는 매주의 편성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창작물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재충전 없이 고갈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을 터다. 결국 나 PD가 KBS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이것이었다. PD 파워에 의지하기보다는 시스템의 힘으로 굴러가는 KBS에서 나 PD에게만 휴지기를 허락하는 일은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CJ로의 이적을 결심했다.

CJ에 와서 그가 했던 <꽃보다 할배>와 <꽃보다 누나>, <꽃보다 청춘>, 그리고 <삼시세끼> 및 <삼시세끼 어촌편>이 시즌제로 만들어진 건 당연했다. 그리고 현실화된 시즌제는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그는 <꽃보다~> 시리즈와 <삼시세끼>를 오가며 프로그램들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사실 아무리 재미있는 프로그램도 계속 반복되면 질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즌제는 그 즈음에 잠시 멈춰 휴지기를 갖고 그 사이에 다른 프로그램을 내보냈다가 다시 그 프로그램이 보고 싶어질 때쯤 다음 시즌으로 돌아오는 운용의 묘를 발휘했다. PD도 재충전이 가능했고 시청자에게도 새로운 걸 기다릴 권리(?)가 주어졌다. 나 PD는 심지어 인터넷 플랫폼에 최적화된 <신서유기> 같은 프로그램도 시도할 수 있었다. 김태호 PD가 원했던 걸 그는 하나씩 실행했고 단 한 번도 어긋남 없이 연전연승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연전연승의 이유에는 물론 개인 역량이 크지만 많은 사람은 시즌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나영석 콘텐츠의 힘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광고 수익 덫에 걸린 지상파 예능의 식상함

이렇듯 시즌제는 콘텐츠를 늘 새롭게 하는 면에서나 제작진이 지속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해주는 면에서나 거의 유일한 해답이라는 게 사례로 증명돼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상파는 시즌제를 전면적으로 시도하지 않는다. 나 PD가 나간 후 <1박 2일>은 최재형 PD, 이세희 PD를 거쳐 현재 유호진 PD로 주자가 바뀌었을 뿐 매주 거르지 않고 달려왔다. 물론 <1박 2일>은 이렇게 PD가 바뀔 때마다 시즌2, 시즌3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시즌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놀랍게도 무려 10년간이나 <무한도전>과 <1박 2일>을 매주 봐온 셈이다.

지상파가 <1박 2일>이나 <무한도전>같이 오래 달려온 프로그램에 시즌제를 허락하지 않는 이유는 명백하다. 광고 때문이다. 거의 매번 광고가 완판되는 이들 프로그램이 벌어들이는 1회 광고 수익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때 <1박 2일>의 1년 광고료는 500억원을 호가하기도 했다. 드라마처럼 회당 제작비도 많지 않기 때문에 수익률로 따지면 독보적이다. 그러니 아이템이 낡거나 정체되고 제작진이 지쳐 쓰러져도 프로그램은 매주 방영되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예능의 문제와 해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시즌제를 시도하지 못하는 건 결국 당장의 경영 지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경영적인 판단은 괜찮은 걸까. 당장 달콤한 수익을 가져다줄지 몰라도 이미 그 폐해는 콘텐츠 경쟁력으로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상파의 주말 예능이다. MBC의 <복면가왕> 같은 프로그램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참신했지만 매주 반복되는 틀에 들어가면서 힘이 빠지고 있다. 한때 게임 예능의 새로운 장을 열며 ‘게임의 <무한도전>’이라는 얘기까지 들었던 SBS의 <런닝맨>은 점점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KBS의 <1박 2일>이나 <슈퍼맨이 돌아왔다>도 마찬가지다. 어딘지 너무 오래 우려먹은 듯한 식상함이 있지만 의리상 틀어놓고 본다는 게 지상파 주말 예능의 현주소다. 관성적인 시청을 할 뿐, 찾아서 보는 프로그램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많아지고 있는 방송 사고들은 축적되는 피로감 탓이라는 징후처럼 보인다.

미디어 환경은 점점 플랫폼 시대에서 콘텐츠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지상파의 이점이 점점 사라진다는 얘기다. 결국 콘텐츠 경쟁력만이 살길이고,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켜나가는 게 더 중요한 일이 되고 있다. 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건 장기적인 흐름보다 당장의 트렌드를 확보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시즌제만큼 그에 부합하는 시스템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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