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조와 기시, 그리고 아베의 꿈은 닮았다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6.07.11 17:1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무릎 위에 앉아있는 아베 신조 일본총리의 어린시절

 

2016년 7월11일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기념비적인 날이 됐다. 숙원이었던 평화헌법 개정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일본 참의원(상원) 선거 결과, 자민·공명·오사카유신회·일본의 마음을 소중히 하는 당 등 평화헌법 개헌을 지지하는 개헌파 4개 정당이 총 75석을 확보해 이번에 선거를 치르지 않는 의석(84석)을 포함해 159석을 보유하게 됐다. 개헌파 무소속 의원 4명을 더하면 총 163명이 된다. 참의원 개헌안 발의 정족수는 3분의2에 해당하는 162석이다. 평화헌법을 바꾸려면 중·참 양원 의원 각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개헌안을 발의한 뒤에 국민투표를 통과해야 개헌은 완성된다. 이미 연립여당인 자민·공명당은 중의원에서 3분의 2이상의 의석수를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날 참의원마저 개헌안 발의 가능 의석수를 확보하게 되면서 정치적 준비는 마쳤다.



'전후체제를 벗어나기.' 


아베의 정치 목표는 개헌을 해야 비로소 완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베는 총리에 취임한 뒤 자신의 임기(2018년 9월까지) 중에 개헌을 하겠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내비쳐왔다. 참의원 개표가 진행 중일 때도 기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 “헌법의 어떤 조항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논의가 수렴되지 않았다”며 국회 헌법심사회를 통해 개헌 논의를 진행할 뜻을 밝혔다. 선거 결과에 더해 북핵과 한국의 사드 배치 등 동북아 정세가 혼란스러운 점도 아베에게는 절호의 기회다.
 

아베가 추구하는 개헌의 최종 목표는 결국 평화헌법 9조의 개정으로 수렴된다. 핵심조항인 9조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포기한다’(1항), ‘육해공군 및 그 이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2항)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1896∼1987) 전 총리의 철학이기도 했다.

기시와 아베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한 명의 사람을 알아야 한다. '일본'과 '전쟁'을 연상할 때면 ‘대동아 공영권’ ‘황국 사관’ ‘황군’ ‘야스쿠니 신사’ 등의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떠도는, 이런 섬뜩한 역사적 단어는 절대권력을 누렸던 도조 히데키 전 일본 총리를 향한다. 그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군인으로 1941년 총리가 됐다. 침략기에는 야전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쳤고 현역 군인 신분으로 총리·내무장관·육군장관 등을 지냈다. 관례를 깨고 육군장관과 참모총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1941년 7월부터 12월 사이, 일본은 일왕을 중심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논의했다. 매번 이 자리에 참석한 도조는 세 번째 회의를 거쳤을 무렵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네 번째 회의가 끝난 뒤 그는 총리의 자격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내걸며 1943년 ‘대동아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헌병 정치로 일본 내 통제(조선의 통제를 포함해서)를 극단적으로 강화했다. 그 결과 일본 내 모든 권력은 도조의 손 아래 떨어졌다. 도조의 시대를 그래서 ‘도조 독재 시대'로 표현되기도 한다. 엄청난 위세를 떨친 도조의 생은 1948년 12월23일 스가모 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종결됐다. 그에게 남은 건 ‘A급 전범’이라는 낙인이었다.

“침략에 대한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져 있지 않으며 국가와 국가 간 관계에서는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침략의 의미를 우리와 다르게 해석하는 아베는 일본의 대표적인 세습 정치인이다. 도조가 일본의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막강한 정치 세력이었다면, 아베 가(家)는 일본 전후 정치에서 위세를 떨쳤다. 할아버지 아베 히로시는 중의원이었고,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전쟁 종료 후 총리를 지냈다. 특히 기시는 만주국에서 그림자 총리로 활약했던 A급 전범이었고 도조의 최측근이기도 했다. 기시는 일본이 중국에 세운 만주국의 설계자로 도조의 침략 정치를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도조와 기시가 함께했던 정치 철학과 아베의 정치 철학은 어느 정도 닮은 점이 있다.

예를 들어 도조는 육군장관을 겸임했다. 전쟁 체제가 끝난 뒤를 고려한 조치였다. 전쟁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참모들을 통제해 쿠데타를 막기 위해서였다. 내무장관을 겸임한 것도 비슷한 의도였다. 경찰 권력을 손에 쥐면서 군경을 동원해 총제를 강화하고 도조 시대가 계속되길 원했다. 그리고 기시는 거기에 협력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이 압승할 것으로 예측된 10일 오후 도쿄의 자민당 개표센터에서 당선자의 이름에 빨간색 장미를 붙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아베가 추구하는 국가는 '평화 국가'를 벗어난 '보통 국가'다. 여기서 말하는 보통 국가란 ‘정치·외교·군사·경제 주권을 확립하고 국력에 걸맞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다. 아베는 그걸 위해 여러 시도를 했다. 2013년 11월27일 일본 참의원 본회의에서는 날치기로 통과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창설 법안도 그런 시도 중 하나다. 2013년 12월 만들어진 이후 일본 NSC는 70여회의 회의를 열었다. 월 2~3회 꼴이다. 현재 NSC가 만들어지면서 일본의 외교안보정책은 해당 부처가 아닌, 총리 관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올해 초 일본의 안전보장법제가 발효된 이후 자위대의 무력 행사에 관한 임무가 증가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1944년 2월21일 도조와 기시도 비슷한 결단을 한 적이 있다. 이날 도조는 총리직에 더해 참모총장 겸임을 단행했다. 이날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이른바 ‘천황 대권주의(일왕은 정치대권과 군사대권을 가진다)’를 내세워 권력 집중을 도모한 점이다. 그걸 위해 도조 정부는 궁중에 설치한 국무회의를 새로운 시스템으로 도입했다. 지금의 NSC와 닮았는데 일왕의 권위를 빌려 의사결정구조를 하나로 집중시킨 사례다.

국무회의를 설치하고 결정권을 강화한 도조는 결국 ‘독재자’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국가적으로 부침이 심해지자 정치적 반대파들이 ‘종전 운동’을 계획했고 일왕 역시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아베 역시 마찬가지다. 도조 때는 전쟁의 승리가 정치적 원동력이었다면 아베 때는 아베노믹스가 가져온 경제적 호황이 원동력이다.

이번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일본 내에서 실시한 각종 여론 조사를 보면 유권자들은 헌법 개정과 안보 문제보다는 경제 정책이나 사회 보장 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헌법 개정 등의 쟁점은 경제 쟁점에 묻혔다. 우치야마 유 도쿄대 교수(정치학)는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유권자들이 헌법 개정에 청신호를 보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아베도 선거 운동이 진행되던 중에는 개헌에 대한 언급을 억제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만약 경제에 대한 유권자들의 기대감이 배신감으로 돌아선다면? 아베의 보통 국가를 향한 도전 역시 고꾸라질 수 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