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거장의 영화를 한 번에 몰아 본다
  • 이은선 ‘매거진 M’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8.11 11:29
  • 호수 1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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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 한국 극장가에 나란히 개봉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한국에서 두터운 팬층을 지닌 일본 감독이다. 외화시장 전체를 통틀어도 그렇다. 관객 1만 명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시장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년)으로 4만 명,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년)와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년)로 각각 10만 명 이상의 국내 관객을 모았다. 

 

신작 《태풍이 지나가고》의 반응도 빠르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 영화의 밑바탕에는, 어릴 적에 누구나 근사한 어른이 되기를 꿈꾸지만 모두가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이해가 깔려 있다. 그렇게 ‘어쩌다 어른’이 된 이들의 등을 토닥이는 정서가 관객을 사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한때 촉망받는 소설가였으나 지금은 사립 탐정으로 일하는 료타(아베 히로시)와 그 가족의 이야기다. 료타는 어머니와 누나에게는 물론 이혼한 전 아내와 아들에게도 그리 미덥지 못한 사내다. 태풍이 불어닥친 어느 날, 반은 우연이고 반은 계획적으로 전처와 아들이 료타와 함께 어머니 요시코(기키 기린)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잘 알려졌듯 고레에다 감독의 이력은 다큐멘터리 연출에서 출발했다. 극영화를 만들 때도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움직임을 주목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그의 장기가 됐다. 《태풍이 지나가고》 역시 감독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등장인물들의 삶을 파격적으로 바꿔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인물들이 미세하게 성장하는 모습이 보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한국에서도 두터운 팬층 확보한 일본 감독

 

영화의 원제는 《海よりもまだ深く(바다보다 더 깊은)》이다. 이는 극 중 흘러나오는 등려군의 노래 《이별의 예감》의 가사이기도 하다. 특정 노래가 영화 속 장면에 흐르고, 그 노래의 가사를 따 제목을 짓는 방식은 감독이 전작 《걸어도 걸어도》(2008년)에서도 썼다.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고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삶에 익숙해지지 않던 노부부는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나는 흔들려’라는 가사가 나오는 노래를 즐겨 들었다.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노래는 인물들의 삶을 갈무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그들의 삶을 위무한다. 어머니 요시코는 태풍이 불던 밤, 노래를 듣다가 료타에게 문득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행복이라는 건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넣을 수 없는 거야. 난 평생 누군가를 바다보다 더 깊이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거야. 날마다 즐겁게.” 

 

고레에다 감독은 《태풍이 지나가고》가 지금껏 자신이 만든 영화 중 가장 자전적인 요소가 많은 작품이라고 밝혔다. “훗날 저승사자가 내게 ‘이승에서 뭘 했느냐’고 물으면 이 영화를 보여줄 것이다. 그만큼 어깨에 힘주지 않고 나의 인생을 자연스럽게 투영한 영화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겪었던 일들 중 많은 것들이 영화 속에 어우러져 있다.” 

 

극 중 요시코가 만드는 음식과 빗속 캠핑 등도 감독의 유년 시절 추억에서 비롯한 것이다. ‘고레에다 사단’의 핵심 멤버 기키 기린의 경우, 요시코를 연기하기 전 고레에다 감독에게 그의 어머니의 유품과 사진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극 중 그가 착용한 안경은 실제 고레에다 감독의 어머니가 쓰던 것이다.    

 

《태풍이 지나가고》


올여름 한국 극장가에서는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세 편이 나란히 개봉했다. 그의 첫 극영화인 《환상의 빛》(1995년)과 대표작 《걸어도 걸어도》를 포함해서다. 특히 《환상의 빛》은 몇 차례 특별전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봉했다. 동시대 일본 거장 감독의 성장과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삶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남겨진 자들이 떠나간 사람의 흔적 안에서 통증을 감내하고 성장을 겪는 일이다. 이는 《환상의 빛》으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특징이다. 《환상의 빛》은 아이가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남편을 잃은 젊은 미망인(에스미 마키코)의 이야기다. 그는 남편이 자살한 이유를 모른다. 이 영화의 경우 원작이 있지만, 고레에다 감독이 일본 보건복지부 고위 관리의 자살을 파헤친 다큐를 찍던 시절 그의 미망인에게서 엿본 상실감 역시 중요한 모티브가 됐다. 

 

《걸어도 걸어도》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자들의 이야기

 

서서히 변하는 계절 풍광을 인물의 심리에 투영한 시(詩)적 영상은 이 영화를 지금까지도 가장 훌륭한 연출 데뷔작 중 하나로 꼽히게 만들었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 자신에게는 “삶을 자연스럽게 담지 못했다”는 자성의 계기가 된 영화이기도 하다. 이후 그는 진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영화에 포함시키려는 시도를 계속한다. 평온한 분위기 아래 복잡하게 요동치는 삶과 인물의 마음을 주목한 영화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8월초 재개봉한 《걸어도 걸어도》 역시 마찬가지다. 큰아들 준페이의 기일, 흩어져 살던 자식들이 어머니 토시코(기키 기린)의 집에 모인다. 주방은 시끌벅적하고 집안에는 생기가 넘친다. 그 가운데에는 10년 전 준페이가 바다에서 구한 요시오도 있다. 요시오가 돌아간 다음 토시코는 매년 준페이의 기일에 그를 부르는 속내를 밝힌다. “겨우 10년 정도로 잊으면 곤란해. 그 아이 때문에 준페이가 죽었으니까.” 자식을 잃고도 지속되는 삶. 가슴이 쥐어뜯기는 고통을 감내하며 그 시간 속을 살아가는 어머니의 복잡한 심경이 그의 얼굴에 오르내린다.

 

고레에다의 영화에서는 최근 이전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무언가를 물려주는 것에 대한 감독의 고민이 두드러지게 엿보인다.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는 아버지가 남긴 벼루,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주는 손자의 탯줄 등이 직접적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평온함 안에서 삶의 비통함을 날카롭게 파고들던 전작들에 비해 《바닷마을 다이어리》부터는 감독의 영화세계가 덜 날카롭다는 지적도 있다. 첫 장편 극영화를 내놓고 21년이 지나는 동안 영화를 만드는 그의 생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환상의 빛》


고레에다 감독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로부터 출발하는 영화를 만들려는 마음에는 변화가 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는 자신의 영화가 이전보다 덜 날카롭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일단 내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 이전보다 낙천적이고 밝아졌다. 또한 아이가 생겼다는 개인적 변화도 한몫하는 것 같다.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어둡고 날카로운 세상은 아닐 것이다.” 넉넉하고 사려 깊은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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