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위안부’, 그 생존의 기억》 #4. “난 스스로 ‘미군위안부’가 된 게 아니야”
  • 박준용 기자 (juneyong@sisapress.com)
  • 승인 2016.08.26 10:55
  • 호수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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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마주해야 했던 그녀들의 증언

사람들은 묻는다. 

“미군위안부 여성들은 기지촌에 ‘스스로’ 찾아온 게 아닌가요?”

그간 ‘미군위안부’ 피해 여성은 이런 편견 섞인 질문을 받았다. 취재진이 진행한 인터뷰는 그 답이 될 듯하다.

Q 어떻게 기지촌에서 일하게 됐나요.

A 책자에서 숙식제공을(‘숙식제공’이라 적힌 광고물을) 보게 됐어. 일단 가서 일하려면 숙식제공이 돼야 하잖아. 오라 해서 갔더니 직업소개소였던 거야. 거기서 소개했는데 속아서 기지촌에 들어오게 된 게지. 미군을 받는지 처음에는 몰랐어.

Q 인신매매로 온 여성 중 도망치려고 시도하는 사람도 있었나요.

A 처음 가면 항상 사람이 옆에 붙어 있어. (중략) 목욕탕도 그 사람하고 같이 가고. 항상 그 사람이 (감시하고) 있어서 도망갈 생각 못하고. 도망갔다가 잡혀온 언니들 보면 매 맞고 그래. 감히 도망갈 수 있는 시스템이 되지가 않은 거야.
‘미군위안부’ 피해자 김숙자(가명)씨


이는 다른 기지촌 여성들도 공통적으로 말하는 피해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자리를 구하려는 여성들을 ‘미군위안부’로 끌어들이기 위한 중간업자(직업소개소·포주)의 인신매매와 사기가 성행했다. ‘미군위안부’를 이런 식으로 기지촌에 몰아넣으려고 했던 중간업자들은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노렸다. 

기지촌에 오게 된 여성은 어렸다. ‘미군위안부’ 중 미성년자가 절반을 넘었다는 증언도 있다. 또 이들 중 다수는 고아이거나 빈곤과 학대 등에 시달렸다. 게다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기지촌을 거친 여성 대다수는 초등교육을 받지 못했다. 주로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한 ‘어리고 고달픈’ 여성들이 ‘미군위안부’로 내몰렸다. 

“‘미군위안부’ 90% 이상이 불법적인 인신매매와 사기 피해로 기지촌에 유입됐습니다. 기지촌이 어떤 곳인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일부 기지촌을 알고 유입된 여성들도 이곳에서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강요당하게 될지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미군위안부’들은 포주들의 강요로 첫 미군을 상대했던 순간의 공포감을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당시 외국인이 흔하지 않던 한국에서 외국인에게 성매매를 강요당하는 피해를 상상조차 못한 것입니다.”
신영숙 새움터(기지촌 여성 인권단체) 대표

이런 피해를 입은 ‘미군위안부’의 규모를 정확하게 조사한 통계는 없다. 다만 피해자가 수만 명을 넘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한국일보는 1955년 당시 미군을 상대하는 기지촌 여성이 6만2000여 명이라고 보도했다. 1960년대 후반 등록된 기지촌 여성만 2만 명이 넘었다.  

기지촌을 주도적으로 조성한 것은 정부다(스토리펀딩 2화 ‘국가가 포주였다’ 참조). 정부가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주한미군을 손님으로 맞는 성매매업소 운영자들에게 관대했다. 특히 경찰·공무원 등 이 문제를 단속해야 할 이들은 임무를 다하지 않았다. 피해여성들은 이를 생생히 기억했다.

Q 소개업자에게 속아서 끌려온 데 대해 경찰에 신고해보려 했나요.

A 파출소에 말해도 소용없어요. 말하면 안 된다고 배워요. 다 알아요. 포주하고 여기(지역 경찰)하고 다 연결돼 있어요. (중략) 이아무개 경장인지 있었는데 나중에 클럽(기지촌 성매매업소) 만들었더라고요.
‘미군위안부’ 피해자 박미경(가명)씨

A 경찰서나 파출소에 신고해서 거기 가 있으면 조금 있으면 주인(포주)이 여자를 데리러 와. 경찰이랑 포주랑 서로 아니까. 경찰이 포주한테 얘기해 준 거지.
‘미군위안부’ 피해자 김숙자(가명)씨


이토록 기지촌 여성을 외면한 정부였다. 기지촌 여성은 국가의 방치 아래 미군 범죄에도 노출됐다. ‘주한미군 윤금이씨 살해 사건’이 대표적이다. 1992년 10월 기지촌 여성 윤금이씨가 주한미군 2사단 소속이던 케네스 마클 이병에게 잔혹하게 살해됐다. 이 사건 외에도 1950년대부터 기지촌 여성은 미군 범죄의 잦은 피해자가 됐다. 하지만 불합리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은 가해자가 미군일 경우 ‘솜방망이 처벌’을 했다. 당시 한국 사법 당국은 살인 혐의가 짙다고 해도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 미군을 구속하지 못했다. 

이렇게 ‘미군위안부’ 피해자는 미군 범죄와 노동착취, 국가의 인권침해에 희생됐다. ‘미군위안부’ 증언자들은 기지촌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해도 기사 한 줄 나가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말한다. 희생자들은 기지촌에서 연고 없이 죽음과 마주해야 했다. 

“속아서들 (기지촌에) 흘러들어왔지. 아가씨들이 여기 와서 자기 인생 다 버린 거지. 그때는 어디 (기지촌 여성들을) 사람으로 취급을 했나…. 연고도 없으니 여기 상패동 공동묘지에 많이들 묻혔어. (중략) 돌아보면 참 슬픈 일이지.” 
1970년대 문산·동두천·의정부 미군부대 노동자 지회장을 지낸 황아무개씨


동두천의 상패동 무연고 공동묘지는 이런 ‘미군위안부’ 여성이 다수 묻힌 묘지다. 1992년 희생된 기지촌 여성 고 윤금이씨의 유해도 여기에 뿌려졌다. 윤씨와 더불어 수백 명의 무연고자가 이곳에 잠들어 있다. 폭력과 인권침해에 고통받은 또 다른 ‘윤금이씨’들이다. 

취재진이 7월 중순께 찾은 이곳 공동묘지는 입구를 찾기조차 쉽지 않았다. 길을 헤매다 풀숲 사이 쪽길로 겨우 들어선 공동묘지, 그곳에는 변변한 비석 하나 없었다. 또 다른 ‘윤금이씨’는 이름 없이 잠들어 있다. 봉분 주변으로 잡초만 무성하다. 찾아오는 이 하나 없다.  

 

■ 참고문헌

김현선, 김정자.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새움터 기획. 한울아카데미, 2013

김현선, 신영숙. 《미군 위안부 역사 자료집》 새움터. 2014 / 캐서린 H.S. 문. 《동맹 속의 섹스》 삼인, 2002

박정미. 《발전과 섹스: 한국 정부의 성매매 관광정책, 1955-1988년》 한국사회학 48.1 (2014)

김환균, 정길화 외. 《우리들의 현대 침묵사》 해냄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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