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포주 노릇 했다”…미군위안부 여성들의 한(恨) 풀려
  • 조문희 기자 (moonh@sisajournal.com)
  • 승인 2018.02.09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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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기지 매춘 여성, 국가 상대 손해배상청구 항소심 승소…시사저널, 2년전 기획연재로 꾸준히 문제 제기
“열다섯에 1만5000원 받고 기지촌으로 끌려왔어요. 상처가 나서 아프다고 말해도 주인(포주)은 또 군인을 넣더라고요. 도망가다 잡혀오면 두들겨 맞아요. 성병에라도 걸리면 수용소에 감금되는데 페니실린 주사 그건 아무리 참을성이 강해도 못 당해요.”

2016년 7월19일 ‘미군위안부’ 피해자 박미경씨(가명·60)가 시사저널에 증언한 내용이다. (《’미군위안부’, 그 생존의 기억》 #3. “열다섯 살에 온 기지촌, 둘러보니 절반이 또래였다”) 미군위안부는 주한미군 주둔지에 조성된 기지촌에서 성매매에 종사했던 여성들을 이르는 말이다. 

박씨는 본지와 인터뷰 당시 인신매매와 사기 등으로 기지촌에 오게 된 여성은 대부분 10대였으며 미군에게 성매매를 강요당했다고 말했다. 국가는 문제를 제재하기는커녕 ‘성병검진’을 명목으로 여성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치료를 강제했다고 전했다. 시사저널이 2년 전 연재기획으로 자세히 다룬 미군위안부 여성들의 문제가 최근 이슈로 부각됐다. 서울고등법원이 2월8일 "국가가 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2월8일 오후 2시30분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기지촌여성인권연대, 세움터,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원들이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 소송' 항소심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고 발언하고 있다. ⓒ 조문희 기자


“국가가 포주 노릇” 손해배상 책임 인정


박씨 등 미군위안부 피해자 120여 명은 그동안 일관되게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해왔다. 2월8일 그 두 번째 결과가 나왔다. 재판부는 1960~70년대 조성된 주한미군 기지촌에서 성매매에 종사한 여성들이 정부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청구 항소심에서 정부가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일부 여성들이 스스로 성매매를 했더라도, 정부가 이를 눈감고 오히려 부추겼다는 점에서, 국가가 책임을 피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번 판결을 두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에도 경종을 울릴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서울고법 민사22부(부장판사 이범균)는 8일 “주한미군 기지촌에서 매춘을 한 여성 117명에게 피고(국가)는 1인당 300만~700만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들 여성 117명은 소송을 제기한 원고 전부다. 재판부는 이어 “국가가 성매매를 조장하고 정당화했다는 부분에 대해서 국가 책임을 인정하며, 모든 원고들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1월 있었던 1심보다 국가의 책임을 더 넓게 인정한 것이다. 1심 재판부는 1977년 성병 감염자를 격리하는 ‘전염병예방법 시행규칙’이 생기기 이전에 보건 검사를 받지 못하고 기지촌에 강제 수용된 여성들에게만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원고 117명 중 57명에게 각각 500만원씩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시행규칙이 생긴 시점과 무관하게 피해 여성들을 의료 진단 없이 강제 수용한 행위는 위법”이라고 판단했다. 또 재판부에 따르면, 사건 당시 정부는 주한미군 사기진작이나 외화벌이 등을 목적으로 기지촌 내 성매매를 묵인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정부는 피해 여성들을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로 치켜세우기도 한 걸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재판부는 “일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시작했더라도 정부가 이들의 성을 수단으로 삼은 이상 정신적 피해를 입혔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원고측 하주희 변호사는 “무척 의미 있는 판결”이라며 “국가가 사실상 포주 노릇을 했다는 원고 주장을 모두 인정한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원고 측 대표 박영자씨는 판결 뒤에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 정부가 우리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날까지 싸울 것을 맹세한다”고 했다.


일본 정부에 메시지 줄 것이란 의견도


한편 이번 판결을 두고 ‘국가가 젠더 문제를 대하는 시각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란 의견도 나왔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는 8일 “국가가 성매매를 제도화하면서 여성 인권이 침해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집창촌 등 여러 성매매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묵인하고 있는 것에 경종을 울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계속해 “우리가 스스로 정부가 했던 잘못을 선제적으로 반성하고 보상하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현재 책임을 부인하고 있는 일본에도 큰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백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는 “우리나라 ‘미투’ 운동은 바로 이것”이라며 “여성에 대한 젠더 폭력이 근절될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했다.

기지촌 성매매 피해여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입법운동도 전개되고 있다. 지난해 7월14일 유승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기지촌이 가장 많이 조성된 경기도에서는 2014년 ‘경기도 기지촌여성 지원 등에 관한 조례안’을 입법예고한 바 있다. 그러나 경기도 조례안은 제정되지 못했으며, 20대 국회에서도 해당 법안은 계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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