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카드’ 만지작 거린 트럼프에 제동 건 참모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18.05.1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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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기싸움 끝에 싱가포르서 마주하는 北·美…백악관 참모들 의중대로

 

판문점, 평양, 심지어 제주도까지 거론됐던 북·미 정상회담 장소가 싱가포르로 최종 낙점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참모들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 연합뉴스

 

세계사에 남을 북·미 정상회담장, '중립 외교무대' 싱가포르 낙점 

 

트럼프 대통령은 5월10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매우 기대되는 김정은(국무위원장)과 나의 회담이 싱가포르에서 6월12일 개최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양 측 모두는 회담을 세계 평화를 위한 매우 특별한 순간으로 만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역사적인 이번 회담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의 분수령이다. 북·미 정상은 최대 의제인 비핵화 로드맵과 함께 종전 선언·평화 협정을 비롯한 평화 체제 정착, 핵 폐기에 따른 미국의 경제적 보상과 외교 관계 수립 문제 등을 놓고 큰 틀의 담판을 지을 전망이다.

 

앞서 4·27 남북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북·미 사전 협의가 순탄하게 진행되면서 금방이라도 한반도 비핵화가 실현될 듯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러나 북·미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비핵화 시기와 수준을 놓고 양측 기싸움이 팽팽해 정상회담 장소와 일정 발표가 차일피일 미뤄졌다. 북·미 대화 국면에 차질이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도 새어나왔다. 미국 측이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에서 'PVID'(영구적이며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로, 또 '영구적 대량파괴무기(WMD) 폐기'로 핵심 의제 논의의 허들을 높이는 데 대해 북한이 반발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를 잠시 제쳐두고 다시 중국에 노크하면서 긴장감은 더욱 커졌다. 사태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5월8일 2차 방북해 김 위원장을 만난 후 다소 누그러졌다. 장소와 일정도 그제서야 발표됐다.

 

세기의 담판으로 기록될 북·미 간 첫 정상회담 장소로 싱가포르가 최종 낙점됐다. 사진은 싱가포르 강변의 금융지구 전경. 5월10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언론은 싱가포르가 북한과 외교관계가 있고 북한 대사관이 위치하며, 중립성과 고도로 확립된 질서가 있기에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낙점됐다고 평가했다. ⓒ 연합뉴스

 

북·미가 6월12일 정상회담 장소로 싱가포르를 선택한 것은 '중립적 외교 무대'라는 점이 주요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2015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馬英九) 당시 대만 총통의 첫 정상회담도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싱가포르는 또 경호와 안전성, 교통과 이동의 편의성, 취재환경 측면에서 우수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싱가포르 내 회담장은 외교적 협상 무대로 손꼽히는 샹그릴라 호텔이 될 가능성이 크다. 싱가포르의 랜드마크인 샹그릴라 호텔에서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연례안보회의인 '아시아안보회의'(일명 샹그릴라 대화)가 2002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시진핑 주석-마잉주 총통 회담장 역시 이 호텔이었다.

 

북한으로서도 싱가포르는 북한 대사관이 있는데다 김 위원장의 '장거리 비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합한 장소로 꼽힌다. 그동안 김 위원장의 전용기로는 장거리 비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 있었다. 김 위원장은 최근 방중 길에 옛 소련 시절 제작된 '일류신(IL)-62M'을 개조한 전용기 '참매 1호'를 이용했다. 이 전용기는 평양에서 5000㎞가량 떨어진 싱가포르까지 충분히 비행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판문점은 결국 배제…편의, 정치적 부담 등 두루 고려한 듯 


내심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판문점을 선호했던 우리나라로서는 다소 아쉬운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장소가 판문점이 될 가능성을 거론한 적이 있다. 그가 4월30일 "일(비핵화 협상)이 잘 풀리면 제3국이 아닌 판문점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이 엄청난 기념행사가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판문점이 유력 후보지로 급부상했다. 반면 백악관 참모들은 줄곧 싱가포르가 가장 적합한 장소라는 의견을 집중적으로 펴온 것으로 전해졌다.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춰 직관적인 판단을 해온 트럼프 대통령의 '변덕'이 장소 선정의 변수로 남아있었다. 문정인 대통령 외교안보특보 등과 함께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한 김종대 정의당 의원은 5월6일 SNS에 "트럼프 대통령 측근에게 '북·미 정상회담은 판문점에서 개최돼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며 "'잘 검토해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확실히 보고하겠다'는 답변까지 받아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설득 당한 모양새다. 미 행정부 관리들은 북·미 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개최되는 것 자체가 도박이라는 우려를 표해왔다. 북한에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가 크고 회담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정치적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 밖에 이미 앞선 남북 정상회담 개최지로 세계인의 눈길을 끈 판문점이 트럼프 정부 최대 치적이 될 수 있는 북·미정상회담 개최지로는 '신선도'가 높지 않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한편 백악관은 북·미 정상회담에서의 최우선 과제는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라고 밝혔다. 이 같은 입장 표명은 폼페이오 장관이 지난 2일 취임사에서 제시했던 'PVID(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 원칙을 접고 기존에 견지해온 CVID를 비핵화 협상의 목표로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북한과 미국이 어느 정도의 절충점을 잡고 정상회담 일정·장소를 발표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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