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여, 역사적 피해의식을 버려라”
  • 노진섭 기자 (no@sisajournal.com)
  • 승인 2018.05.14 09:23
  • 호수 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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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석학’ 마크 피터슨 박사가 제안하는 한국 미래를 위해 바꿔야 할 세 가지

 

마크 피터슨 박사는 누구?

 

1946년생으로 미국 유타주 브리검영대학(BYU) 학생이었던 1965년 처음 한국을 찾았다. 국내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2년 반 동안 한국의 매력에 빠진 인연으로 1971년 동양학 및 동양인류학을 전공하고, 1973년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동양학과 한국사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 같은 대학원에서 조선 중기 입양제와 상속제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부터 브리검영대학 아시아학부에서 한국 역사와 한국문학을 가르쳤고, 올해 7월 퇴임한다. 1978년부터 5년 동안 한국 풀브라이트 장학재단 이사장을 맡았고, 1999~2002년 미국 아시아학회 한국학위원회 회장을 역임했다. ​ 

 

 

고희를 넘긴 친한파 미국인 마크 피터슨(Mark Peterson) 박사는 올해도 한국을 찾았다. 처음 한국 땅을 밟은 1965년 이후 52년이 흐르는 동안 150여 차례, 말 그대로 문지방이 닳도록 미국과 한국을 오갔다. 대학에서 한국에 대해 공부했고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조선 중기 입양제와 상속제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 전문가다. 한국학 교수로 34년간 브리검영대학에서 한국 역사와 문학을 가르쳤고, 올 7월 대학 강단을 떠난다. 그는 여생을 한국 발전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했다. 그 첫 단계로 국내에 연구소를 설립한다. 이름은 ‘정외와(井外蛙)연구소’다.

 

“우물 밖 개구리라는 의미다. 한국인의 역사의식은 우물 안 개구리와 같다. 우물 밖으로 나와 역사를 넓게 바라보면 좋겠다는 뜻에서 정외와연구소를 준비 중이다. 앞으로 언론, 교육자, 교과서 편집인, 학교에 잘못된 역사의식을 바꾸고 창조적인 인재를 기르자고 역설할 예정이다. 먼 훗날 한국에서 (평화상 외의) 노벨상을 받으면 ‘오래전 한국의 교육제도를 바꾼 미국인’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 시사저널 박은숙


 

“한국 역사는 유례없이 평화롭고 안정적”

 

‘우물 밖 개구리’의 눈에 비친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그를 5월4일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피터슨 박사는 한국의 미래를 위해 한국인이 바꿔야 할 세 가지를 제안했다. 그 첫 번째는 역사적 피해의식을 바꾸라는 것이다.

 

“나는 미국 대학에서 한국 역사를 가르칠 때 처음에는 정설대로 가르쳤다. 침략에 시달린 역사라고 말이다. 그런데 한국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칠수록 정설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약 15년 전부터 솔직해지기로 했다. 내 말에 거부감을 보일 한국인도 있겠지만, 우물 밖 개구리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을 잘 봐주길 바란다.”

 

피터슨 박사는 2시간30분 이상 우리말과 영어를 섞어가며 인터뷰 내내 한국 역사가 평화로웠던 점을 강조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외세 침략으로 점철된 역사가 아니라는 얘기다.

 

“평생 연구한 바에 따르면, 한국 역사는 유례없이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다. 왕조를 보자. 신라 1000년, 고려 500년, 조선 500년 동안 왕조를 유지했다. 사회가 안정적이지 않으면 그렇게 오래 왕조를 유지할 수 없다. 중국과 일본은 물론 세계 대부분 왕조의 역사는 250년 안팎이다. 신라-고려-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된 시기도 평화로웠다. 보통 왕조가 바뀌기 전에 수십 년 동안 전쟁과 혼란을 겪는다. 그런데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후 정권을 잡기까지 불과 몇 시간이었다. 또 왕조는 변해도 지배층엔 변함이 없었다. 중국·일본 등은 왕조가 바뀌면 지배층이 뒤집히다시피 한다.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중국 유방은 하인 출신이지 않나. 한국의 왕조가 바뀔 때는 세상이 뒤집힌 것이 아니라 지배층만 수평 이동했다. 노비도 혼란을 틈타 혁명을 일으켜 왕조를 뒤엎은 적이 없다. 신라 노비의 후손이 고려 노비가 됐고 그 후손이 조선의 노비가 됐다. 심지어 나라를 흡수할 때도 평화적으로 해결했다. 신라는 가야의 지배층을 몰락시키지 않고 오히려 흡수했다. 《삼국사기》를 보면, 김춘추는 가야 사람인 김유신의 누나와 혼인한다. 신라엔 골품제라는 엄중한 계층이 존재했는데도 가야 지배층을 품음으로써 평화적으로 가야를 흡수했다.”

 

그의 ‘평화로운 한국사’론(論)에는 성(姓)씨와 왕릉 사례까지 등장한다. 또 한국의 선비 문화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미국에서 흔한 성인 스미스(smith)는 인구의 5%인데, 한국의 김씨는 21%나 된다. 김·이·박씨 등이 이렇게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혁명과 같은 혼란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여러 학자가 경주 왕릉을 방문했는데, 한 미국 고고학자는 왕릉이 언제 도굴됐냐고 물었다. 중동 등지에는 도굴되지 않은 무덤이 없었으므로 신라 왕릉도 도굴됐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서강대 총장 출신인 이종욱 교수는 도굴된 일이 없다고 답했다. 실제로 신라 시대 왕관 등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나. 사회가 혼란스러우면 백성은 왕릉에서 금붙이를 도굴했을 것이다. 그만큼 과거 한국 사회엔 혼란이 없었다. 왜 그런가. 일본엔 사무라이가 있지만 한국엔 선비가 있었다. 고려 김부식이나 강감찬 장군도 문신이다. 이순신 장군도 본래 문신 집안 출신으로 무과에 들어간 특별한 사례다. 그만큼 안전한 사회를 이룬 과거 한국은 무신이 필요 없는 선비의 나라였다.”

 

피해의식은 한국사가 외세 침략의 역사라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일본이 심어놓은 식민사관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한국사에서 외세 침략은 단 2차례 있었다고 잘라 말했다.

 

“오래전 강릉에서 만난 한 퇴직 고등학교 교사는 실록·문집·야사 등에서 침략의 사례를 헤아려보니 9000번이 넘는다고 했다. 망치를 들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If all you have is a hammer, everything looks like a nail)고, 그 시각은 편견이다. 나는 한국 역사에서 침략은 2차례 있었다고 본다. 원나라의 침입과 임진왜란이다. 일본 해적이 우리 땅에 와서 돼지와 쌀을 훔친 것까지 침략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해적질이고 도둑질이다.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도 한국을 멸망시키려는 게 아니고, 조선 왕의 항복을 받아 우방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원수를 만들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 외에 자잘한 전투는 국경 분쟁 정도였다.”

 

 

“한국식 유교 사상은 ‘평등’”

 

피터슨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대해 다소 민감한 발언을 했다. 일제의 식민을 침략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한국인은 여전히 일본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894년 일본이 이 땅에 온 것도 중국과 싸우려는 의도였으므로 군대를 앞세운 조선 침략으로 볼 수 없다. 1980년대 한국에서 한 80대 할머니를 만났다. 일제강점기에 대해 그 할머니는 ‘일본인이 처음엔 나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 전까지는 나는 일본에 대해 좋은 소리를 하는 한국인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이 말에 깜짝 놀랐다. 일본은 군사력이 아니라 정치력으로 한국을 지배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왕조 시대를 끝내고 민주주의를 하자고 했고, 이에 친일파가 일본의 제안에 동조했다. 일본 지배 당시 한국인 수명은 늘었고 교육의 기회는 모두에게 개방됐다. 한국사가 외세 침략의 역사라는 의식은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이다. 한국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본 식민지가 됐고, 전쟁도 일어났고, 분단됐다. 그러니 피해의식이 팽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적 피해의식을 버려야 비로소 일제의 식민사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예전에 한국의 현실을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표현했다. 21세기 한국은 새우인가. 그렇지 않다. 세계 강국 중 하나다. 새로운 한국의 역사를 만들어갈 때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침략이 아니라는 말은 의외였다. 기자는 “군사력만이 침략이 아니라, 정치적·사회적으로 한 나라를 장악하는 것도 이른바 정신적 침략이라고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정신적 침략(psychological invasion) 의식이 바로 일본이 만든 식민사관이다. 또 이런 피해의식은 정치적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은 과거 한국이 약해서 침략을 당했다며 강한 정치를 폈다. 일제감정기의 피해의식을 이용한 군부 정치였다. 결국 한국은 일본의 식민사관에 발목이 붙잡혀 역사적 발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난 22년 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미국 해외공보처, 코리아소사이어티의 도움으로 미국 교재 편집인들이 30번 정도 한국을 방문해 답사하고 세미나도 했다. 미국 교재에 한국사를 제대로 알리기 위함이다. 그런데도 한국 역사 내용은 왜곡돼 있고, 무엇보다 양이 부족한 실정이다. 역사 내용이 중국은 30~40페이지, 일본은 20페이지라면 한국은 1~2페이지에 불과하다. 자존심이 상하는 부분이다. 역사적 피해의식을 버리는 것은 자존심 문제이기도 하다. 억지로 만드는 자존심이 아니라 진정한 자존심을 되찾아야 한다.”

 

한국의 미래를 위해 한국인이 바꿔야 할 점 두 번째로, 피터슨 박사는 유교 문화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할 것을 주문했다. 흔히 유교 때문에 한국 사회가 발전하지 못한다는 지적에 대한 해법이다.

 

“한국 사회에 남존여비 사상과 부계사회 등 유교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강하다. 그러나 신라는 중국으로부터 유교를 받아들일 때 한국식으로 수입했다. 한국식이란 남녀평등 문화를 유지했다는 말이다. 삼국 시대, 고려 시대는 물론 조선 500년 중 앞부분 300년까지는 한국식 유교가 존재했다. 상속을 남녀에게 균등하게 했고, 남아선호 사상이 없었고, 족보도 태어난 자식 순서대로 기록했다. 제사도 윤행(輪行)이라고 해서 남녀가 차례대로 지냈다. 혼인도 평등하게 시집·장가를 갔다. 율곡 선생의 아버지 이원수는 파주에서 신사임당이 있는 강릉으로 장가가지 않았나.

 

조선 초까지만 해도 특정 성씨 집성촌은 없었다. 17세기 이후 단성 집성촌이 생겼다.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이 그 사례다. 경주 양동마을은 신라 시대에 생겼는데, 조선 시대 이씨와 손씨 집성촌이 됐다. 장가를 가던 때는 특정 성씨가 득세하지 않았지만, 여자가 시집을 오기만 할 뿐 장가를 가지 않으니 이씨와 손씨가 그 마을을 벗어나지 않게 된 것이다. 예전엔 김해 김씨는 김해에 거의 없었고, 밀약 박씨는 밀양에 살지 않았다. 장가갔기 때문이다.

 

17세기 후반, 그러니까 1660년대부터 상속은 장손에게 하고, 여자는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됐다. 즉 부계사회가 됐다. 한국식 유교가 사라지고 중국산 유교가 자리 잡은 것이다. 혹자는 부계사회 이전에 모계사회가 있었다고 하지만, 한국에는 모계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부계사회 이전에는 평등사회가 있었다. 따라서 중국산 유교 즉 부계사회, 남존여비 사상이 발생한 것은 그렇게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일각에선 중국산 유교 사상이 한국 역사의 전체인 양 말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유교를 좋아하는 학자로서 유교 사상 때문에 한국 역사가 발전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불편하다.”

 

 

“창조력에 시조 창작 활동이 으뜸”

 

17세기 후반 유교가 한국식에서 중국식으로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인구 증가, 정통 유교를 실천하려는 움직임을 꼽았다.

 

“다른 나라도 인구문제로 상속법을 바꾼 사례가 있다. 땅은 한정적인데, 인구가 많아지므로 모든 자손에게 나눠줄 여유가 없어진다. 또 유교 사상이 철학에서 실행학문으로 바뀌었다. 유학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로 바뀌었는데, 조선은 청나라를 오랑캐라며 업신여겼다. 그러면서 정통 유교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말하자면 당시 사고방식의 혁명이 일어난 셈이다.”

 

한국의 미래를 위해 한국인이 바꿔야 할 점 세 번째로, 피터슨 박사는 교육 혁신을 꼽았다. 교육열은 높지만 창조력을 발휘할 수 없는 교육제도라는 비판이다.

 

“한국인은 창조를 강조한다. 그러나 말뿐이고 실천은 없다. 한국의 교육 수준은 매우 높은데도 경제나 의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다. 예를 들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제 기반을 다졌다고 평가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박 전 대통령이 없었더라도 경제가 발전할 시기였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두 가지 모두 맞을 수 있고, 다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흑백 논리를 가르친다. 내가 수능시험을 비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할 수 있고, 둘 다 아닐 수 있는데 학교는 선택하게 만든다. 수능시험은 여러 문제를 단순화해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암기 잘하는 사람을 뽑는 대회다. 결코 창조력과는 거리가 멀다.”

 

피터슨 박사는 창조력을 높일 방법을 시조에서 발견했다. 그는 기자에게 한 웹사이트를 보여줬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한국인 소아과 의사가 자비로 만든 기관의 홈페이지였다.

 

“한국을 미국에 제대로 알리기 위해 그 의사는 10년 동안 시조대회와 수필대회를 열었다. 참가자는 대부분 미국인인데, 영어로 시조를 쓴다. 한국의 시조는 창조력을 길렀던 훌륭한 방법이었다. 짧은 문장으로 특정 주제를 묘사하는 시조는 창작 활동이다. 게다가 운율과 기승전결이 있어 음악이나 과학과 결합도 가능하다. 내가 가르치는 교실에 학생이 약 40명인데, 1년에 모두 100편 정도의 시조를 쓴다. 한국에서 창작하는 시조 수보다 많을 것이다. 한국의 각 학교가 학생들을 상대로 시조대회를 열 것을 제안한다. 대회에서 일정 조건에 해당하면 수능시험에 가산점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교육을 바꾸면 창조력이 강한 인재를 길러낼 수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평화적이고 점진적으로 통일해야”

 

한국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통일이 문제다. 평화적이고 점진적으로 통일해야 한다. 두 번째, 한국은 중국과의 경쟁에 대비해야 한다. 한국이 정체 상태라면, 중국은 급성장 중이다. 경제를 한 단계 올리는 열쇠는 교육이다. 연세대 설립자의 후손 언더우드 3세도 평소 ‘한국은 경제 기적에 앞서 교육의 기적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미래에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가족 제도다. 나는 탈북자 부부와 같이 산다. 한국에서 5년 살았고 현재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곧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텐데, 그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사망한 후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가족과 고향 때문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소망인가. 그런데 교육을 위해 가족관계를 포기하는 것은 문제다. ‘기러기아빠’ 말이다. 가족을 우선해야 한다.”

 

 

배도선이라는 한국식 이름은 어떻게 만들었나.

 

“피터슨을 한국말에 가깝게 발음하다 보니 배도선이 됐다. 길 도(道)에 착할 선(善)이다. 한 지인은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했다. KAIST(한국과학기술원) 박사 중에 배도선이라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니 그렇게 촌스러운 이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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