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기성용의 마지막 월드컵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6.15 13:39
  • 호수 1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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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홍명보처럼 ‘멋진 피날레’ 꿈꾼다

 

2002년 5월28일, 한·일 월드컵 개막을 3일 앞두고 대표팀의 최고참 황선홍이 취재진 앞에 섰다. 그는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본대회가 시작되지 않은 시점에 뜻밖의 발표를 한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황선홍은 “늘 아쉬움으로 끝난 월드컵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싶다”고 말한 뒤 “후배 이동국의 엔트리 탈락에 마음이 아팠다. 후배들에게 미래를 맡기고 미련 없이 떠나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앞선 세 차례 월드컵에서 좌절을 거듭했던 황선홍은 만 34세에 맞은 네 번째 월드컵에서 한풀이를 했다. 첫 경기인 폴란드전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숙원의 월드컵 첫 승을 열었다. 그는 다짐대로 공격을 이끌었고, 미국전에서 붕대 투혼으로 국민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월드컵 첫 승과 16강을 넘어 4강이라는 신화를 달성한 황선홍은 센추리클럽(A매치 100경기 이상 출전)에도 가입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터키와의 3~4위전으로 모든 여정이 끝나자 수만 관중 앞에서 황선홍의 손을 들어주며 베테랑의 헌신과 열정을 인정했다. 월드컵이 끝난 뒤 황선홍의 친우이자 주장인 홍명보도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두 선수는 10월 열린 브라질과의 친선전에서 은퇴식을 갖고 14년간의 대표팀 생활을 영광스럽게 마무리했다.

 

축구대표팀 주장 기성용이 6월1일 전주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출정식에서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무릎 상태 악화로 대표팀 은퇴 다짐

 

16년이 지난 2018년, 또 다른 선수가 마지막 월드컵을 준비 중이다. 현 대표팀의 주장 기성용이다. 황선홍처럼 공식 발표를 하진 않았지만 기성용은 지난 2년 동안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이번 러시아월드컵이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이 될 것이라고 예고해 왔다. 남은 선수 생활과 가족과의 시간 등을 이유로 조기에 국가대표를 은퇴하는 경우는 많다. 국내에서도 박지성과 이영표가 국가대표 은퇴 후 2~3년가량 현역 생활을 더 이어갔다. 하지만 기성용은 만 29세에 불과하다. 4년 뒤 카타르월드컵 출전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에서 은퇴를 고려해 이목을 끈다. 

 

국가대표 은퇴를 다짐한 가장 큰 이유는 무릎 상태 때문이다. 과거 박지성이 그랬던 것처럼 기성용도 무릎 부위에 크고 작은 수술을 받았다. 그의 부친인 기영옥 광주FC 단장은 “대표팀에 합류하기 위해 편도 15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을 반복하면서 무릎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고 말했다. 기압 차와 피로도 때문에 무릎에 물이 차는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주장 완장의 무게를 견디며 받은 스트레스다. 브라질월드컵 참패 후 울리 슈틸리케 전 감독 체제로 새롭게 출발하면서 기성용은 주장을 맡았다. 2015년 아시안컵에서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준우승을 이끌었지만, 월드컵 최종예선에 접어들며 주장 기성용은 외롭고 힘들었다. 부진한 경기력에 여론은 날 선 비판을 보냈다. 대표팀에서 선수들의 자기희생과 헌신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종잡을 수 없는 발언과 전술로 팀을 위기에 몰아넣은 슈틸리케 감독은 최종예선 2경기를 남기고 물러났다. 

 

기성용은 “주장을 훌륭히 소화해 낸 (박)지성이 형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느끼고 있다”는 말로 당시 심정을 토로했다. 무릎 수술 여파로 뛸 수 없는 몸 상태였지만 기성용은 예선 마지막 2경기를 위해 대표팀에 합류하며 소임을 다했다. 러시아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되고 난 뒤 그는 SNS에 “선수들에게 소리치고 싫은 소리 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며 고충을 털어놨다.

 

지난 4년 동안 대표팀의 암흑기를 떠받친 주장은 러시아월드컵 출정식이었던 6월1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의 친선전에서 센추리클럽에 가입했다. 정확히 10년 만에 이룬 결실이었다. 2008년 요르단을 상대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른 만 19세 소년은 두 차례 월드컵을 겪으며 유럽에서도 인정받는 미드필더로 성장했다. 지난 두 번의 월드컵은 극과 극이었다. 2010 남아공월드컵 때는 프리킥으로 2도움을 올리며 16강을 견인했다. 친구 이청용과 함께 ‘쌍용’으로 불리며 대표팀 세대교체의 선봉에 섰다. 반면 팀의 확고한 주축이 된 2014 브라질월드컵에선 큰 실패를 경험했다. 세 번째 월드컵을 위해 소집된 기성용은 “이번엔 실패하고 싶지 않다.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며 각오를 다졌다.

 

센추리클럽에 가입하던 기쁜 날, 기성용은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1대2로 뒤진 채 전반을 마치고 나온 그가 라커룸으로 향하는 통로에서 화를 참지 못하고 주장 완장을 던지는 모습이 포착됐다. 답답한 경기력을 자책한 것이다. 공개석상에서 그런 식으로 감정 표현을 한 건 처음이었다. 결국 그날 경기에서 대표팀은 후반에 1골을 더 허용하며 1대3으로 패했다. 월드컵에 대한 불안감은 더 커졌다.

 

 

“러시아월드컵서 팬들 기대 부응하고 싶다”

 

러시아 입성 전 오스트리아 레오강에 마련된 훈련캠프에서는 기성용의 웃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굳은 얼굴로 훈련에만 집중했다. 차두리 코치는 “주장이니까 폼을 잡는 것”이라며 농담을 했지만 기성용의 심정은 애가 탄다. 6월7일 볼리비아와의 친선전이 끝난 뒤 기성용은 자신의 속내를 여과 없이 털어놨다. 대표팀의 경기력이 온전히 공개되는 마지막 경기였던 볼리비아전은 무기력한 0대0 무승부로 끝났다.

 

기성용은 믹스트존에서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팬들에게 항상 같은 얘기를 했다. 잘할 테니까 대회 때까지는 응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내가 거짓말쟁이가 되는 기분이 들어 힘들다”며 고개를 숙였다. 월드컵을 앞두고 주축 선수들의 줄부상으로 일어난 불안감을 평가전 내용과 결과로 가라앉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점에 주장으로서 큰 책임감을 느낀 것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그의 쓴웃음에서는 기성용이 짊어진 무게감이 온전히 느껴졌다. 

 

대표팀에서만큼은 기성용의 영향력이 손흥민보다 더 위다. 정확한 킥과 패스를 지닌 기성용으로부터 한국의 모든 플레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기성용이 올라가면 수비가 불안하고, 기성용이 내려오면 공격이 안 된다”는 이영표 KBS 해설위원의 평가 그대로다. 이제 대표팀은 그가 없으면 안팎으로 흔들리는 상황이다.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세 번째 월드컵에 나서는 기성용은 ‘하나 마나 3전 전패’라는 비관론과도 싸우고 있다. 10년 전 처음 대표팀에 입성할 때 느낀 자부심과는 다른 분위기다. 100경기가 넘는 A매치를 통해 어느새 대표팀 막내에서 주장이 된 기성용은 마지막 월드컵에서 웃을 수 있을까. 주장 완장을 찬 채 묵묵히 걸어 나가는 그의 싸움은 고돼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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