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길은 어떻게 ‘나쁜 남자’를 뛰어넘었나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3.02 12:00
  • 호수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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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폐남에서 《열혈사제》의 코믹 사제로, 스위치 전환한 배우 김남길

성당 안,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검은 수단을 입은 그는 사제 김해일(김남길)이다. 기도를 마친 김해일이 몸을 일으켜 걷기 시작하자, 카메라가 슬로 모션으로 그를 따른다. 한껏 분위기를 잡고 등장한 김해일은 이어지는 장면에서 바로 발이 삐끗, 자갈에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 체면을 구긴다. 달아오르는 분위기를 확 깨버리는 이 오프닝 시퀀스는 《열혈사제》 김해일을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단서다. ‘멋짐’과 ‘망가짐’이 기이하게 동거하는 인물임을.

김해일은 우리가 으레 떠올리는 사제의 이미지를 배반한다. 말보다 손이 앞서는 그의 뇌 중추신경을 잠식하고 있는 것은 조절 불가능한 분노. 걸쭉한 욕설도 입에 달고 사는 그는, 과거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트라우마도 지녔다. 여기에 망가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발랄함’이 얹어져 김해일이란 인물을 완성한다. 김해일이 재미있는 건,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변화무쌍함 때문이다. 배우 입장에선 탐나는 캐릭터지만, 연기해 내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인물. 김해일은 김남길이란 배우를 통과하며 매력적인 입체감을 입는다.

SBS 드라마 《열혈사제》의 한 장면  ⓒ SBS 제공
SBS 드라마 《열혈사제》의 한 장면 ⓒ SBS 제공

김남길은 날카로운 눈빛 변화만으로 극에 서늘한 긴장감을 부여해 낼 수 있는 깊은 감정 연기와 형사가 쏜 테이저건에 코믹하게 뒤로 나자빠지는 코믹한 슬랩스틱이 모두 가능한 배우다. 검사 박경선(이하늬)과 진지하게 싸우다가 갑자기 눈 흰자를 뒤집어 까 보인 후 바로 진지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열혈사제》의 한 장면은 김남길이 아니었다면 들떠 보였을 것이다. 능청스럽게 김해일의 온도를 높였다 내렸다 한다.

김해일의 이 같은 특징은 배우 김남길의 영화 밖 실제 매력과 겹친다. 현실에서 김남길은 그가 가장 애정하는 만화 캐릭터 《슬램덩크》 강백호의 현실 버전 같다. 하늘을 찌르는 발랄함과 승부사 기질을 동시에 지닌 남자. 불합리한 일 앞에선 ‘버럭’하다가도, 목젖을 보이며 웃을 땐 천진해 보이기까지 한 남자. 《어느 날》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천우희에 따르면 ‘외모를 거스르는 깨방정이 진짜 매력’인 배우이기도 하다. 김해일 캐릭터를 두고 고민하는 그를 두고 주변에서 “그건, 그냥 김남길인데?”라고 한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쯤 되면 드는 의문. 정녕 이 배우가 한때 ‘나쁜 남자’의 아이콘이었단 말인가. 영영 지울 수 없는 표식 같았던 그 이미지를 이 배우는 어떻게 뛰어넘어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놀라움이 든다.

 

# 《나쁜 남자》의 시작과, 그 이후

외모가 주는 느낌 때문인지 김남길에겐 우연히 발탁된 스타라는 인상이 있다. 하지만 이는 오해다. 그는 연극 무대를 통해 연기에 입문한 배우다. (이제는 사라진) MBC 공채 탤런트 출신이기도 하다. 일찍이 연기에 뜻을 두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온 케이스인 셈이다. 크고 작은 역할로 드라마와 스크린을 오가며 이력을 쌓았지만, 대중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배우가 되기까지의 도약 시간은 꽤 걸렸다.

확실한 도약의 발판이 된 건 《선덕여왕》의 비담이다. 비담을 통해 이 배우는 속마음을 알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를 제대로 연기할 수 있는 재능의 소유자임을 증명해 보였다. 뭇 여성들의 마음에 ‘내 것은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안아주고 싶은 남자’로 자리매김한 것도 이때다.

비담 이후 한동안 김남길을 견인한 동력은 퇴폐적인 이미지였다. 《선덕여왕》 이듬해 출연한 영화 《폭풍전야》에서 그는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무기수였고, 드라마 《나쁜 남자》에선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야망남이었다. 특히 《나쁜 남자》의 건욱은 비담 캐릭터를 현대식으로 끌어왔던 경우로, 이 드라마를 통해 김남길은 대중의 뇌리에 ‘나쁜 남자’로 강하게 각인됐다. 《나쁜 남자》 촬영 도중 갑자기 날아든 입영통지서와 그로 인한 2년간의 연기 공백은 그에게 ‘나쁜 남자’ 이미지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떠난 자의 마지막 모습은 더 깊게 남는 법이니까. 그런 그가 제대 후 첫 작품으로 선택한 드라마 《상어》는 여러모로 팬들이 김남길에게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의 연장이었다.  

김남길에게 변화가 감지된 건, 이즈음이다. 그는 자신의 대표 이미지에 안주하느냐, 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품은 배우로 탈바꿈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팬들이 환호를 보내주는 ‘나쁜 남자’라는 익숙한 길이 있었고, 모험해야 하는 새로운 길이 있었다. 김남길은 기존의 이미지를 뒤집는 후자를 망설이지 않고 선택했다. 무엇보다 자신 안에 있는 밝은 면모를 꺼내 보이고 싶어 하는 듯했는데, 그 고민의 일환으로 선택한 게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의 ‘골 때리는’ 산적떼 두령 장사정이었고, 드라마 《명불허전》의 코믹 한의사 허임이었다.

김남길은 《판도라》와 같은 블록버스터에 출연하는 동시에, 작은 영화일지라도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작품에도 출연하며 연기 보폭을 넓혔다. 《무뢰한》이 대표적이다. 전도연과 호흡을 맞춘 《무뢰한》에서 김남길은 과한 에너지를 발산하기보다는 누르고 누르고 누르다가 필요한 순간 슬며시 단도를 꺼내는 절도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무뢰한》은 분명 김혜경을 연기한 전도연이 빛나는 영화였고, 그녀의 영화로 많이 소개됐지만, 정재곤을 연기한 김남길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녹진한 기운의 영화가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그의 모든 선택이 좋았던 건 아니다. 최근 개봉했던 코미디 영화 《기묘한 가족》은 김남길의 이미지 변신에 대한 열망이 최전선에 선 작품. 《기묘한 가족》은 좀비에 물리면 회춘하다는 설정이 기발한 영화였다. 영화가 내세운 매력 역시 B급 정서의 실험적인 느낌이었다. 그러나 결과물은 그다지 기발하지도, B급 감성이란 말로 받아들이기에도 애매했다. 유감스럽게도, 김남길의 연기도 그다지 인상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것이 연출의 문제인지 캐릭터 문제인지 배우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인물의 개성을 너무 일차원적으로 그렸다는 아쉬움이 든다. 모든 작품이 배우에게 배움을 준다면, 《기묘한 가족》이 그에게 남긴 선물은 너무 조급하게 변신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 S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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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길의 세계는 넓어지는 중이다

배우는 자신의 진짜 이미지보다, 관객에게 사랑받는 캐릭터의 이미지로 기억된다는 면에서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존재다. 관객이 바라는 것과 내가 하고자 하는 것 사이의 갭이 커질수록 배우의 고민은 커진다. 《열혈사제》가 반가운 건, 김남길이 지닌 특유의 고독한 이미지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스스로가 원하는 이미지 변신을 효과적으로 시도하게 하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김해일은 가벼움과 무거움, 진중함과 유쾌함을 오가는 인물이다. 이는 ‘스위치 전환’을 이질감 없이 해내는 재능을 지닌 김남길이 뛰어들어 놀기에 좋은 멍석이다. 김남길에게 남아 있는 ‘나쁜 남자’ 이미지는 그가 장르를 넓히는 데 있어 허들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가 어떤 코믹함을 선보이든 가벼워 보이지 않게 하는 완충 장치로 작용한다는 점 역시 이 작품은 보여준다. 결국 김남길이 자신을 증명해 보이는 데 필요한 건 시간이다. 이렇게 차근차근, 그의 세계는 넓어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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