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판 ‘스카이캐슬’…동아리 활동도 ‘코디’ 받는 학생들
  • 김민주 인턴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3.05 17:00
  • 호수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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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활동 아닌 대입·취업 위한 스펙으로 전락”

#A양은 일상에 즐거운 일이 없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1년간 활동했던 사물놀이 동아리를 그만뒀기 때문이다. A양에게 사물놀이 시간은 유일하게 공부에서 벗어나 마음 놓고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물놀이 동아리를 탈퇴한 것은 담임선생님의 강한 권유 때문이었다. 지망하는 대학 전공과 관련 있는 동아리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A양은 현재 수학 동아리에 가입한 상태다.

입시 위주의 교육방침이 학생들의 취미 생활까지 뺏고 있다. 고등학교의 동아리 활동이 취미가 아닌 대입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의 주된 원인은 2015년 시작된 ‘학생부종합전형’이다. 수능이나 내신 점수가 아닌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와 자기소개서, 면접 등을 통해 학생의 성장 가능성과 잠재력을 평가하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생기부의 중요성이 크게 올라간 것이다. 

ⓒ 일러스트 정찬동
ⓒ 일러스트 정찬동

취미 활동, 삶의 질에 큰 영향

이 과정에서 부작용이 생겼다. 생기부의 ‘동아리 활동’ 항목조차 입시에 유리한 방향으로 채워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원하는 동아리 활동을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양정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오아무개군은 “이제는 동아리 활동마저도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주변의 친구 대부분이 입시를 위해 취미 생활을 포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입에 유리한 동아리의 인기는 상당하다. 그렇다 보니 가입조차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실제 서울 강서고 화학실험 동아리 홍보자료의 ‘신입생 모집 방법’에는 모집인원의 2배수보다 많은 인원이 지원할 경우 간단한 필기시험이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면접을 보는 곳도 있다. 신목고등학교의 박아무개양은 “1학년 때 과학잡지부 면접에서 떨어졌다가 2학년 때 다시 면접을 봐서 들어갔다”고 말했다.

높은 경쟁률로 들어간 동아리가 효율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화학실험반에 들어간 대일고등학교 3학년 진아무개군은 “동아리 활동 15번 중에서 실험은 5번밖에 안 했다. 대부분 생기부에 몇 줄 넣기 위해 들어온 친구들이 많아 적극적으로 동아리 활동에 참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다른 동아리도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과학 연구 동아리가 주가를 올리는 반면 취미 생활에 가까운 동아리들은 외면받고 있다. 24년간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노년환 전교조 부위원장은 “전반적으로 사물놀이나 연극, 풍물반 같은 동아리들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라며 “동아리 활동은 자아실현과 여가, 흥미가 기반이 돼야 하는데 지금은 입시에 종속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렇다면 동아리 활동이 실제 대입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까. 결론은 ‘그렇다’이다. 이현 우리교육연구소장에 따르면, 대학들은 생기부를 학업역량·전공적합성·인성·발전가능성 등 크게 4가지 범주로 나눠 평가한다. 여기서 동아리 활동은 ‘전공적합성’에 영향을 미친다. 전공적합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선 지망하는 전공과 관련된 동아리 활동을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1년간 입학사정관이었던 강영배 대구한의대 청소년교육상담학과 교수는 “평가 가이드라인에 전공과 관련된 동아리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게 돼 있다”며 “학교로서는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학과와 관련 있는 동아리 활동을 플러스 요인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학생들의 삶의 질이 고려되지 않고 있는 점이다. 올해 한국체육학회지에 실린 연세대 최현욱·이민석의 논문 ‘여가동아리 참여 대학생의 여가만족, 스트레스 관련 성장 및 삶의 질의 구조적 관계’는 “여가 동아리에 참여하는 대학생의 스트레스 관련 성장은 삶의 질에 통계적으로 유의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논문은 “삶의 진로에 대한 많은 압박감과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가는 대학생들에게 여가활동 및 스트레스 관련 성장을 통한 삶의 질의 향상은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대학생보다 더 치열한 입시경쟁을 벌이는 고등학생들에게 동아리 활동 같은 최소한의 취미 활동은 삶의 질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전문가는 이러한 학창 시절의 취미 활동 부재가 성인의 삶까지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강영배 교수는 “대학생들에게 취미를 물어보면 대부분 음악 듣고, 유튜브 보는 것이라고 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등 활동적인 취미 활동을 한다는 친구를 못 봤다”고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전략적 체험에 익숙해져 있어 대학에 들어와도 동아리 활동을 취업을 하기 위한 하나의 스펙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학창 시절 스스로 취미를 찾지 못하면 성인이 돼서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는 분석이다. 

강 교수는 “이 문제를 단순히 과도한 입시경쟁의 부작용으로만 볼 게 아니라 사회 전체 삶의 질 문제로 논의를 확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유독 ‘천만 영화’가 많이 나오는 것도 능동적 의미에서의 취미 활동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선진국은 내가 노래 부르고, 내가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돈 주고 누가 하는 것을 보는 걸 좋아한다”고 꼬집었다. 


“학벌주의가 근본적 원인”

전문가들은 결국 문제의 근원으로 학벌주의를 꼽았다. 강 교수는 “우리 사회가 어떤 능력이 있느냐보다는 어느 대학을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익을 주는 구조”라고 진단했다. 이범 교육평론가는 “우리나라는 대학 서열이 심해 동아리까지 다 준비해야 하는 학생들이 느끼는 중압감은 어느 나라보다 심하다”고 말했다.

반면 해외 고등학생들은 교과 공부 외에 예체능 활동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호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온 김아무개씨(30)는 “호주는 오로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성적이 대입에 반영된다”며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운동이나 취미 생활 같은 동아리 활동을 많이 한다”고 설명했다. 독일은 학교 대신 지자체에서 예체능 커뮤니티 활동이 활발하다. 

교육 전문가들은 동아리 활동이 순수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현 연구소장은 “동아리 활동이 대입전형의 자료로 쓰이지 않는다면 보여주기식으로만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강 교수는 “동아리 활동을 평가 항목에서 제외해야 한다. 교과과정에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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