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인터뷰②] “정보화 이후 생명화 시대 온다”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9.03.12 08:00
  • 호수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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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대한민국, 길을 묻다⑩
이어령 前 문화부 장관 “산업화 시대에 밀려나 있던 복지, 생명가치 살아날 것”(中)

혼돈의 시대다. 혹자는 난세(亂世)라 부른다. 갈피를 못 잡고, 갈 길을 못 정한 채 방황하는, 우왕좌왕하는 시대다. 시사저널은 2019년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특별기획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각계 원로(元老) 30인의 ‘대한민국, 길을 묻다’ 인터뷰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인터뷰한 시점에 맞춰 정해졌다. ⓛ조정래 작가 ②송월주 스님 ③조순 전 부총리 ④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⑤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⑥김원기 전 국회의장 ⑦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 ⑧박찬종 변호사 ⑨윤후정 초대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⑩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앞선 (上)편 [이어령 인터뷰①] “‘빨리 감기’ 하듯이 살고 있다” 기사에 이어 계속됩니다. 

10여 년 전 모두가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된다고 생각할 때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결합을 뜻하는 ‘디지로그’라는 새 개념을 제시하며 또 하나의 ‘가지 않은 길’을 개척했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 발달로 인간이 소외되고 기계가 앞서는 부작용을 보완하기 위해 아날로그적 감성을 지켜야 한다는 움직임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앞서 제시한 ‘디지로그’ 개념을 설명하며 “한국은 아이디어 가진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알아주고 지원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첨언하기도 했다. “미국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적극적으로 믿고 투자해 주죠. 구글도 대학생 둘이서 시작한 거잖아요. 지금 우리 주변에도 놀라운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만, 지원이 없어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많을 거예요.” 그는 오늘날 AI 등 기술을 산업자본이 아닌 ‘생명자본’과 접목시켜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생명이 존중되는 기술의 발달, 일찍이 그가 말한 디지로그 개념과도 맞닿아 있는 주장이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 AI 시대에 대해 이미 수년 전 ‘디지로그’ 용어를 만들어 설명하신 바 있습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조화, 결합. 지금의 구글이나 아마존이 다 이런 거예요. 디지털 회사가 자동차를 만들었어요. 갖고 있던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자율주행차를 만들고, 반대로 자동차 회사가 AI를 연구하며 디지털 세상에 진출하기도 해요. 아날로그가 지나고 디지털이 오는 게 아니라 이렇게 둘이 결합하는 시대에 대해 일찍이 얘기한 바 있었죠.”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합한 4차 산업혁명의 길로 우리 사회가 잘 가고 있다고 보세요.

“우선 ‘4차 산업’이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이, 산업은 ‘인더스트리(industry)’, 즉 ‘공장’이란 뜻이 있어요. 발전된 기술을 갖고 다시 제조업 시대로 가자는 건가, 아니잖아요. 정보화 시대 이후 지금은 무엇보다 생명자본이 강조되는 ‘생명화 시대’가 와야 할 때예요. 산업시대까진 기계의 혁명이었어요. 인간으로 치면 신체. 힘을 기르자, 근력을 기르자는 게 산업시대였어요. 그런데 이젠 근력이 아니라 지력을 기르는 시대예요. 물질이 주도하던 자본주의를 떠나, 이 지력을 기를 수 있는 생명이 중심 되고 생명이 존중되는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예를 들어 높은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었을 땐 노인이나 장애인 등 약자들은 쉽게 올라갈 수 없었잖아요. 그런데 엘리베이터 기술이 생기고 나니 모두가 동등하게 건물에 올라갈 수 있게 됐어요. 기술을 통해 모든 생명이 동등한 복지를 누리게 했죠. 나이 들어 운전 못 하는 노인들 또는 장애인들이 자율주행차로 인해 어디든 동등하게 갈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런 게 기술이 발달하는 지금, 생명자본이 우선되는 ‘생명화 시대’인 거예요. 의료도 마찬가지예요. AI 기술로 정밀 의학이 가능해지면서 같은 감기에 걸렸어도 개인마다 각기 다른 처방을 할 수 있게 됐어요. 병에 걸리기 전 선제적으로 고치는 선제 의학도 가능해졌고요. 기술을 통해, 산업화 시대에 밀려나 있던 복지, 생명의 가치가 살아나는 시대인 거죠.”

1990년 12월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오른쪽)이 서울을 방문한 평양음악단 환영만찬에서 성동춘 단장과 건배 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90년 12월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오른쪽)이 서울을 방문한 평양음악단 환영만찬에서 성동춘 단장과 건배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아무리 어두워도 어딘가 출구 있다”

그는 입버릇처럼 글쓰기가 곧 자신의 삶이자 목숨이라고 강조해 왔다. 그렇기에 건강이 약해진 지금도 결코 펜을 놓지 않으며 아직도 써야 할 글이 넘쳐난다고 말한다. 스스로 삶을 정리하는 중이라 말하고 있는 이 시간, 그의 노트엔 나날이 무엇이 적히고 있을까. 삶의 한복판에서 분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과 친해지고 있다는 그는 어떤 말을 해 주고 싶을까.

절대 자서전은 쓰지 않겠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어떤 글을 쓰고 계세요.

“자서전은 안 쓰지만 내 얘기를 객관화하고 거기에 남의 얘기도 섞어 ‘한국인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내가 경험했던 모든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 우리 이야기를 전부 모아 열두 권짜리로 완성하고 싶은데, 불행히도 내가 몸이 아파 잘 진행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 열두 권 책 중 첫 번째 권을 쓰고 있고, 추가로 알파고 내용이 담긴 AI 관련 책도 쓰고 있고, 우리의 젓가락 문화에 대한 글도 쓰고 있어요. 십이간지의 상징성과 관련해서도 쓰고는 있는데 완성을 못 하고 있죠. 이제 좀 글맛도 알고 정말 더 잘 쓸 것만 같은데. 일본 화가 호쿠사이가 나이 아흔쯤에 ‘하나님, 이제 좀 그림을 그릴 만하니 죽게 생겼습니다. 조금 더 살게 해 주세요’라고 빌었다던데, 딱 그런 마음이네요. 죽음과 딱 마주하니 남은 시간이 너무 짧고 아까운 거죠.”

지금 같은 한반도 상황에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해야 할 일도 많을 것 같습니다. 

“당장 (인터뷰 시점으로) 지금 북·미 정상회담도 진행 중이지만, 우리나라만 봐서는 한반도 상황에 답이 없어요. 한반도는 중국을 통해 들어온 대륙문화와 미국 등 서양과 일본 등을 통해 들어온 해양문화가 딱 마주한 곳이에요. 우리가 이들 사이 중재 역할을 잘하면, 이들의 패권 다툼 속에 고립되는 게 아니라 화합의 주역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옛날엔 늘 우리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져 왔죠. 그런데 이젠 고래 싸움을 새우가 잘 말릴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를 만들고 화합의 역할에 기여하고자 했는데, 나는 병들고 시간은 없게 됐네요. 내가 처음 말한 대로 ‘갈 길은 멀었는데 석양이 지고 있는’ 상황인 거죠. 내가 미처 못 한 일들을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이 대신해 주길 바랍니다.” 

인생의 선배로서 삶의 한복판에서 고민하는 젊은 세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내가 젊은 시절 절망스러웠을 때 쓰고 지닌 시가 있었어요. 산중수복의무로(山重水複疑無路)-산과 물이 첩첩하여 길이 없는가 했는데, 류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산골 속에 버드나무가 우거지고 꽃이 만발한 또 하나의 마을이 있더라. 정말 길이 막혀 있고 이게 끝이라고 생각한 그 순간에 또 하나의 마을이 나타난다는 뜻이에요. 사람들이 불행한 건 자꾸만 자로 잴 수 없는 걸 재려 하기 때문이에요. 숫자에 의해 자신의 행복도를 측정하고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죠. 왜 옛날에 길 가다 만나는 깡패들이 ‘야, 너 왜 이렇게 ‘재고 다녀’’라고 말하곤 했잖아요. 그 말 그대로 나도 말하고 싶어요. 재고 다니지 말라고요. 잴 수 없는 것 많아요. 그러니 젊은 친구들은 재지 말고 너무 쫓기지도 말고 그냥 주어진 삶을 살길, 아무리 어두워도 어딘가엔 출구가 있고 전혀 모를 딴 마을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길 바랍니다.” 

2013년 12월15일 이어령 전 장관이 자신의 팔순 잔치이자 책 《생명이 자본이다》 출판기념회에서 부인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와 함께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13년 12월15일 이어령 전 장관이 자신의 팔순 잔치이자 책 《생명이 자본이다》 출판기념회에서 부인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와 함께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딸 이민아 목사 먼저 보낸 후 무신론자에서 교인으로

 

“네가 애통하고 서러워할 때 내 머릿속의 지식은 건불에 지나지 않았고 내 손에 쥔 지폐는 가랑잎보다 못하다는 걸 알았다. 70 평생 살아온 내 삶이 잿불과도 같은 것이라는 걸 가르쳐 준 것이다” - 이어령 저서 《딸에게 쓴 편지》 中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에겐 목사였던 딸과 스물다섯의 어린 외손자를 먼저 떠나보낸 아픔이 있다. 딸 이민아 목사는 김한길 전 의원과 결혼 후 미국으로 건너가 변호사로 활동하다 2009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2011년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이듬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 목사는 남미·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을 다니며 청소년 구제 활동을 했다. 이 목사 역시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지금의 아버지처럼 치료나 수술 없이 그저 암을 받아들였다. 

“우리 딸 미국에서 아주 잘살았어요. 요트가 두 대였고 그랜드 피아노도 집에 떡하니 있고. 근데 그거 다 뿌리치고 아프리카 가서 아이들 끌어안고 살았잖아요. 그 큰 집을 하우스 처치로 만들어 교회 못 나오는 사람들 불러다 예배하고. 그러니 가정이 지켜질 수 있었겠어요. 우리 딸은 고통, 고난을 자처해서 갔어요. 그러다 보니 암도 걸리고 나중엔 눈도 안 보이고. 그래도 물질보다, 죽음보다 더 높고 소중한 비전이 있었던 거예요.” 

늘 단단하고 엄한 아버지였지만 딸의 투병 앞에선 그도 약해졌고 무너졌다. 호영송 작가가 4년여 동안 쓴 《창조의 아이콘 이어령 평전》에는 ‘(그는) 늘 무슨 일에 부딪히건 대강 넘어가지 않고, 자존심 꺾고 타협하지 않았는데 딸의 아픔과 좌절 앞에 무릎을 접었다’고 써 있기도 하다. 딸이 투병 중 실명하게 되자 그는 “내 딸에게서 빛을 거둬가지 않는다면 당신(하나님)을 위해 평생 봉사하겠다”고 기도했다. 그리고 7개월 만에 딸 이 목사는 눈을 떴다. 

이를 경험한 후 이 전 장관은 기독교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는 오랜 무신론자로 살며 기독교를 비판하는 글도 많이 써 왔다. 그러나 딸의 꾸준한 전도와 딸을 통해 얻은 경험이 그에게 일흔의 늦은 나이에, ‘지성에서 영성으로’ 사는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

“신을 안 믿는 사람도 다 종교인이에요. 나 하나님 안 믿어, 그 사람처럼 하나님 잘 아는 사람 없어요.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안 믿는다는 거니까. 신은 죽었다고 한 니체처럼 하나님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믿지 않았을 때부터 종교는 끝없이 나에게 싸움을 걸어왔어요. 지금 보면 그 순간에도 늘 하나님은 계셨다고 생각해요. 다만 종교를 믿기 전이나 후나 늘 성서처럼 살아야 하는 건데, 역시 악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맘대로 안 되네요.” 

☞계속해서 (下)편 [이어령 인터뷰③] 문화부장관 시절 눈물 자아낸 감사 편지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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