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내 되살아난 광복군 청사, 갈 길 잃은 임정 청사
  • 모종혁 중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12 17:00
  • 호수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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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만 409곳 산재
복원 위한 한·중 협력체계 구축해야

지난 3월29일 중국 내륙직할시 충칭(重慶)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도심 한복판인 쩌우룽루(鄒容路)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청사 복원 기념식이 개최된 것이다. 이날 충칭을 찾은 이낙연 국무총리는 기념사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복원은 한·중 유대의 과거를 복원하는 데 머물지 않고 새로운 유대의 미래를 시작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탕량즈(唐良智) 충칭시장은 인사말에서 “충칭은 중국 인민들이 한국 인민들에 대한 우호를 담은 곳이다”고 밝혔다. 그러나 광복군 청사의 복원은 두 지도자의 말처럼 그리 순탄치 못했다.

청사는 지난해 중반 충칭시 정부가 전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해 복원됐다. 다만 새로 지어진 건물은 광복군 청사의 본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나마 청사 복원은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이 충칭을 방문해 충칭시 정부에 요청하면서 이뤄졌다. 그런데 충칭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임시정부 유적의 복원이 남아 있다. 2013년 철거됐던 임시정부의 3번째 청사 오사야항(吳師爺巷)이 그것이다. 4월10일 필자가 찾은 오사야항 청사의 부지는 주상복합건물의 건설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3월29일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복원된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을 방문해 내부를 관람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낙연 국무총리가 3월29일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복원된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을 방문해 내부를 관람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15년 철거됐던 충칭 광복군 청사 복원 

필자는 2005년부터 중국 각지에 산재한 임시정부와 광복군 관련 유적을 취재해 왔다. 따라서 광복군 총사령부와 임정 청사의 철거 과정도 줄곧 지켜봐왔다. 사실 광복군 청사의 원형 보존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건물이 너무 오래되어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청사가 위치한 쩌우룽루는 충칭 한복판의 중심가다. 만약 충칭시 정부로부터 광복군 청사 부지의 토지 사용권을 매입하려면 적어도 수백억원의 예산이 필요했다. 여기에 청사 리모델링비와 유지비 예산도 따로 책정해야 했다.

우리 정부가 명확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사이에 2009년 충칭시는 재개발계획에 따라 쩌우룽루 일대 토지 사용권을 민간 부동산업체에 판매했다. 따라서 2014년 2월 한·중 양국 정부는 광복군 청사를 철거한 뒤 오사야항 청사 부지에 복원키로 합의했다. 이를 위해 충칭시는 오사야항 청사 부지에 한국풍속거리를 조성하고, 그곳에 오사야항 청사와 광복군 청사를 동시에 복원키로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국가보훈처는 역사학자·건축전문가 등의 의견을 청취했고 광복군동지회 등 관련 단체의 의견을 수렴했다.

그러나 두 달 뒤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가 충칭을 방문해 충칭시 정부에 광복군 청사의 원형 보존을 강력히 요청했다. 그로 인해 양국의 합의는 산산이 깨져 원점으로 돌아갔다. 양국 정부의 실무진은 다시 협상에 들어갔다. 결국 같은 해 12월 보훈처는 “중국 정부는 주중 대사관 관계자를 초치해 ‘한국의 요청과 한·중 관계를 고려해 광복군 건물을 원형 보존키로 충칭시가 결정하고 중앙정부가 승인하였음’을 통보했다”고 보도자료를 냈다. 그러나 불과 반년여 만에 광복군 청사는 전격 철거됐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중 밀월관계가 최고조에 달했던 2015년 벌어졌다.

그해 9월3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했다. 다음 날 자리를 옮겨 상하이 임정 청사의 재개관식에 참석했다. 박근혜 정부 시기 청와대와 외교부 기록을 살펴보면, 2013년 6월 박 대통령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의 첫 정상회담에서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지의 보존을 요청했다. 그에 따라 2014년 1월 하얼빈(哈爾濱) 기차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개관했다. 또한 같은 해 5월 시안(西安)시 두곡진(杜曲鎭)의 광복군 제2지대 주둔지에 표지석이 설치됐다. 그와 달리 충칭의 광복군 청사는 보훈처의 호언이 무색하게도 철거됐다.

3월29일 중국 충칭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복원된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 연합뉴스
3월29일 중국 충칭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복원된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 연합뉴스

 

험난했던 임정 청사 보존, 이소심 여사 헌신

사실 충칭 내 4번째 임정 연화지(蓮花池) 청사조차 원형대로 보존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특히 1980년대 말 충칭시의 도시재개발계획에 따라 헐릴 위기에 내몰렸던 청사를 앞장서 살렸던 이소심 여사(80)의 공로가 컸다. 이 여사는 독립운동가 이달(李達) 선생의 딸이다. 이 선생은 1930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해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 밑에서 일했다. 당시 이 선생은 충칭 여성과 결혼해 어린 딸과 아들을 두고 있었다. 부인은 광복 후 충칭에 계속 남아 두 자녀를 키웠다. 큰딸인 이 여사는 충칭에서 저명한 의사가 되었고 탄탄한 기반을 잡았다.

이 여사는 1980년대 말부터 충칭시 인민대표로 일했는데, 도시재개발계획에 따라 연화지 청사 일대가 철거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비록 이 여사는 정식 우리말 교육을 받지 못해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근원은 잊지 않았다. 또한 민족해방투사였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며 자랐다. 따라서 당시 수교가 되지 않은 한·중 양국 정부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연화지 청사는 꼭 지켜 달라”는 호소문을 보냈다. 그에 따라 1991년 한·중 정부 간 대화가 정식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협상은 기대와 달리 쉽지 않았다.

충칭시의 도시계획 변경 문제와 청사 내에 거주 중이던 주민들의 이주 대책으로 수년 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이소심 여사는 과거 필자와 만나 “당시는 한·중 간 교류가 막 시작된 상태라서 양국 정부 관계자들의 대화가 순조롭지 못했다. 내가 각 방면으로 나서서 노력했지만 수많은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고 밝혔다. 결국 1994년 들어서야 협상은 간신히 타결됐다. 그 뒤 연화지 청사는 독립기념관과 충칭시의 협의 아래 1995년 1월 복원 공사에 들어갔다. 같은 해 8월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구지(舊地)’라는 명칭으로 정식 개관했다.

그 뒤 두 차례의 중축과 보수 과정을 거쳐 재개관했다. 현재 중국에는 상하이와 충칭 외에도 항저우(杭州)·창사(長沙)·류저우(柳州) 등 여러 도시에 임시정부 청사가 산재해 있다. 또한 우리 정부가 파악한 중국에서 복원해야 할 독립운동 유적은 409곳이다. 하지만 남의 땅에서 독립운동 유적을 복원하는 일은 굉장히 어렵다. 특히 체제와 문화가 전혀 다른 중국과 협상을 진행하는 데는 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따라서 실행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한 우리 정부의 체계적인 프로세스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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