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한 엄마도, 버려진 아기도, 죄인은 아니다”
  • 이철재 미국변호사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15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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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변호사의 재밌는 미국] 영아 유기와 세이프 헤이븐법

근래 미국에서 인기 있는 드라마 중에 《디스 이즈 어스(This Is Us)》가 있다. 첫 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1970년대 어느 날, 한 젊은 백인 부부가 세 쌍둥이를 출산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한다. 같은 날 한 흑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소방서 앞에 버려진다. 

세 쌍둥이를 낳은 부인은 한 때 생명이 위독한 상황에 처하지만 잘 극복하고 살아난다. 하지만 세 쌍둥이 중 하나는 태어나자마자 그만 죽는다. 아이의 아버지는 슬픔을 삼키며 아직도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아내를 병실에 놔두고 살아남은 두 아이를 보러 간다. 

거기서 그는 소방관이 버려졌던 흑인 아이를 데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아내를 설득하여 그 흑인 아이를 입양한다. 그리고 40년 뒤, 카메라는 장성한 세 아이들이 사는 모습을 비춘다. 또 그들 부모의 젊은 시절 이야기도 시공을 초월해 펼쳐진다. 이들의 스토리가 오락가락하게 얽혀 드라마는 흥미롭게 전개된다. 

미국 NBC 드라마 《디스 이즈 어스(This Is Us)》 포스터 ⓒ NBC 홈페이지
미국 NBC 드라마 《디스 이즈 어스(This Is Us)》 포스터 ⓒ NBC 홈페이지

영아유기 다룬 ‘미드’…한국도 예외 아냐  

드라마의 시작은 영아 유기다. 줄거리는 영아 유기로 한 가족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아 유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히 있는 일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영아 셋이 하루 만에 유기된 일이 벌어졌다. 영아 유기는 분명 범죄다. 하지만 사전단속이 거의 불가능하다. 부모가 아이의 출산 전부터 머릿속으로 유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해도, 실제 유기되기 전까지 법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법은 인간의 생각에 대한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법이 사전예방을 위한 장치를 마련할 수는 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시작된다. 첫째는 영아유기를 줄이고 예방하는 것, 둘째는 모두에게 불편한 진실인 낙태죄를 정비하는 것이다. 

낙태 이슈에 있어 미국에선 두 그룹이 부딪힌다. 낙태를 반대하고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자는 ‘프로 라이프(Pro-life)’, 또 낙태를 여성 건강과 신체 자치권의 일환으로 보는 ‘프로 초이스(Pro-choice)’가 그들이다. 이들은 대선과 대법관 임명 때마다 팽팽히 맞선다. 대표적인 프로 초이스 대통령으론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를 들 수 있다. 

프로 초이스 대통령의 정책은 언제나 낙태가 ‘합법적이고, 안전하고, 드물게 이뤄져야 한다(Legal, safe and rare)’는 원리에 기초한다. 여성의 신체 자치권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도록 정책을 펼치는 한편, 원치 않는 임신을 애초에 방지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인다.

특히 오바마 정부 때 통과된 미국 건강보험법 ‘오바마 케어’는 여성의 피임약 구매를 보험 처리되도록 해 원치 않는 임신을 막는데 큰 효과를 보고 있다. 통계상 프로 초이스 대통령이 재임할 때 미국의 낙태율은 현저히 낮아진다. 또한 오바마 케어가 시행되고 1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낙태율은 1973년 낙태가 합법화 된 이후 가장 낮다. 많은 연구 논문들은 오바마 케어를 낙태율이 낮아진 주요 이유 중 하나로 꼽는다. 낙태율이 낮아진다는 건 그만큼 원치 않는 임신이 줄어든다는 걸 뜻한다.

헌법재판소가 낙태를 처벌하도록 한 형법 조항에 헌법불합치를 선고한 4월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헌법재판소가 낙태를 처벌하도록 한 형법 조항에 헌법불합치를 선고한 4월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한국도 얼마 전 낙태금지가 헌법불일치 판정을 받아 법제를 정비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 기회에 여성이 본인 처지에 맞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낙태냐, 아니냐의 선택 기로에 놓이기 전에 이를 예방할 수 있는 제도 역시 강화해야 한다.

그런데 때론 원했던 임신이지만 중간에 큰 변화가 생겨 아이를 키울 수 없게 된 사람도 있다. 어떤 경우 자신이 임신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낙태를 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아이를 낳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영아 유기를 줄일 수 있을까. 이는 나라를 불문하고 골치를 앓고 있는 문제다. 

미국의 경우 여러 법제가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게 ‘세이프 헤이븐(Safe Haven)법’이다. 한국도 한 번 생각해볼 만한 법이다. 이 법은 주(州)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생후 30일 미만의 영아를 소방서나 경찰서, 병원, 교회 등에 맡기면 유기의 책임을 묻지 않는 걸 공통된 골자로 한다. 단 영아의 몸에 학대 흔적이 없어야 한다. 

세이프 헤이븐법은 1999년 텍사스에서 통과된 ‘베이비 모세법(Baby Moses Law)’에서 출발했다. 나일 강가에 버려진 모세가 이집트 공주의 손에 자라, 나중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한 민족의 영웅이 됐다는 것에 착안한 이름이다. 

다만 이 법은 부모가 아이를 기르지 않고 버리는 것을 오히려 조장한다는 반대 의견도 많다. 또한 법의 시행 이후 실제로 영아 유기치사가 얼마나 줄었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현재 미국의 50개 모든 주가 텍사스의 뒤를 이어 세이프 헤이븐법을 채택한 걸 보면 실효성이 없다고 말하긴 힘들다.

입양의 날인 2017년 5월11일 오후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에 베이비박스가 설치돼 있다.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베이비박스에 놓인 영아들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지만, 지원책이 충분하지 않은 데다 입양을 보내면 개인정보가 노출되는 것을 우려하는 미혼모들이 많아 영아 유기는 줄지 않고 있다. ⓒ 연합뉴스
입양의 날인 2017년 5월11일 오후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에 베이비박스가 설치돼 있다.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베이비박스에 놓인 영아들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지만, 지원책이 충분하지 않은 데다 입양을 보내면 개인정보가 노출되는 것을 우려하는 미혼모들이 많아 영아 유기는 줄지 않고 있다. ⓒ 연합뉴스

영아유기해도 책임 안 묻는 ‘세이프 헤이븐法’ 

한국에도 ‘베이비 박스’라는 게 있다. 영아를 유기하지 않고 책임감 있는 기관에 맡기는 것이다. 이는 세이프 헤이븐법과 몇 가지 점에서 다르다. 베이비 박스는 자선 단체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아직 합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또한 베이비 박스 관리자는 아기를 두고 가는 부모를 보면 따라가 인적사항 등을 묻는다. 

세이프 헤이븐은 미국 전역에서 합법적으로 인정된 제도다. 또한 특정 장소를 찾아갈 필요 없이 가까운 공공장소에 아이를 맡길 수 있다. 무엇보다 세이프 헤이븐 법에선 부모의 인적 사항을 불문에 붙인다. 법의 목적이 최대한의 합법성과 비밀보장을 전제로 죽을 지도 모를 영아를 하나라도 살리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낙태를 하는 사람은 없다. 영아유기를 부추기고 싶은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낙태와 영아유기는 인류의 문명과 함께 이어져온 행위다. 아무리 근절하려 해도 못했다. 오히려 불법 낙태시술을 받다 임신부가 사망하거나, 영아 시신이 기차 화장실에서 발견되는 비극을 빚었다. 과연 단속과 처벌만이 능사인지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어느 대학교 총장님에게 직원이 찾아왔다. 학생들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다녀 잔디가 죽는다는 것이다. 직원은 잔디밭에 담을 둘러 학생들의 출입을 막자고 제안했다. 총장님의 생각은 달랐다.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길을 뚫어 학생들이 지름길로 이용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총장님의 뜻대로 움직였다. 오히려 이리저리 잔디를 밟고 다니는 일은 줄어들었다.

법의 목적은 범죄를 발본색원해 처벌하는 것만이 아니다. 때론 범죄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 관리하고 예방하는 것도 목적 중 하나다. 각자 도덕적 가치를 기준으로 반대론자들을 서로 몰아세우기 보다는, 근본 해결책을 찾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아이디어를 저울질 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선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가기 이전에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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