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족보 있는’ 이야기?
  •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학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17 18:00
  • 호수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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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쿤타 킨테’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1978년 국내 TV에서 방영되어 아주 큰 인기를 끌었던 미국 드라마(미드) 《뿌리(Roots)》의 주인공 이름이다. 이 드라마는 알렉스 헤일리라는 흑인 작가가 1976년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기초로 만든 것이다. 소설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뉴욕타임스의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46주나 올랐다. 작가는 자기 외할머니에게서 쿤타 킨테라는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노예로 잡혀왔다는 말을 듣고 자랐고, 이를 추적해 총 7대에 걸친 자기 조상의 이야기를 소설로 펴냈다. 쿤타 킨테는 아프리카 감비아강 옆에 살던 망딩가족이었는데 18세기경 소년 시절에 노예 사냥꾼에게 잡혀 영국의 노예 운반선에 실려 메릴랜드주로 왔다. 그는 4번이나 탈주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마지막에는 도망 못 가게 아예 발목이 잘렸다. 그래도 삶을 이어가며 결혼하고 ‘키지’라는 딸을 낳는다. 그녀는 백인 주인에게 팔려가 강간을 당하고 아들을 낳았는데 결국 그가 작가의 외증조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처음부터 ‘픽션(허구)’이라고 밝힌 작가의 변에도 불구하고, 이 책 끝에다 방대한 추적 노력의 결과로 써낸 ‘사실적 소설’이라고 써놓는 바람에 미국과 아프리카의 유전학자, 민속학자들의 ‘사실 규명’ 시도를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소설의 상당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는 판정을 받았다.

#2: 족보는 한 가문의 혈연관계의 계통도를 적어 놓은 도표 형식의 책이다. 중국에서는 왕족이 아닌 집안이 족보를 가지게 된 것은 한나라 때며, 가장 오래된 족보는 공자 가문의 족보로서 지난 2500여 년 동안 기록되어 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안동 권씨의 ‘성화보(成化譜)’라고 알려져 있다. 서양에서는 성경의 ‘모세 5경’과 ‘역사서’의 여러 문헌도 지루할 정도로 혈통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첫 부분인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예수의 혈통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성경의 적지 않은 부분은 바로 족보인 셈이다.

유럽의 왕족 및 귀족 가문도 족보가 전해 내려왔는데, 이 족보의 상당수는 ‘사실과 다른’ 허구다. 고대 영국 왕들의 족보는 게르만족의 ‘으뜸신’ 중 하나인 ‘오딘’을 조상으로 그리고 있으며, 아담과 이브까지 혈통도를 그린 족보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금 전 국민의 98% 이상이 본인은 양반 가문 출신이라 믿고 있다고 한다. 본디 조선 초 과거를 통해 형성된 귀족계급인 ‘양반(兩班)’은 전 인구의 1%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왜란, 호란 등으로 수많은 족보가 소실된 데다 사회 혼란기를 타고 수많은 ‘족보’가 ‘만들어져’ 거래된 결과라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청와대에서 시민사회단체 간담회 전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청와대에서 시민사회단체 간담회 전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얼마 전 대통령은 한 간담회에서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말은 상당히 세계적으로 족보가 있는 이야기”이며, “원래 국제노동기구(ILO)가 오래전부터 임금주도성장을 주창해 왔었고, 이는 많은 나라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덧붙여 “오바마 대통령도 시정연설 이런 쪽에서 말한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ILO는 그 조직의 특성상 주류 경제학자들이 아니라 소수의 좌파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반영했을 뿐이며, 필자가 아는 한 임금을 올려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이론은 세계의 어떤 시장경제 국가도 채택한 적이 없다. 오바마도 연방의 기준최저임금을 올리지 못했다. ‘균형임금보다 최저임금이 더 높아질수록 실업이 더 늘어난다’는 정통 경제이론을 믿는 의회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통령의 ‘족보’ 이야기도 ‘사실과 다른’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족보’ 발언의 한편에서는 경기동행지수와 선행지수가 최장기간 연속 하락하는 등 불황은 더 짙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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