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식민잔재,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19 22:4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29화 - 일제시대 장애인 ‘학대’의 기억
장애인의 생식 능력을 없애는 단종 작업 본격화 하기도

얼마 전 《항거》란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3.1 만세시위 당시 유관순과 함께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갇힌 여성 애국지사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 중 개성에서 시위를 이끈 시각장애인 심명철의 언행이 눈길을 끌었다. 검찰 취조 중 장애인이 무슨 독립운동을 하냐고 추궁하자 그는 "내 눈이 멀었다고 내 마음도 먼 줄 아느냐"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몸도 성치 않은 이의 울분과 호기가 가슴에 와 닿는 대목이다. 돌이켜 보면 전 국민이 차별 받던 시대에 그는 여성에다 장애인이란 '3중의 차별'에 시달렸을 터라 안타까운 마음이 더해진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반 민중들은 누구나 예비 장애인이 될 처지에 놓였다. 일제의 수탈로 생활고에 허덕여 각종 질병에 쉽게 노출됐고, 전염병이 돌아도 치료를 받을 길이 막막했다. 또 대륙 침략을 위한 군수산업의 발전으로 산업재해가 빈번했으며, 일경의 고문, 형벌 등 가혹 행위로 장애인 수가 급격히 늘어나기도 했다. 가령 19218700여 명이던 시각장애인 수는 6년 뒤에 30% 증가했고, 같은 시기에 6800명 정도였던 농아인은 50%나 더 늘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일제가 세운 제생원, 갱생원, 정신병원의 수용 인원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치료 목적 보다는 '감금' 시설에 가까웠다. 더구나 많은 수를 차지하는 지체장애인 의료 시설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방치’된 식민지 조선의 장애인들

기막힌 일은 지역 의료를 맡은 공의(公醫) 한 명이 담당하는 인구 수가 약 4만 명에서 많게는 12만 명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식민지 의료제도란 게 조선인 보다 일본 이주민의 보호 위주였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총독부 《통계연보》1926년 이후 관공립의원 이용 횟수를 살펴보면 극소수에 불과한 일본인이 조선인 보다 많거나 비슷한 빈도를 보였다. 이와 같이 의료기관과 의사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 지속적인 관리가 요구되는 장애인들은 '의료 불모지대'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공의 배치와 관할구역을 총독부 경무총감부가 지휘하도록 해 경찰이 의료와 장애인 일까지 떠맡게 된 사실이다. 일제 순사나 순사보가 천연두 예방 주사를 놓거나, 길거리를 배회하는 장애 걸인과 정신지체자들을 검속하러 다니기에 바빴다. 아무래도 일선 경찰의 손을 거치다 보니 장애인은 치료나 구제 받기는 커녕 도리어 단속과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공의의 순회 진료 모습. 오른쪽은 1944년 해발 1300미터가 넘는 야마나시현으 로 강제이주 당해 추위와 기아로 목숨을 잃은 도쿄 후지쿠라 지적장애원생들
일제강점기 공의의 순회 진료 모습. 오른쪽은 1944년 해발 1300미터가 넘는 야마나시현으 로 강제이주 당해 추위와 기아로 목숨을 잃은 도쿄 후지쿠라 지적장애원생들

식민본국 장애인들의 사정은 조선보다 더 나았을까? 잇단 침략전쟁을 벌인 일본에서 전쟁의 광기는 장애인에 대한 갖은 학대로 이어졌다. 전시에 농아인에게 수화도 못하게 했고, 지적장애인을 집안에 가둬 둘 수 있는 법도 생겼다. 이들을 감금해 놓은 방은 '자시끼로(座敷牢)'라고 불렸는데 단순히 격리시키려는 목적만이 아니었다. 예컨대 도쿄 도립 마쓰자와 정신병원의 경우 1938년 이후 사망자 수가 급증해 전체 환자의 40%에 달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정부가 식량배급량을 줄여서 '굶겨 죽인' 것이었다. 전쟁물자가 부족한 마당에 장애인까지 먹여 살릴 생각이 없었단 얘기다.

어이없게도 일제는 병력 부족을 이유로 지적장애인들을 징병하기도 했다. 20059월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부터 패전 때까지 지적장애인 480명 이상을 불법적으로 입대시켰다"고 폭로했다. 이들에게는 월급이나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고 착취를 일삼았다고 한다. 게다가 위험한 일을 시켜도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을 최전선으로 내모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아무리 전시라지만 장애인들을 그토록 탄압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일본의 근대 역사를 살피다 보면 의외의 사실을 알 수 있다. '근대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1896년 《인종개량》이란 책에서 "좋은 부모를 짝지워서 좋은 아이를 낳도록 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폈다. 그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란 말로 유명한 만민평등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이처럼 평등을 외친 자가 몇 년 뒤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다고 딴소리를 한 것이다.

그의 제자인 다카하시 요시오는 한술 더 떠 "서양인들과 결혼을 해서 일본 민족의 품질을 높여야 한다"고 떠들었다. 최고 지성인이란 자들이 이럴 정도였으니 그들 눈에 '불량품'으로 비춰진 장애인은 국제무대에서 일본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는데 걸림돌로 취급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우생학적' 사고 탓에 일제는 식민지 보다 오히려 자국의 장애인 탄압에 더욱 열을 올렸던 것이다.

일본 1만 엔권 지폐 인물인 후쿠자와 유키치와 그의 '인종개량' 주장이 담긴 포스터. 오른 쪽은 장애인 한 명의 복지에 6만 마르크나 든다며 탄압을 선동하는 나치 선전물
일본 1만 엔권 지폐 인물인 후쿠자와 유키치와 그의 '인종개량' 주장이 담긴 포스터. 오른 쪽은 장애인 한 명의 복지에 6만 마르크나 든다며 탄압을 선동하는 나치 선전물

1930년대 대륙침략을 앞둔 일제는 전장에 내보낼 '건강한 인구 획득'이란 국가 목표를 세웠다. 반면에 '쓸모없고' 세금만 축내는 장애인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정책을 폈다. 1936년 요미우리 신문이 "나쁜 피의 원천을 끊고 민족을 보호하자"면서 여론을 이끌자 군국주의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단종(斷種)법안을 내놓았다. 이 법안은 나치 독일이 순혈 아리안 인종을 보전하기 위해 만든 유전병 자손 방지법'을 본뜬 것이었다.

4년 뒤 일제는 '국민우생법'을 만들어 장애인의 생식 능력을 없애는 단종 작업을 본격화했다. 장애인은 '쓸모없는 존재'를 넘어 '제거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법 제1조는 "악질적인 유전성 질환의 소질을 가진 자의 증가를 방지하고~"라 하여 정신질환자, 시각장애인, 농아인 등에게 단종, 낙태 수술을 강제했다. 국가가 장애인들의 '대를 끊는' 악행을 저지른 셈이다. 후생성이 펴낸 《의제 백년사》에는 강제 단종된 남녀가 538명으로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장애인들이 희생된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과 본국에서 장애인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편 군국주의 일본

조선에서도 일본의 영향을 받아 장애인 단종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19361월 동아일보는 "악질의 유전병자는 자식을 못 낳게 해 건전한 민족을 만들자"라는 주장을 폈고, 여러 신문과 사회단체에서도 줄기차게 단종법 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뿌리깊은 장애인 차별 의식과 편견도 이 무렵 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장애인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인식은 '또 하나의 식민잔재'가 아닐까 싶다. 단종 대상자로 먼저 나병이라 불린 한센병 환자들이 리스트에 올랐다. 일제는 이들을 전남 소록도 갱생원에 수용해서 강제노역과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이를 거부하거나 도망치다 붙잡힌 환자들에게 징벌로 단종 수술을 행했다.

특히 1933년 원장에 취임한 스오 마사스에는 자신의 동상을 세워 절을 시키고 강제 낙태나 단종 시술을 확대하는 등 악랄한 짓을 일삼았다. 이에 한센인들의 분노가 끓어올라 마침내 1942년 원생인 이춘상이 스오 원장을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일로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처형당했다. 그 무렵 조선에서도 단종법이 시행될 예정으로 많은 장애인들이 '불능' 위기에 몰렸지만 다행히 전황이 격화되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소록도 갱생원 감금실과 단종 수술대. 오른쪽은 시각장애인 애국지사 심명철(1896~1983)
소록도 갱생원 감금실과 단종 수술대. 오른쪽은 시각장애인 애국지사 심명철(1896~1983)

지난 4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대해 사실상 위헌 결정을 내렸다. 1953년 낙태를 처벌하는 조항이 도입된 이후 66년 만의 일이다. 일각에선 국가가 개인의 신체를 통제한 데서 벗어나 '몸 주권' 시대를 맞게 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과거 장애인 학대의 기억을 되살려봐도 소외된 자들의 생명에 대한 '자기 결정권'은 더욱 존중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때마침 4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언뜻 시각장애인 애국지사인 심명철이 유관순과 함께 옥중에서 외쳤던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피눈물로 기도했네 /대한이 살아 있다, 대한이 살아 있다~" 100년 전 이 땅의 차별받던 한 장애 여성이 만세 함성을 이끈 역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