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미투, 한국 사회를 뒤흔들다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6.18 08:00
  • 호수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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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카르텔을 깬 ‘미투 운동’
《걸캅스》 흥행 등 문화예술 지형도 바뀌어

2018년 1월29일, JTBC 《뉴스룸》에 서지현 검사가 출연해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면서 미투 운동이 촉발됐다. 우리 사회 곳곳에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도 말하지 못했던 여성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미투 운동은 문화예술계에서 시작됐지만 한국의 문화예술계에선 불가능해 보였다. 가해자들이 문화권력으로, 스승으로, 선배로 군림하는 위계구조 때문이다. 하지만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공분이 일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언론이 성추문 이슈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최영미 시인이 고은 시인을 고발한 것으로 간주되는 시가 뒤늦게 크게 기사화됐다. 한국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의 출발이었다. 고은 시인 파문은 문단 미투 운동으로 이어졌다.

뒤이어 한국 연극계의 큰 어른인 연출가 이윤택이 가해자로 지목되면서 연극계도 미투 불길에 휩싸였다. 김기덕 감독에 대한 폭로와 조재현, 조민기, 이영하, 오달수, 곽도원, 최일화 등 배우들에 대한 폭로도 나왔다. 김생민 등 방송인에 대한 미투 운동도 이어졌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 조재범에 대한 폭로와 함께 미투 운동이 스포츠계에서도 시작됐다. 그 밖에 학교, 심리상담, 무용 등 각 부문에서 미투 불길이 타올랐다.

서지현 검사의 성폭력 피해 고발 이후 한국 사회의 미투 운동은 들불처럼 번졌다. ⓒ 연합뉴스
서지현 검사의 성폭력 피해 고발 이후 한국 사회의 미투 운동은 들불처럼 번졌다. ⓒ 연합뉴스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주다

미투 운동은 한국 사회 침묵의 카르텔을 깬 엄청난 충격이었다. 권력자가 힘없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유린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으로 여겨졌고, 주변인들은 봤어도 못 본 척, 들었어도 안 들은 척해 왔다. 류근 시인은 문단 미투 파문에 “이제야 마치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 소스라치는 척하는 문인과 언론의 반응이 놀랍다”고 꼬집었다. 한 연극인은 “공연계에서 성폭력 논란은 과거부터 비일비재하게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렇게 업계가 입을 다문 가운데 언론도 침묵의 카르텔에 동참했다. 최영미 시인이 고은 시인을 고발하는 시를 썼는데도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공분이 들끓기 전까진 보도하지 않았다. 미투 운동 이전에 연출가 이윤택이 국립극단에서 성폭력 문제로 배제됐는데도 관련 보도가 없었다. 이러니 피해자들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에겐 가해자 눈치를 보며 계속 시종 노릇을 하거나 아니면 업계를 떠나 침묵하는 길밖에 없었다. 폭로했다가 권력을 쥔 가해자로부터 보복당하거나 업계 인사들로부터 배신자 취급을 당할 걱정을 해야 했다. 힘없는 피해자의 말에 사회가 귀 기울여줄 거라는 기대가 없었고, 또 아무리 피해 증언을 해도 가해자가 처벌받을 거란 기대도 없었다. 피해자들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학습된 무기력’, 즉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그렇게 만든 건 침묵과 무관심에 동참한 한국 사회 전체였다.

미투 운동은 바로 그 구체제가 깨졌다는 걸 의미했다. 사람들이 더 이상 방관하지 않고 피해자의 말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자 언론도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이 용기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명이 낸 목소리에 뜨거운 반응이 나타나자 다른 피해자들이 이에 고무돼 또 다른 목소리를 내고, 그에 대한 반응이 또 다른 피해자를 호출하는 선순환이 시작됐다. 인터넷 언로가 열린 것도 피해자들에게 힘이 됐다.

사법기관의 태도도 달라졌다. 둘 사이에 벌어진 과거의 일에 대해 판단하기 어렵다는 태도에서 벗어나 피해자의 말을 적극적으로 들어주기 시작했다. 과거엔 피해자가 권력자에게 성폭력을 당하고도 계속 권력자와 함께 일했으면 피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젠 피해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성인지 감수성’이 중시된다. 그러자 많은 피해자들이 더욱 용기를 얻게 됐다.

미투 운동은 문화예술계로 퍼져 연극 연출가 이윤택, 김기덕 영화감독 등이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 시사저널 고성준·연합뉴스
미투 운동은 문화예술계로 퍼져 연극 연출가 이윤택, 김기덕 영화감독 등이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 시사저널 고성준·연합뉴스

한국 사회 성의식을 뿌리째 흔들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이윤택처럼 유죄 판결을 받거나 조민기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조재현처럼 업계를 떠났다. 최근 과거 미투 가해자가 이름을 바꿔 대한민국 연극제에 작품을 냈다가 뒤늦게 밝혀져 한국연극협회가 제명한 일도 있다.

하지만 폭로자에 대해 고소를 제기한 김기덕 감독처럼 반격에 나선 이도 있고, 일부는 무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그중엔 억울함을 호소한 이도 있다. 그나마 크게 알려진 가해자들은 확실한 불이익을 받았지만 국민일보가 2018년 2월부터 올 2월 사이에 불거진 미투 117건을 조사한 결과 가해자가 실형을 받은 사례는 6건으로 나타났다.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스쿨 미투’가 불거진 학교 65곳 중 수사가 이뤄진 곳은 27곳뿐이다. 2018년 3월부터 12월까지 ‘교육 분야 성희롱·성폭력 신고센터’에 신고된 사례 33건 중 중징계는 1건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피해자를 다시 무력감에 빠뜨리기도 한다.

가해자로 지목됐지만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을 보며 미투 운동에 대한 반발도 나타났다. 증거도 없이 여성의 말만 듣고 사람을 범죄자로 몬다는 것이다. 최근 봉준호 감독을 성폭력 논란에 휩싸이게 했다가 실수로 잘못된 말을 했고, 웃자고 한 말이었을 뿐인데 정색하는 사회가 무섭다고 해명한 김혜자는 그러면서 “그동안 미투로 지탄받은 사람 중에 억울한 사람이 또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한다”고 말했다. 미투 운동 여론재판이 억울한 사람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이런 말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젊은 남성들 사이에 이런 생각이 널리 퍼졌고 그래서 성범죄 무고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미투 운동이 긍정적 효과를 낳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한국 사회 성의식을 뿌리째 뒤흔들었다고 할 정도다. 민주노총의 올해 조사에선 미투 운동 이후에 ‘성적인 농담이나 여성비하적 언행이 줄었다’ ‘관리자가 성폭력 예방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남성 노동자들이 성폭력 문제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는 답들이 나왔다. 여성을 은근히 희롱하는 듯한 회식 문화도 여러 직장에서 바뀌었다.

얼마 전 한선교 의원이 배현진 자유한국당 당협위원장에게 ‘우리 예쁜 배현진’ 등 예쁘다는 말을 반복한 것이 크게 문제가 된 것도 달라진 성의식을 보여주는 사례다. 문화예술계에서도 후배나 지망생에게 함부로 말하는 문화가 많이 사라졌다. 미투 운동에 고무돼 학교폭력 미투 등 다양한 분야의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사회가 거기에 귀 기울이는 일들이 많아졌다. 미투 운동은 여성의 사회적 각성에도 영향을 미쳐 페미니즘 열풍을 촉발했고, 최근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걸캅스》 흥행 등 우리 문화예술계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미국에서 《캡틴마블》 같은 여성 히어로가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투 운동은 공고한 남성사회에 균열을 낸 충격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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