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미술, 혹은 미술가의 지위
  • 김정헌(화가, 4·16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6.19 18:00
  • 호수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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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양반이 행세하다 망신당한 얘기가 있다. 얘기인즉슨 이렇다. 한 양반짜리가 길을 가다가 갑자기 내린 비로 개울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데, 그 근처의 농부가 이를 보다 못해 도움을 줄 요량으로 그의 등을 대고 업히라고 했다. 그런데 그의 등에 업힌 이 양반짜리가 내 하던 버릇대로 그 농부에게 “거~ 어디 사는 누군가? 내 말을 놓겠네. 흠”이라고 하자, 이 말을 들은 농부는 대뜸 “어 그러면 나도 놓겠네” 하고 냇물 가운데 내려놓아 망신을 주었다. 이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지배하던 계급사회를 풍자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살아간 화가가 있었으니 실경산수로 유명한 겸재 정선이다. 나는 펄펄 살아 있는 그의 그림들을 여러 번 따라 그리고 패러디(풍자적으로 빌려다 그린 그림)했다. 겸재가 많이 그린 금강산 그림과 비 온 후의 습윤하고 청량하게€갠 인왕산을 그린 《인왕제색도》는 나로 하여금 그 기운을 자꾸 패러디하게 만든다. 그의 진경산수는 외형만을 담아내는 형사(形似)가 아니라 정신을 담아내는 전신(傳神)이었음을 후대의 모든 비평가들이 입을 모은다.€

겸재는 이름 있는 반가 사대부 출신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 사대부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직업화가, 즉 화원 출신들을 일컫는 ‘환쟁이’로 내세우는 데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는 평생 친구인 시인 이병연과 같은 사대부들과 어울리면서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라는 말을 자주 하며 살았다. 자기 스스로 사대부라는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다.

이런 선비 화가들은 겸재 이외에도 여럿 있었다. 능호관 이인상, 관아재 조영석, 표암 강세황 같은 화인(환쟁이)들은 전부 사대부 출신 화가들로서 높은 안목과 식견으로 세상을 보고 관직을 가지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계급사회인 조선시대와 달리 현대에 와서 화가를 천시하거나 아래 계급으로 대하는 자세는 물론 없어졌다. 그러나 미술은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대상이나 마음에 담은 생각을 모두 물질로 표현하기 때문에 ‘미술품’들은 당연히 자본주의 아래서는 그 가치가 ‘돈’으로 환산된다.

많은 미술품들이 기업의 ‘비자금’ 조성에 동원되는 이유가 이 미술품의 ‘미적 가치’가 아닌 ‘물질적 가치’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미술품의 환금 가치 때문에 미술가들도 계급적으로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어 버렸다. 피카소는 그의 천재적인 재주로 그가 그린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든다. 그는 소위 미다스의 손을 가진 화가다. 그러나 그의 명성과 부의 성공은 말년에 그를 여성들과 성희나 즐기는 고립된 인간으로 만든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5월21일 공개돼 기립박수를 받았다. ⓒ EPA 연합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5월21일 공개돼 기립박수를 받았다. ⓒ EPA 연합

이번에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은 상류층과 하층민 두 가족의 동선이 겹치면서 생긴 비극을 그리고 있다. 하층 계급은 교묘히 상층 계급에 스며들어 기생한다. 이 두 가족의 계급은 냄새로 그 차이를 드러낸다. 반지하방에서의 체취는 그들의 삶에서 거부할 수 없는 천형적인 것이 된다.

미술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의 ‘냄새’ 앞에 노출돼 있다. 시, 서, 화가 일치했던 조선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미술가들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자기 스스로 인문적 교양을 쌓고 인격을 도야해야 한다. 미술가(환쟁이)들은 그들의 지위가 어떻든 간에 그들을 억누르는 권력과 자본의 지배에 상상력을 무기로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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