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도자기 수출의 초석을 쌓은 ‘고려할머니’
  • 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6.16 16:00
  • 호수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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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세계사 ⑧] 후손들 400년 동안 도예 기술 이어와 납품 어용가마로 지정되기도

7편에서 거론했던 거관(巨)과 함께 웅천에서 끌려온 사람 가운데는 ‘에이(嫛)’, 즉 나중에 고려할머니(高麗)라 칭송되는 계집아이도 있었다고 했다. 미쓰우라 사료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미카와치 도자기 약기(三川內燒物略記)》는 에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조선에서 빨래하러 나온 어린 여성을 데려와서 영주가 외로운 그녀에게 모든 편의를 보아주며 손으로 빚는 도예 기술을 배우게 하였는데, 1610년경 스무 살쯤 되어 보였다. 그는 이름도 나이도 밝히지 않았고 혼인할 뜻도 없었다. 거관(巨関)이 혼인하여 1610년 아들을 낳자 어미처럼 거관의 아이를 돌보다가, 영주가 나카자토 모에몬(中里茂衛門)에게 의탁을 시켰다.

마쓰우라 가문의 딸인 ‘마쓰우라 사요히메(松浦佐用姫)’의 도자기 인형(가라쓰 근대도서관 소장). 『만엽집(万葉集)』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조용준 제공
마쓰우라 가문의 딸인 ‘마쓰우라 사요히메(松浦佐用姫)’의 도자기 인형(가라쓰 근대도서관 소장). 『만엽집(万葉集)』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조용준 제공

에이가 거관과 고향이 같아 가까운 사이였기에 거관의 아이를 돌봐주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에이와 결혼했다는 남자의 성씨 나가자토(中里)는 납치되기 전 고향이 울주군 청량면 중리(中里)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따라서 에이의 남편 역시 조선에서 끌려온 사기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최근 에이의 14대 종손에 의해 나카자토 모에몬은 에이의 남편이 아니라, 에이의 장남이라는 증언이 나와 위 기록에 오류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 기록과 《히라도 도자기 연혁 일람(平戸燒沿革一覽)》 등을 바탕으로 추정하면, 에이는 1610년 시이노미네(椎ノ峰)로 나카자토 모베에(中里茂兵衛)에게 시집와서 1613년 아들 나카자토 모에몬을 낳았다. 1622년 남편이 사망하자 미카와치(三川內) 나가하야마(長葉山)로 이주해 가마를 열었다. 그렇게 해서 1610년 히라도에서 헤어진 에이와 거관은 1622년 미카와치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미카와치에 이미 와 있던 가라쓰 출신의 사기장들과 함께 오늘날 미카와치 도예촌의 터전을 닦은 것이다.

《히라도 도자기 연혁 일람》 1637년조에 기록된 당시 가마의 주요 인물을 보면 다음과 같다.

두령(頭領): 산노조 마시이치(三之丞正一)
화사(畫師): 야마노우치 조베에(山の內長兵衛),
마에타 도쿠자에몬(前田德左衛門)
불대장: 나카자토 모에몬(中里茂衛門)
보조: 후지모토 지자에몬(藤本治左衛門)
거나꾼: 오키타 구베에(冲田久兵衛)

여기서 두령은 우리말로는 ‘변수’라고 한다. 가마 전체의 일을 총감독하고 이끄는 사람이다. 불대장은 제품의 질을 좌우하는 불 때는 일이나 기술적 문제를 책임진다. 거나꾼은 ‘꼬박’이라고도 한다. 태토를 이겨주거나 굽을 깎는 일 등을 맡는다.

히라도에서는 가라코에가 일상 식기로 널리 사용된다. ⓒ 조용준 제공미카와치 도자기의 대표 상품 ‘가라코에’(마쓰우라 사료박물관 소장). 고려할머니 후손인 나카자토 미마타(中里己年太·1870~1941)의 왕실 진상품 여분이다.
히라도에서는 가라코에가 일상 식기로 널리 사용된다. ⓒ 조용준 제공
히라도에서는 가라코에가 일상 식기로 널리 사용된다. ⓒ 조용준 제공미카와치 도자기의 대표 상품 ‘가라코에’(마쓰우라 사료박물관 소장). 고려할머니 후손인 나카자토 미마타(中里己年太·1870~1941)의 왕실 진상품 여분이다.
미카와치 도자기의 대표 상품 ‘가라코에’(마쓰우라 사료박물관 소장). 고려할머니 후손인 나카자토 미마타(中里己年太·1870~1941)의 왕실 진상품 여분이다.

미카와치야키 대표 상품 가라코에 고려할머니가 처음 제작

이 명단에서 알 수 있듯, 히라도 어용가마의 핵심은 거관과 에이 집안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변수를 거관의 아들인 산노조가 맡았고, 도자기 품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불대장을 에이의 아들 나카자토 모에몬이 맡았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화사 가운데 마에타 도쿠자에몬은 산노조의 장인이다.

미카와치야키 대표 상품의 하나에 ‘가라코에 자기(唐子繪燒)’라는 것이 있다. 이는 중국 복장의 어린이가 소나무 아래에서 모란꽃, 나비와 노닥거리며 뛰노는 그림이 그려진 제품이다.

처음에는‘100명의 어린이가 무리 지어 노는 그림(百子嬉戱)’으로 시작했으나, 나중 어용품이 되고 난 다음부터 도자기에 그려지는 어린아이 숫자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그리하여 왕실과 바쿠후에 헌상하는 것에는 7명, 번에 헌상하는 것에는 5명, 일반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는 3명의 아이가 그려졌다.

가라코에는 에이, 즉 고려할머니가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맑게 노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넣은 제품은 사실 남성보다는 여성의 솜씨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언제부터 왜 중국옷을 입은 어린이들을 도자기에 그려 넣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미카와치는 물론 중국인들의 왕래가 잦았던 가라쓰와 히라도 지역에서는 중국 어린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을 볼 때마다 고국의 땅과 고국에 두고 온 조카들이며 동네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서 그렇게나마 그림을 그려 마음을 달래곤 했던 것이 아닐까.

아무튼 마쓰라 번주도 이 가라코에를 각별히 아껴서 ‘오도메야키레이(お止め燒き令)라는 훈령까지 내린다. 이 훈령은 다른 도자기 업자들이 고려할머니의 가라코에를 흉내 내어 만들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이다.

이 가라코에 대해서는 1905년 미국 시카고(A.C. McClurg & Co.)에서 출간한 《일본 미술사(Arts and Crafts of Old Japan)》의 저자로 일본 도자기 전문가인 스튜어트 딕(Stewart Dick)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상품이라고 말하면서 ‘란가쿠데(卵殻手)’와 더불어 미카와치야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으로 꼽고 있다.

그런데 사발이나 꽃병, 접시 등 여러 용도로 만들어진 가라코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자기의 위쪽 입술 아래 부분에 ‘고(高)’자가 띠 모양의 영락(瓔珞·구슬을 꿰어 만든 목걸이나 가슴치레걸이) 형태로 둘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히라도에 있는 고려 묘비의 ‘고(高)’자 문양과 같은 것으로 조선 사기장이 만들었다는 표식이다. 글자에 디자인적인 변형을 주어, 그것이 ‘고(高)’자임을 모르게 한 것이다. 이 문양은 가라코에와 더불어 미카와치 도자기의 대표적인 상징이자, 조선 사기장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에이는 1672년 무려 106세까지 살았다. 그야말로 ‘고려할머니’답다. 그녀는 미카와치에서 작은 사당을 지어놓고 조선의 가마신인 ‘니무네묘진(ニムネ明神)’이란 산신을 모셨다고 한다.

에이는 돌아가던 해까지 제관(祭女)으로 해마다 제사를 지냈는데, 숨을 거두던 날에 “내가 죽으면 이 사당을 불태워라. 연기가 하늘로 오르면 조선으로 돌아가니 이 제사를 지내지 말고, 새로이 산신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내라. 만약 연기가 하늘로 오르지 않고 땅에 맴돌다가 사라지면 (이곳에 머물러 자손들의 도업을 돌봐줄 것이니) 영원히 이 사당에 제사를 지내라”고 유언을 남겼다. 에이가 숨을 거두고 자손들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사당에 불을 붙이니 과연 바람대로 연기가 땅에서 머물다 사라져 그 후 계속 이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테두리에 ‘고(高)’자 문양이 둘러져 있는 가라코에 접시 ⓒ 조용준 제공고려할머니를 모시는 가마야마진자(釜山神社)의 도리이 ⓒ 조용준 제공
테두리에 ‘고(高)’자 문양이 둘러져 있는 가라코에 접시 ⓒ 조용준 제공
테두리에 ‘고(高)’자 문양이 둘러져 있는 가라코에 접시 ⓒ 조용준 제공고려할머니를 모시는 가마야마진자(釜山神社)의 도리이 ⓒ 조용준 제공
고려할머니를 모시는 가마야마진자(釜山神社)의 도리이 ⓒ 조용준 제공

고려할머니 후손들 모두 도예업 종사

현재 이 사당은 원래 위치에서 옮겨 마키와치 동쪽 산등성이에 새로 짓고 가마야마신사(窯山神社)라고 부르고 있다. 에이가 돌아가고 어느 해인가 큰불이 일어나 사당 좌우의 큰 소나무가 불탔기 때문에 또 다른 화재와 재앙이 두려워 옮긴 것이다. 이 신사에서는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올리는데, 그중 11월15일이 본 제삿날이다.

그런데 이 신사의 안내판에는 가마야마(窯山)가 아니라 부산(釜山)신사라고 돼 있다. 신사의 선돌에 새겨진 신의 이름 역시 부산대명신(釜山大明神)이다. 이 때문에 흔히 고려할머니가 부산 출신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도자기 가마(窯)와 취사용 가마(釜)의 일본어 훈독이 ‘가마’로 똑같기 때문에 생긴 오류다. 일본에서는‘窯山’과 ‘釜山’을 혼용해서 쓰는 경우가 매우 잦다. 그러니 한국의 지명인 부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고려할머니의 후손 2대 모우에몬(茂右衛門)은 다섯 아들을 두었다. 이 중 장남이 사망하는 바람에 차남이 나카자토(中里) 성을 이어받았다. 3남은 뒷날 기하라산(木原山)의 담당자가 되어 요코이시(橫石)라는 성을, 4남은 사토미(里見) 성을, 5남은 후루카와(古川) 성을 만들어 분가해 모두 도예업에 종사했다.

③ 고려할머니 에이의 후예인 사토미(里見) 가문 가쿠쇼가마(嘉久正窯)의 멋진 작품들④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미카와치 가라코에⑤ 2015년 7월9일 네덜란드 왕실에 지구형 주전자 도자기를 헌상하면서 찍은 기념사진(히라도고쇼단우에몬 가마 홈페이지). 왼쪽에서 두 번째가 나카자토 다이로, 그 옆은 주일본 네덜란드 대사, 그 옆은 사세보 시장. 맨 왼쪽은 마쓰우라 쇼(松浦章) 현 마쓰우라 가문 당주
고려할머니 에이의 후예인 사토미(里見) 가문 가쿠쇼가마(嘉久正窯)의 멋진 작품들 ⓒ 조용준 제공
③ 고려할머니 에이의 후예인 사토미(里見) 가문 가쿠쇼가마(嘉久正窯)의 멋진 작품들④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미카와치 가라코에⑤ 2015년 7월9일 네덜란드 왕실에 지구형 주전자 도자기를 헌상하면서 찍은 기념사진(히라도고쇼단우에몬 가마 홈페이지). 왼쪽에서 두 번째가 나카자토 다이로, 그 옆은 주일본 네덜란드 대사, 그 옆은 사세보 시장. 맨 왼쪽은 마쓰우라 쇼(松浦章) 현 마쓰우라 가문 당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미카와치 가라코에 ⓒ 조용준 제공
③ 고려할머니 에이의 후예인 사토미(里見) 가문 가쿠쇼가마(嘉久正窯)의 멋진 작품들④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미카와치 가라코에⑤ 2015년 7월9일 네덜란드 왕실에 지구형 주전자 도자기를 헌상하면서 찍은 기념사진(히라도고쇼단우에몬 가마 홈페이지). 왼쪽에서 두 번째가 나카자토 다이로, 그 옆은 주일본 네덜란드 대사, 그 옆은 사세보 시장. 맨 왼쪽은 마쓰우라 쇼(松浦章) 현 마쓰우라 가문 당주
2015년 7월9일 네덜란드 왕실에 지구형 주전자 도자기를 헌상하면서 찍은 기념사진(히라도고쇼단우에몬 가마 홈페이지). 왼쪽에서 두 번째가 나카자토 다이로, 그 옆은 주일본 네덜란드 대사, 그 옆은 사세보 시장. 맨 왼쪽은 마쓰우라 쇼(松浦章) 현 마쓰우라 가문 당주 ⓒ 조용준 제공

4남의 사토미 가문에서는 사토미 마시시치(里見政七)가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만국박람회에 작품을 출품해 1등상인 금패(金牌)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사토미 가문은 5대째인 사토미 요노스케(里見要之助)가 상호를 가쿠쇼가마(嘉久正窯)로 바꿔 지금도 미카와치 마을의 중추 가마로 활약하고 있다. 청화백자로 만든 도자기들이 일품이다. 현재 사토미 주다카시(里見寿隆·1971~)라는 젊은 당주가 가마를 이끌고 있다. 그는 나가사키현 주최 도자기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

나가자토 가문은 정유재란(1597년) 400년을 맞아 1998년에 진해에서 개최한 제1회 웅천헌다회(熊川献茶会)에 마쓰우라 가문의 현 당주인 마쓰우라 쇼(松浦章)와 함께 참석해 조상의 귀향을 알리는 의식을 치렀다.

400년 동안 기술을 이어온 나카자토 가문은 1924년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결혼식 행사에 그릇을 납품하는 영예를 얻었다. 1928년에는 구나이초(宮內廳·일본 국왕과 관계된 사무나 국사 행위를 담당하는 부서)에 납품하는 어용가마로 지정되었다.

나가자토 가문의 종손으로 18대 젊은 당주인 나카자토 다이로(中里太陽·1977~)는 아버지 나카자토 이치로(中里一郞)와 함께 현재 미카와치 889번지에서 ‘히라도고쇼단우에몬가마(平戸洸祥團右衛門窯)’를 운영하고 있다. 1622년에 창립한 이 가마는 1895년에 법인 설립을 했다. 다이로는 미카와치 도자기 작품전에서 그랑프리 대상을 수상했다. 그의 아내 나카자토 유키미(辛美)와 어머니 나카자토 유미코(由美子)는 모두 화공으로 일하고 있다. 아버지와 자신이 물레를 돌리고 성형을 하면 어머니와 아내는 거기에 그림을 그리는 행복한 사기장 집안이다.

가마를 연 이후로 줄곧 아마쿠사 도석을 사용한 청화백자와 국화 무늬 세공의 정교한 장식용품, ‘순무(蕪.かぶら)’ 도안의 일용식기 등을 제작하고 있다. 무 도안은 나카자토 가문 특유의 것으로, 마쓰우라 다카노부(松浦隆信) 번주가 자손 번영을 기원하는 무 도안을 만들 것을 권장한 것에서 유래했다. 또한 풀과 꽃무늬를 넣어 얇게 만든 청화백자 컵과 잔, 가라코에 그릇들도 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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