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소리” “참견 말라” 연일 文대통령 때리는 北…의도는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19.06.28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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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자 담화, 대외선전매체 등 가용수단 총동원해 ‘밀당’
“배은망덕한 행위” “모욕적” 비판도 잇따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한 '남북정상 자수 초상'. 지난해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열린 제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백두산 그림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찍었던 장면을 자수로 옮겨 놓은 것이다. ⓒ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한 '남북정상 자수 초상'. 지난해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열린 제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백두산 그림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찍었던 장면을 자수로 옮겨 놓은 것이다. ⓒ 연합뉴스

북한이 연일 남한, 정확히는 문재인 대통령을 몰아세우고 있다. 북·미 사이의 중재자로 높이 평가하다가 "주제 넘게 헛소리 한다" "이제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에 참견하지 말라"는 등의 막말을 늘어놓기에 이르렀다. 미국과의 불통 속 중국과 접점을 찾는 듯하던 북한이 난데없이 문 대통령을 조준하고 나서자 우리 정부도 당혹해 하는 모습이다. 북한이 애꿎은 문 대통령을 비난하고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 대외선전매체 《메아리》는 6월28일 '주제넘은 헛소리에 도를 넘은 생색내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얼마 전 북유럽 나라들을 행각한 남조선 당국자가 회담과 연설, 기자회견 등을 벌려놓고 저들의 '한반도평화프로세스' 정책이 북의 '핵미사일 도발'을 중지시키고 북남 사이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켰다는 등 체면도 없이 사실을 전도하며 자화자찬하였다"고 비난했다. 이어 "미국 상전의 눈치만 살피며 북남 선언들의 이행을 외면하여 북남 관계를 교착 국면에 빠뜨린 남조선 당국이 무슨 체면으로 아전인수격의 자화자찬을 늘어놓으며 생색내기에 열을 올리는지 실로 가소로운 일"이라며 "지금은 생색내기나 온당치 못한 헛소리가 아니라 북남 관계의 교착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실천적인 행동이 필요한 때"라고 밝혔다.

여기서 '남조선 당국자'가 최근 북유럽 순방을 마친 문 대통령이란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도 전날 글에서 문 대통령의 북유럽 순방 발언이 남북 관계 교착 책임을 북한에 돌리려는 거라고 반발했다. 《우리민족끼리》 역시 문 대통령의 이름은 직접 거론하지 않은 채 "심각한 우려를 자아내는 현 사태를 놓고 진짜 책임을 느껴야 할 당사자는 다름 아닌 남조선 당국자"라고 했다.

북한 매체들의 이 같은 주장은 6월27일 권정근 북한 외무성 미국담당 국장의 담화와 맞물려 나왔다. 권 국장도 담화에서 남한을 비난했다는 점에서 북한이 '문 대통령 때리기' 모드로 나아가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다만 권 국장이 '당분간 북·미 대화에 주력하는 가운데 남한은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투로 얘기한 것과 달리 선전매체들은 문 대통령의 어떤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권 국장은 담화를 통해 "조미(북·미) 관계는 우리 국무위원회 위원장 동지(김정은)와 미국 대통령 사이의 친분 관계에 기초하여 나가고 있다"면서 "우리가 미국에 연락할 것이 있으면 조미 사이에 이미 전부터 가동되고 있는 연락 통로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고 협상을 해도 조미가 직접 마주 앉아 하게 되는 것만큼 남조선 당국을 통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더해 "남조선 당국자들이 지금 북남 사이에도 그 무슨 다양한 교류와 물밑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광고하고 있는데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며 "남조선 당국은 제집의 일이나 똑바로 챙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폭언 수준에 가까운 발언을 쏟아냈다.

그동안 북·미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며 고군분투해온 문 대통령 입장에서는 북한의 대응이 뼈아플 수밖에 없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2018년 6월의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개최는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해당 정상회담 이후 개최된 제1차 북·미 고위급회담의 결렬로 양측 관계가 냉각됐을 때 다시 대화의 불씨를 살린 것도 문 대통령이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한국을 향해 대화에서 빠지라고 요구하는 건 매우 배은망덕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도 6월28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권 국장의 발언이 모욕적이라며 "문재인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본부장은 "북한 외무성의 미국 담당 국장이라는 핵심 간부가 이처럼 김정은 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 간의 (4·27 판문점 정상회담, 9·19 평양 정상회담에서 서로 협력하겠다고 다짐한) 합의를 부정하는 발언을 한 것은 북한 최고지도자의 권위를 무시하고 김 위원장의 대외적 약속에 대한 신뢰도도 실추시킨 행위"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런 태도가 대미 사대주의·반민족적이라고 비판하며 김 위원장이 권 국장을 교체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집무실로 보이는 공간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친서를 읽고 있는 모습을 조선중앙통신이 6월23일 보도했다. ⓒ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집무실로 보이는 공간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친서를 읽고 있는 모습을 《조선중앙통신》이 6월23일 보도했다. ⓒ 연합뉴스

그러나 권 국장이 단독 행동으로 강경 발언을 늘어놨으리라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김 위원장의 묵인 내지 종용이 없으면 불가능한 언급이라는 것이다. 앞서 강경 발언으로 잠시 교체설이 나돌았던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 등도 아무런 조치 없이 자리를 지키며 승승장구했다. 더군다나 김혁철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가 지난 북·미 협상 과정의 실패를 이유로 숙청됐다는 설까지 제기되는 상황이다. 실무 당국자의 행위가 상부의 기류를 정확히 이해하고 신중하게 나와야만 하는 게 요즘 북한 분위기다.

결국 김 위원장을 위시한 북한이 남한과 일종의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다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 북한은 2월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후 미국과 좀처럼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문 대통령이 한·미 동맹에 방점을 두고 북측 입장을 미국에 피력하는 데 소극적이라는 실망감을 각종 통로를 통해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도 지난 4월 시정연설에서 남측에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 바 있다.

한편, 통일부는 6월27일 권정근 국장의 담화에 대해 "정부는 남북공동선언을 비롯한 남북간 합의를 차질없이 이행해 나간다는 입장이며 이런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남과 북, 그리고 북미간 대화의 조속한 재개를 바탕으로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정착을 위해 계속 노력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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