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길 치닫는 한일관계, ‘친일의 망령’을 소환하다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7.2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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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35화 - 민족반역자 3인 3색···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항쟁 ‘부민관 의거일’에 즈음해

1945년 7월 24일 해질 무렵,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인 경성 부립극장에 일제 고위관료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 총독, 군사령관, 난징 괴뢰정부와 만주국 대표 등이었다. 미국에 대한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지는 '아세아 민족 분격대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대회 열기가 한껏 달아오른 밤 9시경, 갑자기 무대 뒤에서 ‘펑’하는 굉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조선 청년 세 사람이 사제폭탄을 터트렸던 것이다. 다행히 이들은 재빨리 현장을 빠져나갔고, 인명 피해도 그리 크진 않았다. 광복을 불과 20여 일 앞두고 벌어진 이 ‘부민관 폭파의거’는 일제강점기의 사실상 마지막 의열투쟁으로 기록된다.

주목할 점은 이 대회를 일제가 아닌 ‘대의당’이란 친일단체가 주최한 사실이다. 그 당시 유럽 전선은 이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아시아에서도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닥친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여전히 “총력으로 항전하자”면서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무리들이 활개치고 다녔다. 대의당 당수인 박춘금이란 자는 “학도병 사오천 명쯤 죽어서 2500만 동포가 잘 된다면 더 좋지 않은가”라는 망언도 서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의거를 일으킨 청년들이 조선 총독보다 그를 먼저 처단하려 했을까. 그만큼 그의 행적은 민족 전체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외세에 동족 팔아 의원·재벌·장군으로 인생 역전한 민족반역자들

박춘금(1891~1973)은 일본군 병영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다가 16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판을 전전했다. 1920년 ‘상애회’란 단체를 만든 그는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희생자들의 시신 뒤처리를 맡아 일본 당국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후 일경의 비호 아래 권총과 일본도를 차고 노농쟁의 현장을 누비며 ‘청부 해결사’ 노릇을 했다. 그는 일본인 기업가 편에 서서 힘없는 조선 노동자들을 짓밟았고, 특히 1924년 전남 하의도 농민들이 소작쟁의를 벌이자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 때문에 박춘금은 ‘정치 깡패의 원조’로 불리고 있다.

박춘금과 도쿄 제4선거구에서 중의원에 당선된 직후 모습. 박춘금(원 안) 옆은 일본인 부인
박춘금. 오른쪽 사진은 도쿄 제4선거구에서 중의원에 당선된 직후 모습. 박춘금(원 안) 옆은 일본인 부인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은 이처럼 깡패 짓을 일삼던 그가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에 당선된 사실이다. 그것도 도쿄 한복판에서 1932년과 1940년 두 번이나 일본인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았다. 조선인 가운데 병탄이나 친일 행적의 공으로 귀족원 의원을 지낸 이는 여럿 있지만, 국회의원은 박춘금이 유일하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대표로 뽑아줄 정도였으니 그가 얼마나 ‘뼛속 깊이’ 친일파였을지 능히 짐작된다. 한데 프랑스 식민지 베트남에서도 박춘금에 버금가는 ‘역대급’ 매국노가 있었다. 소작농 출신인 휜 떤(1837~1874)은 식민지인으로 유일하게 프랑스 장군에 오른 인물이다.

휜 떤은 1862년 농민군 병사로 프랑스에 맞서 싸우다가 투항했다. 그는 자신이 몸담았던 부대의 대장과 동료 28명을 붙잡아 처형하면서 프랑스군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현지 지형에 밝은 그는 침략군을 이끌고 베트남 남부의 항불 저항세력을 궤멸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대가로 프랑스의 ‘레지옹 도뇌르’ 최고 훈장을 받았고, 지역 주둔군 사령관인 ‘란 빈’ 직위에 올랐다. 우리로 치자면 동학 농민군 병사가 일본군 장군에 오른 셈이었다. 식민당국은 또한 그에게 저택과 경마 도박장, 농장을 선사했고, 남부 두 개 지방의 땅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도 주었다.

‘벼락출세’로 기고만장해진 휜 떤은 주민들을 자신의 농장에 강제 노역시키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지르다가 37살이란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병사하고 말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아들 휜 꽁 민은 아버지와는 전혀 다르게 베트남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란 점이다. 그는 프랑스 유학 후 판사로 일하면서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분별했고, 식민당국 주지사의 잘못을 지적하며 사임을 요구하는 등 ‘의롭고 지혜로운’ 명판사로 평가를 받았다. 베트남에서는 “쓴 가지에서 달콤한 열매를 맺었다”라는 말로 이들 부자를 비교하며, 둘의 ‘극과 극’ 삶을 교과서에 실어 후대의 교훈으로 삼고 있다.

휜 꽁 민을 기리는 사당. 위폐에는 ‘위대한 휜 꽁 민, 38 나이에 잠들다’라고 적혀있다. 오른    쪽은 아버지 휜 떤과 휜 꽁 민, 그의 부인
휜 꽁 민을 기리는 사당. 위폐(가운데)에는 ‘위대한 휜 꽁 민, 38세 나이에 잠들다’라고 적혀있다. 오른쪽은 아버지 휜 떤과 휜 꽁 민, 그의 부인

묘하게도 휜 떤과 같이 침략군의 ‘길잡이’ 노릇으로 신세를 바꾼 이가 대만에도 있었다. 구셴중(고현영, 1866 ~1937)은 타이베이 성문을 열고 일본군을 맞이한 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1894년 청일전쟁 후 대만을 얻은 일본군이 지룽항에 도착하자 그곳을 찾아가 “대만의 질서를 회복해 달라”면서 길 안내를 자청했다. 당시 대만에서는 항일세력의 저항이 거셌지만, 구셴중은 ‘적’을 교란시키고 일본군의 군량을 조달하며 2000여 명의 친일 민병대를 조직해 저항군을 제압했다. 세간에서는 “일본군 들어오니 구씨 얼굴에 웃음이 그치질 않네”라며 그의 매국 행위를 어머니를 팔아먹는 것에 비유한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구셴중은 배 12척을 모아 적진 정탐과 기뢰 제거 활동을 펼쳐 일제의 환심을 샀다. 이런 충성의 대가로 그는 소금·담배·아편 사업권을 받아 막대한 부를 일궜고, 일본 귀족원 의원에도 오르게 되었다. 그 시대 대부분의 친일파가 지위·학식·재산 등 사회적 기반을 갖춘 데 반해 구센중은 배우거나 가진 것 하나 없는 이른바 ‘흙수저’로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 이는 휜 떤이나 박춘금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세 사람 모두 이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온갖 호사를 누리다 죽은 일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더욱 기막힌 것은 구셴중의 후손들이 지금도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경제지 ‘재경망’에 따르면, 가업을 이어받은 아들 구정부는 ‘화신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자산이 한때 350억 달러를 넘어설 정도였다. 현재 손자 대에 이르러서도 이 가문은 금융·건설·해운·통신 분야 등에서 굴지의 기업군을 이끌고 있다. 일제에 빌붙어 모은 재산으로 재벌그룹까지 일군 일은 전 세계 식민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구셴중과 그의 아들 구정부(위), 구관민. 오른쪽은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는 구씨 저택
구셴중과 그의 아들 구정부(가운데 위), 구관민(가운데 아래). 오른쪽은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는 구씨 저택

역사적으로 대만 사람들은 네덜란드·중국 지배를 계속 받아왔기 때문에 일제의 식민통치에도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았다. 또 일제 총독부가 비교적 온건한 문화통치를 펼쳤고,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을 도모해 1905년에 이미 재정 자립을 이룬 일도 일제에 ‘관대한’ 이유 중의 하나다. 여기에다 정당 설립을 허용하는 등 대만에 정치적·경제적 자율권을 폭넓게 인정한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결국 대만에서는 일제의 식민지배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없진 않으나 “일본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뤘다”는 인식이 압도적이고, 따라서 일제에 협력해 부를 쌓은 사람들도 근대화의 공로자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국론 분열인가, 적전 분열인가?···아직도 되풀이 되는 ‘친일의 망령’

이와 같이 대만은 한반도가 경험한 식민지배의 기억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수성을 지녔다. 그럼에도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한국과 대만을 동일 선상에 놓고 왜곡된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있다. 우리와는 상반된 대만의 경험을 빌어 ‘식민지 근대화론’을 외치는가 하면, 친일청산 문제조차 ‘국론 분열’로 몰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현재 한·일 간의 대치 국면에서도 이들은 일본 측 주장을 감싸며 ‘친일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집안끼리 다투다가도 외부인이 싸움을 걸면 일단 힘을 합쳐서 물아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적전 분열’만 일으키는 꼴이다. 거칠게 말해서 부민관을 폭파한 세 청년들이 일본인보다 한국의 친일파를 겨냥한 심정이 이해될 정도다.

새삼 디지털 세상에 살고 있음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일본산 불매운동을 응원하는 댓글이나 국민청원 열기가 거세지고 있고, 그 효과도 더욱 확산되고 있다. 어찌 보면 박춘금 같은 자를 폭탄이 아니라 ‘클릭’이나 ‘터치’만으로 제거할 수 있는 시대가 온 듯하다. 이제 내 힘으로 내 나라 지키는 일은 손에 든 핸드폰 하나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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